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People

People

[가곡] 짝사랑의 추억이 '동무생각(思友)'으로

Onepark 2021. 2. 10. 23:00

입춘(立春)도 지났으니 꽃 피는 봄이 머지 않았다. 전에 학교 다닐 때 자주 불렀던,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가곡 '동무생각'을 콧노래로 부르게 된다. 지금 불러도 전혀 촌스럽거나 고루하지 않고, 멀리 있는 친구를 불러서 우정을 다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노래는 초창기에 나온 한국의 가곡(歌曲, Lyric song)으로서 기존 창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였다. 더욱이 그 가사가 학창시절에 짝사랑했던 여인에게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스 부호 같은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해석한다면 그 배경이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1922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하던 박태준("P", 朴泰俊, 1901~1986)이 동료 국어교사 이은상("L", 李殷相, 1903~1982)과 나는 이야기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P: 봄동산에 화사하게 꽃이 피니 마치 심포니가 울려퍼지는 것 같네요. 내가 살았던 대구의 고향 언덕 위에는 선교사 사택이 있는데 담벽에 담쟁이넝쿨이 뻗어올라가 청라(靑蘿=푸른담쟁이) 언덕[1]이라 불렀어요.

L: 아, 그래요? 참 이국적인 풍경이겠구려.

* 사진 출처: 중국 시안 거리의 야경 외에는 Google image

 

* 대구 동산병원 옆 청라언덕의 이국적인 풍경

 

P: 대구에 있는 계성고에 다녔는데 청라언덕을 올라갈 때면 그 아래 신명학교 다니는 얼굴이 하얀 여학생하고 마주치곤 했어요. 수줍음을 타서 말도 걸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백합화 같다고만 생각했지요. 마침 그 학교 교화가 백합이었거든요.

L: 그 여학생을 못 본 날은 너무 실망스러웠고, 다행히 만난 날은 가슴이 두 방망이질 쳤겠지만 온갖 시름걱정이 다 사라졌겠구려.

 

P: 나는 남해 바닷가에 와서 음악선생 하고 있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L: 내가 시를 지을 테니 박 선생이 곡을 붙여 사람들이 애창한다면 그녀도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하지 않겠어요? 대구의 청라언덕 말고 그녀가 박 선생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는 힌트가 또 없을까요?

 

P: 내가 이곳 마산에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니 바닷가의 백구(白鷗=하얀 갈매기), 그녀도 같이 거닐었던 청라언덕의 연못과 거기서 노니는 비단잉어를 넣으면 좋겠어요.

L: 봄 동산의 백합화, 여름 바닷가의 흰물새, 낙엽지는 가을 연못의 금붕어(金魚)로 하되 지금 박 선생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대를 만나 볼 수 있다면 모든 슬픔이 사라지겠다"는 말을 덧붙이면 되겠지요?

  

P: 봄 여름 가을은 되었고 겨울은 무엇으로 표현하지요? 눈보라, 눈사람? 

L: 당나라 장안(오늘날의 西安)은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유명하니 그곳의 왕궁도 불빛이 없으면 알마나 쓸쓸하겠느냐 하는 식으로 대구(對句)를 만들어 보리다.

 

P: 암호 같은 노랫말에 가슴 사무치는 곡조를 누구나 부르게 된다면 그녀도 틀림없이 내 생각을 하게 되리라 생각해요.

L: 4계절의 연시(戀詩)를 마치 동요처럼 지어볼 테니 박 선생이 국민가곡으로 멋지게 만들어 보셔요. 

 

이와 같이 20대 초반의 동년배인 이은상과 박태준이 서로 고향 이야기, 짝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의기 투합하여 국민애창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박태준의 멜로디가 먼저 지어졌고 이제 막 시조시인으로 등단한 이은상 노랫말이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은상이 그의 고종사촌누이를 소개하여 그 둘은 결혼까지 하는 인연을 맺었다. 

지금까지 '동무생각'은 브람스의 "대학축전서곡"처럼 학창시절 첫 학기에 으레 부르는 '봄의 노래'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뒷이야기를 듣고나니 유쾌한 반전(反轉)이 아닐 수 없다. 짝사랑 또는 '썸' 타는 청춘남녀를 청라언덕과 백합화, 저녁의 바닷물(潮水)과 백구(白鷗), 연꽃이 진 연못과 금붕어떼, 장안(長安)의 밤과 가로등으로 비유한 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재치 만점인가!

