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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What if ~? 매우 생산적인 상상의 세계

Onepark 2021. 6. 24. 16:30

아파트 도서실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책을 한 권 집어들었다.

엘리자베스 코스토바가 지은 《히스토리언(The Historian)》이란 책이었는데 미국에서 2005년 출간 당시 경매를 통해 저작권료로 2백만달러를 받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영사에서 바로 번역 출간하여 한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다.

 

대강 훑어보니 제목 그대로 역사학자인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에게는 '드라큘라'로 많이 알려진 블라드 체페슈의 행적을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화자가 이태리와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등지로 다니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 여행기를 읽는 재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뱀파이어나 좀비가 나오는 영화나 소설을 멀리 했기에 내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흔히 이러한 소설을 '팩션', 즉 Fact (역사적 사실) + Fiction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허구) = Faction 이라고 한다.[1]

독자들은 작가가 파헤치는, 잘 모르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을 날줄로, 가공의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다이너믹한 사건들이 펼치는 재미를 씨줄로 하여 전혀 새로운 태피스트리{tapestry}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히스토리언》의 저자도 밝히고 있거니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가 대표적인 팩션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는 것은 완전 허구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The Dig》(2021)은 영국 서포크 지방에서 실제로 있었던 앵글로색슨 왕의 고(古)선박 발굴 작업의 비화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과 약간 다른 픽션 부분은 '예술적 라이선스(artistic license)'라 하여 용인되었다. 마치 영시에서 운율(엄밀히 말해서 rhyme)을 맞추기 위해 문법에 어긋나는 표현(각주 5)을 '시적 라이선스(poetic license)'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전의 베스트셀러였던 최인호의 《상도(商道)》 역시 조선 시대의 거상(巨商)이었던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을 다룬 일종의 팩션이라 할 수 있다. 임상옥은 사농공상의 상인 계급에 속해 그에 관한 역사기록이 희소하기에 픽션에 더 가까운 게 사실이지만, 작가가 소개한 홍경래나 김정희와의 일화, 말년에 천주교에 귀의한 것 등은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 달러 지폐 도안(In Gutreund We Trust) 속의 인물은 前살로몬 브라더스의 굿프로인드 회장

 

반면 작가의 상상력보다는 실제 체험, 언론 보도를 토대로 쓴 넌픽션도 있다. 1980년대 미국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 살로몬 브라더스[3]에서 일어난 일련의 극적인 사건을 기술한 마이클 루이스의 《Liar's Poker》가 대표적이다.[4] 마이클 루이스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Moneyball》, 《The Big Short》를 통해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사실 팩션에서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느 대목이 픽션인지는 작가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팩트만 나열하면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작가는 팩트의 시간적 순서를 바꾸거나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은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Liar's Poker》는 필자의 인생을 바꿔놓은 책[5]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마이클 루이스가 이 책에서 밝힌 상상력을 키우는 단련방법 "What if ~?"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의 멘토가 런던에 온 신참 트레이더에게 해준 말은 "뉴스만 보지 말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만일 ~한다면?'이란 게임을 즐기라"는 것이었다. 수십 억달러의 자산을 굴리는 펀드매니저라면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우왕좌왕하면 절대 돈을 벌 수 없다. 미리미리 주요 관심사를 "What if ~?"로 점검해 두어야 한다. 예컨대 "만일 도쿄에 지진이 일어난다면?"하고 대응책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기 전에 선점하라는 조언이었다.

 

마이클 루이스는 그가 좋아하는 스포츠인 프로 야구에서 그 적용사례를 발견했다. 만일 스타선수가 아니라 출루율 같은 데이터 위주로 선수를 기용한다면? 그는 승률을 높이기 위해 거액을 들여 스타 선수를 영입하는 대신 컴퓨터로 각 선수의 데이터를 분석(sabermetrics)하는 오클라호마 애쓸레틱스 구단운영 방식에 주목했다. 실제로 오클라호마 A 구단은 매 회 감독의 '감'이 아니라 이 방식으로 선수를 기용해 2002년 아메리칸 리그(ALB)에서 20연승을 거두었다. 

