Travel & People

People

[Book's Day] 파리 특파원들의 저술

Onepark 2022. 6. 13. 07:00

G : 6월 Book's Day에는 누구의 무슨 책을 말씀해주실 건가요?

P : 캠퍼스에 오래 몸을 담았던 탓에 6월 하면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므로 해외 어디로 나갈까 궁리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날마다 방학이고 휴가이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 유럽의 어느 도시에 가서 며칠을 보낼까 상상해보곤 한답니다.

 

G : 저도 어렸을 적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만 듣고도 멀리 떠나는 꿈을 꾸었던 기억이 납니다.

P : 지금은 각국이 코로나로 닫았던 관광객 출입문호를 정상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화' 바람이 불면서, 또 젊은이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배낭 메고 해외로 여행 떠나는 게 보편화되었죠. 국민들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한 1988년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로 나가는 사람은 유학생,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 언론사 해외특파원이 전부였어요. 그 당시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신문사 파리 특파원들이었는데 그들의 특집기사와 저서들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G : 저도 기억 납니다. 예컨대 유명 작가가 살던 곳을 찾아다니며 세계문학 기행을 연재한 한국일보 김성우(金聖祐. 1934-  ) 특파원, 서울에서 밀레 전시회, 루브르 프랑스 명화전을 열었던 조선일보 신용석(愼鏞碩, 1941-  ) 특파원,[1]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 책을 펴낸 홍세화(남민전 조직원으로서 처벌을 우려해 1982년 프랑스에 망명, 2002년 영구귀국) 씨가 있었지요.

P : 저는 통영 앞 욕지도 출신인 김성우 특파원이 어렸을 적에 보았던 이국적인 시용성(Chateau de Chillon)[2]이 생각납니다. 어딘지도 모르고 꼭 가보리라 결심한 후 언론사 파리 특파원이 되어 그 꿈을 이루었다는 김성우 기자의 말을 듣고 저 역시 마음에 새겨두었지요. 나중에 스위스에서 기차를 타고 몽트뢰(Montreux)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제네바 호반의 시용성을 직접 보았을 때는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꿈을 꾸고 준비할 때가 행복하지 막상 꿈을 이루게 되면 으레 그렇찮아요?

 

* 스위스 레만호와 시용성. 출처: my real trip.

G : 그럼 오늘 소개하실 독서 목록은 조선일보 신용석 특파원이 야심차게 번역했다는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인가요? 아니면 《영국사》인가요?

P : 오늘은 뒷날 한국일보의 편집국장, 주필까지 역임한 김성우 특파원의 글부터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명문장으로 선정되었고 고향 욕지도에 기념비까지 세워진 "돌아가는 배"라는 수필의 전문입니다. 그 동안 '욕지도'하면 통영 앞바다의 고등어, 우럭 같은 생선으로 알려진 섬이었을 뿐인데, 김성우 특파원의 수필과 합동 회갑잔치 같은 이벤트로 인해 '한국의 소렌토'로 격상이 되었다지요? 

 

나는 돌아가리라. 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출항의 항로를 따라 귀향하리라. 젊은 시절 수천 개의 돛대를 세우고 배를 띄운 그 항구에 늙어 구명보트에 구조되어 남 몰래 닿더라도 귀향하리라. 어릴 때 황홀하게 바라보던 만선의 귀선, 색색의 깃발을 날리며 꽹가리를 두둘겨대던 그 칭칭이 소리 없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빈 배에 내 생애의 그림자를 달빛처럼 싣고 돌아가리라.

섬의 선창가에서 소꿉놀이하며 띄워 보낸 오동나무 종이 돛배의 남실남실한 걸음으로도 사해(四海)를 좋이 한 바퀴 돌았을 세월이다. 나는 그 종이 돛배처럼 그 선창에 가 닿을 것이다.
섬을 떠나올 때, 선창과 떠나는 배에서 서로 맞잡은 오색 테이프가 한 가닥씩 끊기는 아픔이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든지 늘어지는 고무줄처럼 평생 끊기지 않는 테이프의 끝을 선창에 매어둔 채 세상을 주유했다. 선창에 닻은 내린 채 닻줄을 풀며 풀며 방랑했다. 이제 이 테이프에 끌려 소환되듯, 닻줄을 당기듯, 작별의 선창으로 도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온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내가 태어난 섬이 바다의 중심이다. 나는 섬을 빙 둘러 싼 수평선의 원주를 일탈해 왔고, 이제 그 중심으로 복귀할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녀 보니 나의 중심은 내 고향에 있었다. 그 중심이 중력처럼 나를 끈다.
내 귀향의 바다는 이향(離鄕)의 그 바다일 것이다. 불변의 바다, 불멸의 바다. 바다만큼 만고상청(萬古常靑)한 것이 있는가. 산천의구(山川依舊)는 옛 시인의 허사 일 수 있어도 바다는 변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노(不老)의 바다, 불후(不朽)의 바다. 늙지 않고 썩지 않고 항상 젊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변하지 않는 친구가 있다. 그것이 바다다. 그 신의(信義)의 바다가 나의 죽마고우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파도의 유희와 더불어 자랐다.