 

* 청라언덕 위에 세워진 대구 사람 박태준의 시비(詩碑)

 

동무생각 (思友, 1922) [2] -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

Recalling My Friend [3]  written by Lee Eun-sang and composed by Park Tae-joon

봄 Spring

봄의 교향악(交響樂)이 울려 퍼지는 청라(靑蘿)언덕 위에 백합(百合)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4]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When white lilies bloom on a green ivy hill,
a sympony of spring reverberates.
Sniffing the fresh fragrance of white lilies,
for you, my dear, I sing songs after songs.
My heart is like the green ivy hill
and you’re like a white lily, my dear.
When you fully bloom in my heart,
all sorts of sorrow fade away.

여름 Summer

더운 백사장(白沙場)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潮水) 위에 흰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 위에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When white birds hop on evening tides,
they surge onto hot white shore.
Beholding mountains and rivers far away,
for you, my dear, I sing songs after songs.
My heart is like the evening tides
and you’re like a white bird, my dear.
When you playfully hop on me,
all sorts of sorrow fade away.

가을 Autumn

서릿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진 연당(蓮塘)에서 금어(金魚) 뛸 적에,

나는 깊이 물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금어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적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When goldfish jump in a lotus pond with flowers gone,
Autumn leaves are swept by chilly wind on a hill.
Bending down low into the water,
for you, my dear, I sing songs after songs.
My heart is like the lotus pond with flowers gone
and you’re like a goldfish, my dear.
When you joyfully jump upon me,
all sorts of sorrow fade away.

겨울 Winter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長安)에서 가등(街燈)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城宮)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5]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When street lamps shine brightly at night,
Snow are falling silently in downtown,
Looking at the grand palace,
for you, my dear, I sing songs after songs.
My heart is like downtown at night
and you’re like a street lamp, my dear.
When you shine brightly inside me,
all sorts of sorrow fade away.

 

* 중국 시안의 야경을 비추는 가등(街燈). 출처: 럼주의 세계여행 네이버 블로그

 

Note

1] 대구의 청라언덕은 미국 선교사가 가져온 사과 묘목을 처음 심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 사과나무가 그 지역 일대에 퍼지면서 약령시장으로 알려졌던 대구가 사과의 산지로 거듭 나게 되었다.

 

* 대구 청라언덕 위의 선교사 사택과 지방보호수인 사과나무 자손목

 

2] 이 노래의 제목이 처음에는 "사우(思友)"였으나 널리 애창이 되면서 알아듣기 쉬운 "동무생각"으로 바뀌었다. 이 곡이 1922년에 발표된 것은 확실하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봉선화"와 어느 것이 한국가곡의 효시인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봉선화"의 멜로디가 작곡자인 홍난파에 의해 이미 발표되었던 데다 그 가사도 종전의 4-4음절의 창가 형식을 따른 점에서 가곡의 발전과정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평가해 "봉선화"를 가곡의 효시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예술가곡의 관점에서는 독일에서 Lied를 공부하고 온 채동선의 정지용 작시 "고향"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3] 영어 가사는 유튜브에 나와 있는 YouShine의 영문 자막을 토대로 영시의 형식과 운율을 살려 필자가 새롭게 번역하였다. 같은 '친구, 벗'이라 해도 "지란지교를 꿈꾸며"와는 달리 이 노랫말은 젊은 남성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절절이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처음엔 부르기 쉽고 여유있게 4분의 4박자로 진행되던 곡조가 이 대목에서는 갑자기 8분의 9박자로 변박(變拍)이 되어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소리쳐 불러야 한다. 그리고선 이내 조용히 사라지듯 끝을 맺는 게 이 곡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5] 이 노래의 매력은 가사를 곱씹을 수록 1련의 짝사랑 상대이던 동무가 연을 거듭함에 따라 친구와 우정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꽃진 연못의 금어(시즌이 끝난 아쉬움), 장안의 가등(현종-양귀비의 로맨스가 일깨운 역사의식)으로 발전하면서 동무생각은 진시황 병마용, 끝없이 긴 성곽, 실크로드의 출발지, 중국 서부개발의 거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이르러 꿈이 확 깨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