 

* 마이클 루이스 원작을 영화화한 브래드 피트 주연의 Moneyball (2011)

 

"What if ~?"가 말은 쉽지만 실행하기는 참 어렵다. 그러니 평소에 상상력을 단련하는 준비연습이 필요하다. 위의 사례에서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서 일본 시장에서 빠져나오려고 엔화를 팔 것이다. 그럼 투매 대상인 엔 자산을 헐값이 사놓는게 유리한데 무슨 종목부터 사들일 것인가? 이런 위험을 내다보고 프리미엄을 쌓아둔 일본의 손해보험사 주식은 어떤가? 보다 확실한 것은 일본 정부가 피해복구를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금리를 내릴 터이므로 국채 가격은 오를 것이라는 예측이다. 더욱이 해외투자를 늘려온 일본 기업들이 해외자산을 팔고 본국으로 U-턴할 테니 장기적으로는 엔화를 사놓는 게 유리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몇 단계의 "What if ~?" 상상은 우리나라 외환위기 때 값이 폭락한 국내 부동산과 부실채권을 외국 자본이 대거 사들여 크게 이득을 본 점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이것이 그저 공상이나 백일몽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어디까지나 팩트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실현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쪽으로, 더 바람직하기는 자기편에 득(得)이 되는 방향으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머리의  《히스토리언》은 작가가 역사학자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드라큘라 백작이 아직도 살아있다면?"에서 출발했다. 우리나라의 《상도》 역시 주로 청춘물로 인기몰이하던 소설가가 "조선시대의 거상(巨商)이 1990년대의 우리 기업인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준다면?" 상상을 하며 신문연재를 시작했다.

 

은퇴 후의 나의 소일거리도 기회있을 때마다 "What if ~?"를 적용해보는 것이 되었다. 아침에 조간신문을 펼쳐들고 "What if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테면, 아직은 희망에 머물러 있지만, 인공지능(AI)이 KoreanLII의 콘텐트를 가지고 머신 러닝을 한다면? 이를 위해서는 AI 학습의 정확도를 높여야 하므로 오래 된 KoreanLII 자료를 새로운 사실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참고해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법학도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 어필하려면?"이다. PC보다는 모바일에 더 익숙한 젊은 세대가 법에 관해 궁금한 사항을 찾아서 쉽게 읽어볼 수 있도록 체제와 형식을 고칠 필요가 있다.  내용도 MZ세대가 좀더 관심을 갖게끔 그래픽(사진과 그림)을 늘리고 그들의 관심사항(시나 노랫말) 위주로 개편하는 것도 시급해 보인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보며 젊은 감각이 풍기게끔 눈에 띄는 대로 수정을 가하고 있다.

 

저녁에도 그날 한 작업의 결과물을 놓고 "What if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최근에 올린 기사 중에 사람 입(人口)에 많이 회자되는 한 편의 시를 연관짓는다면? 마땅한 시가 눈에 띄면 그 주제나 시어(詩語) 중에서 KoreanLII의 리걸 콘텐트와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 이 일도 쉽진 않지만 매우 중독성 있는 흥미로운 지적 작업이 되었다.

How come?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보듯이 'Friendship'이라는 외국어까지 동원해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또한 독자가 KoreanLII 웹사이트에 들어온 이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흥미로운 사항을 찾아보게 모든 연관어를 링크시켜 놓아야 한다. 요컨대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두뇌작업은 치매예방에도 상당히 효과적이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 아이스댄싱, 페어의 고난도 묘기는 단 며칠간의 연습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아니다.

Note

1] 팩션의 효시로 알려진 소설은 1965년 미국의 트루먼 캐포티가 쓴 《In Cold Blood》(냉혈)이다. 1959년 말 캔자스 주에서 실제로 발생한 일가족 살해 사건의 범인 2명을 인터뷰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많은 사실에 덧붙여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했다. 넌픽션이면서도 소설 같은 재미를 안겨주어 단숨에 초판 10만부를 돌파하였다. 1968년에는 노먼 메일러가 월남전 반전행진 참가기를 로포 형식으로 쓴 《The Armies of the Night》(밤의 군대들) 같은 세계적인 화제작이 뒤를 이었다. 김성곤 교수, "'팩션'은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았는가?", 위의 《히스토리언 1》, pp. 278-279.