어느 즐거운 음악이 바다의 단조로운 해조음보다 더 오래 귀를 기울이게 할 것인가. 어느 화려한 그림이 바다의 푸른 단색보다 더 오래 눈을 머물게 할 것인가. 바다는 위대한 단조(單調)의 세계다. 이 단조가 바다를 불변, 불멸의 것이 되게 한다. 그 영원한 고전의 세계로 내가 간다.
섬에 살 때 머리말에서 밤새도록 철썩이는 바다의 물결 소리는 나의 자장가였다. 섬을 처음 떠나 왔을 때 그 물결 소리를 잃어버린 소년은 얼마나 많은 밤을 불면으로 뒤척였는지 모른다. 이제 거기 나의 안면(安眠)이 있을 것이다.

고향을 두고도 실향했던 한 낭자(浪子)의 귀향길에 바다는, 어릴 적 나의 강보(襁褓)이던 바다는 그 갯내가 젖내음처럼 향기로울 것이다. 그 정결하고도 상긋한 바다의 향훈이 젊은 날의 기식(氣息)이었다. 진망(塵網) 속의 진애(塵埃)에 찌든 눈에는 해풍의 청량이 물겹도록 시릴 것이다. 윤음 가서 바닷물을 한 움큼 떠서 마시면 눈물이 나리라. 왈칵 눈물이 나리라. 물이 짜서가 아니라 어릴 때 헤엄치며 마시던 그 물맛이므로. 소금기가 있는 것에는 신비가 있다던가. 눈물에도 바다에도 바다는 신비뿐 아니라 내게 무한과 영원을 가르쳐준 가정교사다. 해명(海鳴) 속에 신의 윤음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러 간다.

 

나의 바다는 나의 공화국. 그 황량한 광대(廣大)가 나의 영토다. 그 중요한 자유가 나의 주권이다. 그 공화국에서 나는 자유의 깃발을 공화국의 국기처럼 나부끼며 자유를 심호흡힐 것이다. 바다는 자유의 공원이다. 씨름판의 라인처럼 섬을 빙 둘러싸서 나를 가두고 있던 수평선, 그 수평선은 젊은 날 내 부자유의 울타리더니 이제 그 안이 내 자유의 놀이터다. 나의 부자유는 오히려 섬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수평선에 흘려 탈출한 섬에 귀환하면서 해조(海鳥)의 자유를 탈환할 것이다. 수평선의 테를 벗어난 내 인생은 반칙이다.

섬은 바다의 집이다. 대해에 지친 파도가 밀려 밀려 안식하는 귀환의 종점이다. 섬이 없었다면 파도는 그 무한한 표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희뜩희뜩한 파도의 날개는 광막한 황해(荒海)의 어느 기슭에서 쉴 것인가. 섬은 파도의 고향이다. 나는 파도였다. 나의 일생은 파도의 일생이었다.
바다는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허무의 광야. 파도는 이 허무의 바다를 건너고 건너서 섬에 와 잠든다. 나의 인생은 파도처럼 섬의 선창에 돌아와 쉴 것이다.

나는 모든 바다를 다 다녔다. 태양계의 혹성 가운데 바다가 있는 것은 지구뿐이라 더 갈 바다가 없었다. 육대양을 회유한 나는 섬에서 태어난 영광과 행복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바다의 모태 속으로.

바닷물은 증발하여 충전했다가 비가 되고 강물이 되어 도로 바다로 내려온다. 나의 귀향은 이런 환원이다. 바다는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고향은 세진(世塵)에 더럽혀진 나를 정화시켜 줄 것이다.
바다는 연륜(年輪)이 없다. 산중무역일(山中無曆日)이라듯 바다에도 달력은 없어 내 오랜 부재(不在)의 나이를 고향 바다는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섬은 이 탕아(蕩兒)의 귀환을 기다려 주소 하나 바꾸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고향은 집이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집이다. 쉬지 않기 위해 집을 나서고 쉬기 위해 찾아온다. 나는 꼭 만 18세의 성년이 되던 해 고향의 섬을 떠나왔다. 내 인생의 아침이었다. 이제 저녁이 된다.
모든 입항의 신호는 뱃고동소리다. 내 출항 때도 뱃고동은 울었다. 인생이란 때때로 뱃고동처럼 목이 메이는 것. 나는 그런 목 메인 선적(船笛)을 데리고 귀향할 것이다.
돌아가면 외로운 섬에 두고 온 내 고독의 원형을 만날 것이다. 섬을 떠나면서부터 섬처럼 고독하게 세상을 떠다닌 나의 평생은 섬에 돌아가면 옛 애인 같은 그 원판의 고독과 더불어 이제 외롭지 않을 것이다.

