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정은 마치 성지순례라 할 수 있는 코린토스(성경의 고린도) 유적지 방문이다.
사도행전 18:1-3을 보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헬라인들과 논쟁을 벌였던 바울이 고린도로 직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로마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한 아굴라 부부를 만나 천막 만드는 일을 동업하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물론 코린토스에는 볼거리가 많다. 여러 번 시도 끝에 19세기 말에 완공된 코린토스 운하*가 있고, 오랜 옛날부터 상업과 의학이 발전했던 무역도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 산도 코린토스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 코린토스 지협(地峽)은 수로를 내기만 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우회하지 않고 지중해에서 아테네와 터키 방면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므로 로마 네로 황제 때부터 여러 차례 운하건설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했던 이유는 우선 지대가 높아 수로를 넓게 만들 수 없고 수직에 가까운 안벽을 쌓아야 하므로 천문학적인 공사비가 들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코린토스에 큰 항구를 만들어 놓고 육상으로 운송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19세기 말 헝가리 출신 기술자가 천신만고 끝에 운하를 개통하였으나 폭이 너무 좁아 대형선박은 통행할 수 없고 또 엔진의 진동으로 암벽이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어 지금은 작은배나 유람선이 다니는 정도이고 오히려 번지 점프장으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버스가 아테네를 떠나 스파르타 지방을 통과할 때쯤 내가 마이크를 잡고 성경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여행을 같이 하는 회원들 중에는 기독교신자가 아닌 사람도 많았으므로 되도록 쉽게 설명을 해야 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육체의 가시(고린도 후서 12:7, 다마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광채를 보고 눈이 먼 후에 생긴 안질로 추정)를 빼달라고 열심히 세 번이나 기도를 하였습니다. 바울이 받은 응답은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약함 속에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이것 때문에 바울이 날마다 자신을 쳐서 겸손해지고 말씀에 복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바울의 기도는 200% 아니 300%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가 병을 안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 실력있고 충직한 의사 누가(Luke)를 평생 붙여주셨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지요. 나아가 바울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사도행전으로 남겼습니다.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바울의 3차에 걸친, 목숨을 건 선교 여행을 그처럼 자세히 알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헬라인임에도 누가복음의 저자로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가이드 곽동훈 씨는 성지순례단을 안내하기가 오히려 쉽다고 말했다. 누가 불평이라도 하려 들면 "이길을 사도 바울은 걸어서 다니셨는데 우리는 편하게 차를 타고 가고 있잖습니까!" 하는 것으로 설득이 됐다고 했다.
그리스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야외활동을 하려면 차양막이 필수적이었고 이곳 코린토스는 품질 좋은 천막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추방되어 온 아굴라 부부와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하였고, 천막 제작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만큼 오래 체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곽동훈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한낮의 땡볕을 피해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1930년대 미국의 고고학 협회에서 지어준 건물에 별로 돈 들인 흔적 없이 소장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오랜 식민지배를 받았던 그리스인들이 돌기둥을 더 좋아한 탓이라기 보다 문화재 약탈자들이 온전한 유물들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에 고대 그리스 유물의 진품이 더 많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리스 조각상들은 그것을 깨부수면 시멘트와 같은 효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건축 현장에서도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색적인 것은 팔과 다리, 유방, 남자의 성기 같은 인체의 부위가 전시되어 있는 점이었다.
코린토스는 고래로 의학이 발전하여 해당 부위의 질환을 앓는 사람이나 이를 고친 사람이 진흙이나 대리석으로 똑같이 만들어 의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남성의 경우 포경이 상당히 심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작은 짐승 모형은 어린이 환자가 가지고 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앞쪽의 바다와 뒤편의 시시포스 산을 보니 코린토스에 살았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상거래와 환락(아프로디테 신전은 공인된 성매매장소였음)에 탐닉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또 풍부한 물산과 교통의 이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오갔을 것이다.
이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파벌주의, 성적 타락, 세속주의를 경계하도록 두어 차례 편지를 보내고 사랑에 대해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연단은 성경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유명한 로마 총독의 법정이다.
사도 바울의 정력적인 선교활동에 힘입어 고린도에는 기독교 신자가 부쩍 늘어났다. 바울은 고린도에 1년 반을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 때 새로 로마 총독이 부임하자 유대인들은 바울이 율법을 어기고 사람들을 미혹한다며 고소하였다.
이에 갈리오 총독은 잠자코 그 말을 듣더니 바울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유대 율법이나 명칭에 관한 문제는 총독이 심판할 일이 아니라며 기각하였다.
그 때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이기도 한 갈리오 총독은 바울을 법정에 둔 채 그를 고소한 유대인들을 내쫓았다. 즉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펴는 고소인들로부터 로마 시민인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분이 풀리지 않은 유대인들은 바울에 유화적이었던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다 법정 앞에서 매질하였으나 갈리오는 이를 못 본 척했다고 한다. (사도행전 18:11-17)
당시 코린토스는 부유한 도시였던 만큼 빈부격차도 심했던 모양이다. 기독교도들이 함께 모여 식사할 때에도 부자와 고관들은 잘 차려진 음식을 먹은 반면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사람은 간소한 메뉴로 만족해야 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가장 좋은 음식을 먹으며 술에 취하고 어떤 사람은 배고픈 채로 돌아간다고 고린도 사람들의 만찬 행태를 지적했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질타하고 (고린도 전서 11:20~22),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 전례를 따르라고 권면했다(고린도 전서 11:23~25).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본 후에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라고 하면서, 시장하거든 집에서 먼저 먹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라고까지 일렀다(고린도 전서 11:28, 34).
그래서 고린도 전서의 그 유명한 '사랑(Love is)' 챕터가 나오기 전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차별이 없는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고 우리 몸의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귀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헬라인들에게 보편화되어 있던 점치는 것(fortunetelling)에 대해 뭐라고 하셨을까?
고린도나 에베소에서 점치는 사람들이 먼저 사도 바울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알아보았다. 그들이 바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였으므로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 주인들의 원성을 샀다.
그 다음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보고하러 가겠다 하자 예언자와 측근들이 이구동성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포승줄로 묶이게 된다면서 극구 만류했다. 바울은 그러한 예언을 일축하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다. (사도행전 21:10-14)
마지막에는 바울 자신이 예언을 하게 된다. 로마 백부장에 의해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 크레타 섬 부근 해상에서 유라굴로 폭풍을 만났다. 2주간이나 표류하다가 배가 위난을 당하게 되었을 즈음 로마 병정과 선원, 다른 승객들 앞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로마 황제 앞에 서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의 안전을 지켜주신다고 했다." (사도행전 27:23-24)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또 다른 과제인 미케네 문명의 유적지를 찾아보러 나섰다.
유적지가 이처럼 높은 산에 자리잡고 있지만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해양문명을 구축하였다고 한다. BC1600년경부터 크레타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해상무역을 통해 부강해졌다.
싸움을 잘해 용병 같은 인력을 각지에 파견하여 황금을 많이 거둬들였고 유물 중에는 금제품이 많아 후세에 도굴과 약탈의 표적이 되었다.
뜨거운 날씨 탓에 주마간산으로 미케네 문명의 자취를 살펴본 우리 일행은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올림피아로 이동했다. 숲속에 자리한 Antonios 호텔은 WiFi가 로비에서만 터져 답답했지만 풀장도 있고 큰나무가 많아서 시원했다.
저녁 시간에 우리 일행은 아랫 동네로 내려가서 낙지 같은 별미를 즐기고 선물을 쇼핑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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