 

2] 인기 많은 소설가 최인호는 1990년대 기업인들이 사표로 삼을 만한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우선 제목부터 정했다. 백방으로 《상도》의 후보를 고민하던 중 윤승운의 만화 ‘한국의 위인’ 임상옥 편에서 전광석화 같은 영감을 받았다. 수소문해 만화가를 찾아갔지만, 자료가 빈약하여 실망하고 있던 차에 두어 달 뒤 두툼한 소포를 하나 받았다. 그 안에는 윤승운이 발품 팔아 찾은 임상옥의 야사(野史)가 가득하여 최인호는 이것을 토대로 1997년 한국일보에 《상도》(임상옥)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만화가 윤승운은 자료를 바탕으로 인물·역사 만화를 그려왔는데 성균관 한림원에서 한문을 7년씩 공부했고, 각종 역사책과 자료를 3000여종 모아놓은 터였다. 소설가는 자신보다 두 살 위였던 만화가에게 “그는 《상도》를 낳은 자궁이자 태반이었고, 창작혼의 심지에 불을 지핀 부싯돌이었다. 정직하고 열심히 사는 윤승운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감사의 말을 적었다. 어수웅, "추모 최인호, 추억 윤승운",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2020.9.26.

 

3] 살로몬 브라더스는 1980년대 MBS거래를 통해 업계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이었다. 《Liar's Poker》에서 언급한 대로 굿프로인드(Gutfreund) CEO겸 이사회의장이 가혹하리만치 수익성 위주로 채권거래에 중점을 두고 운영한 결과였다. 그러나 드렉셀번햄 램버트의 마이클 밀켄 채권본부장이 정크본드 인수・판매를 통해 살로몬의 시장을 잠식하고, 결정적으로는 1991년 굿프로인드 회장의 불명예 퇴진을 몰고온 국채입찰 부정 사건으로 금융시장에서의 신용이 추락하여 1998년 보험사인 트래블러스에 인수되었다. 이듬해 다시 시티그룹과의 합병으로 시티그룹 산하의 살로몬 스미스바니란 증권회사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 영화 《Bombshell》에 나오는 허구의 피해자.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출처: Slate.com

 

4] 마이클 루이스의 넌픽션 《Liar's Poker》을 원작으로 1999년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예고편만 보았을 뿐이지만 R등급의 범죄영화로 분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픽션이 엄청 많이 들어가 있음에 틀림없다.

샤를리즈 테론,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Bombshell》(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2019)도 그러하다. 2016년 미국의 폭스 뉴스 방송사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사내 성희롱(sexual harassment) 사건의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휫슬블로어 같은 몇몇 가공인물을 설정했다. 물론 영화에서는 본편 시직 전에 이 점을 공지해 두었다. 폭스 뉴스 CEO 로저 에일스는 시청자들이 앵커 우먼의 각선미를 볼 수 있게끔 스커트만 입도록 하고 테이블 밑을 개방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5] 필자가 산업은행에서 국제금융 조사 업무를 맡고 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용어가 몇 개 있었다. 'Junk Bond'와 'Mortgage-backed Securities' (MBS)는 사전을 찾아봐도 상사들에게 물어봐도 속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 후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할 때 2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병실에 있던 이태리계 미국인이 내가 읽고 있던 책 표지를 보고 Liar's Poker의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마이클 루이스는 월가 사람들에게는 너무 진부한, 하지만 외부인들은 전혀 몰랐던, 금융상품과 금융기법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그가 살로몬 브라더스의 트레이딩 룸에서 일할 때 MBS(모기지 담보부증권)을 거래하던 모기지 부서에서 미국 러스트 벨트와 선 벨트 지역의 저축금융기관(S&Ls에서 일어나는 자금수급의 불균형을 MBS로 해소할 수 있다고 아이디어를 낸 것, 살로몬 브라더스가 1980년대 초반에 석권했던 MBS 시장을 드렉셀 번햄의 채권본부장 마이클 밀켄이 고수익 고위험(high-risk high-return) 채권인 정크본드를 가지고 쟁탈전을 벌인 일 등이 알기 쉽게 또한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예를 들면 밀켄이 채권본부 사무실을 본사가 있는 뉴욕이 아니라 LA에 두었던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비벌리힐즈의 부유층 고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동부와의 시차를 이용해 3시간 더 업무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식의 업계에서만 알 수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1987년의 블랙먼데이까지 다룬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불과 몇 년 후 마이클 밀켄이 내부자거래(insider trading) 혐의로 구속되면서 정크본드 시장이 붕괴되고 S&L의 1/3이 도산하는 금융위기가 초래되었다. 그 바탕이 되었던 금융현상과 구조화금융(structured financing)의 원리는 필자의 박사논문에도 인용되었고, 교수 시절 초기에 IMF 사태를 다룬 여러 논문이나 외부강의의 단골소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