 

* 욕지도의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해발 392m 천왕산을 오가는 모노레일. 출처: 국제신문.

고향은 앨범이다. 고향에는 성장을 멈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빛 바랜 사진 속처럼 있다. 모래성을 쌓던 바닷가에서,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돌아온 옛 소년은, 잃어버린 동화 대신 세상에서 주워온 우화들을 조가비처럼 진열할 것이다.
아침녘의 넓은 바다는 꿈을 키우고 저녁녘의 넓은 바다는 욕심을 지운다. 어린 시절의 내 몽상을 키운 바다는 이제 만욕(滿慾)을 버린 내 노년의 무엇을 키울 것인가.
사람은 무엇이 키우는가. 고향의 산이 키우고 시냇물이 키운다. 그 나머지를 가정이 키우고 학교가 키운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것을 우유가 키우고 밥이 키운다.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면서 고향에 대해서는 보답하는 덕목을 모른다. 내게 귀향은 귀의(歸衣)다.

 

나의 뼈를 기른 것은 8할이 멸치다. 나는 지금도 내 고향 바다의 멸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먹은 주식은 고구마다. 내 고향 욕지도는 고구마의 명산지다. 그 때는 그토록 실미나더니 최근 맛을 보니 꿀맛이다.
내가 자랄 때 가장 맛있던 것은 밀감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아 값비싸고 귀하던 것이 지금은 이 섬이 주산지가 되어 있다.
나는 어릴 때 먹던 멸치와 고구마와 밀감을 먹으러 돌아간다. 내 소시(少時)를 양육한 자양이 내 노년을 보양할 것이다.

영국 작가 조지 무어의 소설 <케리드 천(川)>을 읽으라. "사람은 필요한 것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고향에 와서 그것을 발견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찾아 헤맨 파랑새는 고향에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어디로 가나 결국은 외국, 귀향은 귀국이다. 모국어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 고향 섬을 다녀온 한 지인의 말이 섬사람들의 말투가 어디서 듣던 것이다 싶어 생각해 보니 내 억양이더라고 한다. 떠난 지 50년이 되도록 향어(鄕語)의 어투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영원한 향인(鄕人)이다.

 

물은 위대한 조각가다. 나는 파도의 조각품이다. 파도가 바닷가의 바위를 새기듯 어릴 때 의 물결소리가 내 표정을 새겼다. 이것이 내 인생의 표정이 되었다. 한 친구가 내게 해암(海巖)이란 아호를 권한 적이 있다. 나는 섬의 바닷바위 위에 석상처럼 설 것이다.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는가. 그림을 그리리라. 고향의 미화(美化)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겠는가. 나는 알프스 산맥의 몽블랑도 그려왔고 융프라우도 그려왔다. 어릴 적 물갓집의 벽에 걸렸던 <시용성> 그림의 배경이 알프스 산맥이었다. 이 눈 쌓인 고봉들을 물가에 갖다놓고 이제 바다를 그리리라. 섬을 떠난 나의 출유(出遊)는 위로 위로의 길이었다. 나는 표고 4000m까지 상승한 증표를 가지고 도로 바다로 하강한다. 어느 화가가 내 서투른 그림의 과욕이 걱정되는지 바다를 잘못 그리면 풀밭이 된다고 했다. 그런들 어떠라, 바다는 나의 대지인 것을.

해면을 떠나면서부터 나의 등고(登高)는 이륙이었고, 이제 착륙한다. 인생은 공중 곡예다.

해발 0미터에서 출발한 나는 나는 해발 0미터로 귀환한다. 무에서의 시발이었고 무로의 귀결이다.
인생은 0이다. 사람의 일생은 토막 난 선분이 아니라 원이라야 한다. "자기 인생의 맨 마지 막을 처음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 괴테는 나를 예견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자신이 태어난 방에서 입적한 석가의 제자 사리불처럼, 그것은 원점으로 회귀하는 일이다.

