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저녁 가형(家兄)이 돌아가셨다. 향년 85세.
장례는 화장이 예정되어 있어 입관을 할 때 참관을 하고 가족 대표로 조사(弔辭)를 하기로 했다.
요즘 코로나 거리두기로 인해 장례식장에서는 종교적 집회가 금지되어 있는 데다가 유가족은 無종교이기 때문에 뭔가 짧게 함축적으로 추모의 말씀을 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KoreanLII에 영역해서 올려놓은 적이 있는 박노해 시인의 "겨울 사랑"을 인용하면 좋을 듯 싶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로 떠나가시는 박태용(朴太鏞, 1936. 11. 18 ~ 2021. 1. 29) 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것을, 우리가 본 영화 "반지의 제왕" 제3편에서는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지금은 한겨울이지만 포근한 날씨에 떠나시는 모습을 보고 박노해 시인의 "겨울 사랑"을 떠올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갑자기 닥친 일이었지만, 작년에 여러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한겨울에 서로 따뜻한 포옹을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옛날부터 자전거 타기, 카메라 사진찍기를 좋아하셨고, 멋을 부릴 줄 아셨으며 딸바보임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세 딸들에게 이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셨습니다. 술 담배 커피를 너무나 끔직이 사랑하셨으며,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하고 싶은 일 맘대로 할 순 없었으나 소박한 꿈도 많이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복(福)을 누리고 사셨습니다.
연애 결혼한 사랑하는 여인과 평생을 해로하셨고, 삶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어디선가 귀인이 나타나 도와주었습니다.
의사는 건강이 나빠지면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지요. 그럼에도 불과 열흘 전에는 엘리베이터 수리가 덜 끝난 아파트 8층을 거뜬히 계단으로 걸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고통 없이 주무시듯이, 내 집 내 자리에서 편안히 가신 것입니다. 험한 일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오늘날 이것은 백만금을 주어도 누릴 수 없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박노해 시인은 "겨울 사랑"[1]의 마지막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여기 남은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 재난이 머물러 있음에도, 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추운 겨울날엔 이렇게 기억하겠습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있기에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겠노라고, 그리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을 쑥쑥 키우겠노라고 요.
이제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로 편히 가시옵소서.
2월 1일 장례식은 아침 일찍 수원연화장에서 화장을 마친 후 용인에 있는 수목장 전문 로뎀파크 공원묘지에 유골함을 안장하는 것으로 끝났다.[2]
미리 구덩이를 파놓은 묘자리에 친환경 유골함을 안치하고 유족들이 차례로 흙을 덮는 것으로, 일반 매장하는 방식과는 달리 순식간에 끝났다. 계단식으로 조성된 공원묘소에는 울긋불긋한 꽃들이 놓여 있었다.
유족들이 고인은 이런 곳으로 소풍나오는 것을 좋아하셨다며 꽃구경도 하고 질병의 고통 없이 재미있게 놀러다니시라고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그 말을 듣고 문득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 시 구절이 생각났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Note
1] 위의 시들은 KoreanLII.or.kr에서 'Literature and art' 항목의 주제(Insight, Life), 또는 'Poet' 항목의 시인 이름을 찾으면 우리말과 영문으로 된 시의 전문을 읽어볼 수 있다.
2] 장례식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지만, 내 기억에 아주 인상적이었던 영화 Elizabethtown (2005)을 한 번 더 보았다. 신상품의 대량 반품으로 회사를 망쳐 놓았다고 해고 당한 젊은이(반지의 제왕에 나온 올란도 블룸 분)가 고향을 방문 중이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듣고 고향을 찾는다. 땅에 떨어졌던 자존감을 회복하고 친척들과도 화해하며 사랑도 얻는 해피엔딩 영화다. 미국 켄터키주의 엘리자베스타운에서는 고향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주민들이 모두 애도를 표하고 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러나 모친이 원하는 대로 화장을 하고 쾌활했던 고인의 스타일에 따라 영결식은 떠들썩하게 갖되 타지(캘리포니아와 오레곤)에서 살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로 한다. 그 지역의 명소를 찾아 이곳저곳에 유골을 뿌리고 다니면서 주인공은 삶의 활력을 되찾고 이렇게 조언을 해준 삶의 반려자도 얻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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