나는 하나의 라스트신을 상상한다. 한 사나이가 빈 배에 혼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섬의 선창을 떠난다. 배는 돛도 없고 발동기도 없고 정처도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 것도 싣지 않았다. 한바다로 나간 뒤에는 망망대해뿐 섬도 육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배의 최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빈 배라도 띄울 선창을 나는 찾아간다.
물결은 정지하기 위해 출렁인다. 배는 귀항하기 위해 출항한다. 나의 연대기(年代記)는 항해일지(航海日誌)였다.

[월간조선, 한국의 명문장 100, 2005. 7.]

 

* 2009.10.24 통영시 욕지도 동항리에서 열린 김성우 선생 문장비 제막식. 출처: 통영시/연합뉴스

G : 아~ 감동적이네요. 섬 출신은 육지로의 탈출을 꿈꾼다고 하던데 "내가 찾아 헤맨 파랑새는 고향 섬에 있을 것이다"라니 저 역시 가슴이 뛰는군요.

P :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비록 하찮게 여겼던 것일망정 그것을 잃고 나면 아쉽고 그리워지는 것. 사춘기 십대 시절이 그렇고, 허송세월했던 청춘이 그러했지요.

저도 사진 속의 성(castle)이 어딘지는 몰랐지만 이발소 벽에 걸린 시용성은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제 경우에는 그림보다는 음악에 꽂혔다고 할까요? 샹송 "C'est La Vie"와 포레의 "Sicilienne"[3]를 들으면서 내가 유럽에 어느곳에 가 있다고 상상을 하곤 했지요. 그럼 17음절의 국문과 영문 하이쿠로 제 심정을 표현해 보겠습니다.

 

꿈을 펴려면 인생의 봄 날 그림을 그려야 해
누구나 마음 속에 걸어둘 아름다운 시용성
언젠가 도달해야 할 삶의 목적지 같은 그 곳

In burgeoning days, you have to draw
a picture of wonderful life.
You may have your Chateau de Chillon
in mind to go some day.
The pIcturesque castle becomes
the destination of your life-long path.

 

G : 조선일보의 신용석 파리 특파원은 모친이 재불화가인 덕분에 프랑스 명화전을 여러 차례 한국에 유치한 것으로 아주 유명했어요. 그는 또 앙드레 모루아의 역사책을 여러 권 번역한 걸로 압니다만?

P : 같은 조간신문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실세 장관 장기영 씨가 운영하던 한국일보가 파리 특파원을 보내자 조선일보에서도 파격적으로 서울대신문 편집장 출신인 외신부3년 경력의 초임기자를 파리 특파원으로 발탁했어요. 그는 프랑스 명화전을 연속 기획 성사시킴으로써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한편으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이 지속되고 있는 고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명저로 꼽히는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 《프랑스사》를 번역 소개하여 정치적인 계몽을 의도했다고 해요. 《프랑스사》의 서문에 밝힌 역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인 골 지방에 국가가 형성되고 백년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프랑스 국민은 정당한 일이라고 믿으면 그 것을 쟁취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이든 감수했다"라고 앙드레 모루아는 프랑스 국민정신을 정의한다. 프랑스 인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국토에서 정당한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프랑스 국민이 형성되었고 이는 앞으로 닥쳐올 대혁명을 예고한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대의 기초를 공고히 했던 명재상 아르망 장 뒤 리슐리외의 명언들도 명료하게 집약해 [소개하고] 있다. "복수심 강한 사람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미친 사람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또는 "모욕에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욕설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훈련 기회와 영예를 준다"는 그의 말은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실감 나는 경구다.


"내 첫 번째 목표는 국왕의 존엄성 확립이고 두 번째는 왕국의 위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라는 [리슐리외의 말은 키워드만 바꿔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즐겨 인용하곤 했다.] 이 목표를 단계적으로 성취하는 데 성공한 재상 리슐리외가 죽음을 앞두고 "당신은 적을 용서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사제에게 "내겐 국가의 적 외에는 어떠한 적도 없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일반 역사서에 서는 찾기 어려운 저자 특유의 역사서술법이다.
저자는 이 같은 명재상의 명언을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리슐리외는 실제로 프랑스 국민에게 사고에서는 명철한 논리를, 실천에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프랑스 국민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시에 성급하고 우둔해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태양왕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절대왕정 시대의 추기경 겸 재상 리슐리외를 부각시킨 저자의 역사관과 작가로서의 위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의 《프랑스사》가 다른 어떤 프랑스 역사책 보다 특이하고 생동감 있으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앙드레 모루아 저, 신용석 역, 《프랑스사》 해제, 김영사, p.7.

 

G : 비슷한 시기에 같은 조간신문의 파리 특파원을 지낸 김성우 기자와 신용석 기자의 불꽃 튀기는 경쟁 덕분에 우리 독자들은 여느 유럽발 외신 기사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운 심층보도를 즐길 수 있었겠네요. 

P : 그밖의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지금까지 양 신문사의 전설(legend)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 이성자, 오작교(1965). 세 아들과의 해후를 형상화한 이 그림을 보고 서정주, 조병화가 시를 썼다. 출처: 조선일보.

Note

1] 신용석의 모친 고 이성자(李聖子, 1918~2009) 화백은 1950년 6.25가 나던 해 그의 부친과 합의이혼하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의 외과의사인 부친 신태범이 고향인 인천에서 개업을 하였으나 일본 짓센(實踐)여자전문학교를 나온 모친은 3형제를 잘 가르치기 위해 서울에서 살 것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이혼으로 자녀양육권마저 뺏긴 모친은 1951년 결혼 전의 꿈을 살리고자 태평양--대서양을 건너갔다. 그리고 불어도 모르는 채로 무일푼 무명의 처지로 1953년 파리의 아카데미 그랑쇼 미에르(Academie Grande Chaumiere)에서 미술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3년 후에는 국립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파리 최고 갤러리였던 샤르팡티에에서 열린 '에콜 드 파리' 전에 쟁쟁한 화가들 작품과 함께 이성자의 "내가 아는 어머니"가 출품되었다. 1964년 같은 갤러리에서 이성자 개인전이 열렸다. 프랑스 문화부 관계자의 주목을 받아 이 작품은 국가에 영구 소장되었다. 이성자는 이 과정에서 화가, 미술행정가, 후원자, 평론가 할 것 없이 파리 미술계 주요 인사를 두루 사귀었다.

 

* 남프랑스 투레트 아틀리에 정원에서 이성자 화백과 함께 한 신용석 3형제.

한국에 남았던 세 아들은 파리에서 그림만 그리던 어머니를 이해했다. 장남 신용석은 1965년 이성자 귀국전시회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성대히 열어드렸고, 파리 특파원이 된 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한불 문화교류에 힘썼다. 차남 신용학은 파리로 유학을 가서 파리7대학 건축과 교수가 되어 어머니 곁을 지켰다. 셋째아들 신용극은 프랑스 명품수입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고 평생 어머니 작품을 구입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사고의 스케일과 경지가 상상을 초월하게 크고 높았던 이성자 화백은 2600여 점의 유화, 판화, 도자기, 태피스트리, 모자이크를 남겼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재불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그녀가 '음양'의 모티브를 형상화해 1992년에 지은 남프랑스 뚜레트의 아틀리에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프랑스 20세기 역사건축물로 지정되었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피카소나 샤갈도 하지 못한 일을 동양에서 온 여류 화가가 일군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프랑스에서 이성자 화백의 명성이 드높았던 까닭에 신용석 특파원이 현지 문화계 인사들과 접촉할 때 큰 힘이 되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붓질 한 번이 아이들 밥 한 술 떠먹이는 것이라 여기며 그렸다",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2022.4.23.

 

2] 시용성은 9세기에 주변국과의 교역을 위해 레만 호를 항해하는 배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12세기 사보이 백작의 거주지 겸 무기고로 사용되었는데, 한때 제네바의 종교개혁 지도자 보니바르를 가두기도 했다. 바이런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시용성의 죄수"를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를 떠나 레만호와 프랑스 알프스 연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여름철 재즈 페스티벌과 차이콥스키도 휴양 차 머물렀던 호텔로 유명한 몽트뢰를 찾는 여행자는 시용성도 꼭 들르게 마련이다. 몽트뢰의 호반공원에는 그룹 퀸의 프레드 머큐리 동상이 서 있고 그의 녹음실(현 Casino 호탤)도 있어서 그의 팬들이 많이 찾는다. 

 

* 몽트뢰 시는 프레드 머큐리가 음악녹음 및 재즈 페스티벌 참가 차 방문했던 것을 기려 동상을 건립했다.

3]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의 시실리안느(Sicilienne)는 관현악 조곡 Pelléas et Mélisande (Op.80, Sicilienne starting from 10:2) 제3악장의 플루트 독주로 시작하는 중세 유럽의 춤곡(舞曲)이다. 나는 그 아름다운 선율에 매혹된 나머지 그 춤이 유래했다는 이탈리아의 시칠리 섬을 연상하며 이 곡을 듣곤 했었다. 

 

사람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더 보시려면 이곳을 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