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서의 마지막 날 테헤란에서 이란의 정치, 경제, 문화를 총 결산할 참이었다.
아침 일찍 팔라비 왕가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했던 왕궁과 정원을 관람했다.
20세기 들어 이란은 1906년 입헌군주제 혁명, 1908년 이란 사막에서의 석유 발견, 1차 세계대전의 중립선언을 무시한 서구열강의 전장화 등으로 정국이 혼미를 거듭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1921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당시 수상이던 레자 칸이 권력을 잡고 1925년 새로 샤(Shah)로 즉위하여 팔라비(Pahlavi) 왕조를 열었다.
그리고 1935년 페르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을 모두 아우르는 아리안족의 나라 "이란"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하계별장은 정원이 아주 넓고 건물의 외관은 백색으로 서양식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소르본느 출신인 왕비의 취향에 따라 카펫 말고는 호화스런 프랑스식 인테리어로 치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건물 입구에 프러시아 군대의 군화가 조형물로 전시되어 있어 이채로왔다.
팔라비 왕가의 별장은 테헤란의 역사지구 안에 있어 주변에는 박물관 기념관이 여럿 있었다.
이슬람 국가는 금요일이 휴일이고 목요일과 토요일은 반공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토요일임에도 거리가 복잡하고 다음 행선지인 국립박물관 앞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페르시아의 유적과 유물을 많이 보았던 탓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고학 유물들이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우리 일행은 격조 있는 도심의 그랜드호텔 뷔페에서 식사를 했다. 그간 질리도록 먹었던 양고기, 닭고기 외에 메추라기 구이가 있어 구미를 당겼다. 수박도 실컷 먹고 마지막에는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그 다음은 이란 중앙은행에서 관리하는 보석박물관을 구경했다. 지구의를 육지는 루비, 바다는 사파이아로 장식한 것도 보았다. 이란의 위치에는 큰 다이아몬드 2개가 박혀 있었다.
온갖 보석으로 장식한 왕관은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 무거워 어느 왕비는 대관식을 치르고 졸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왜 정정이 불안한 나라일 수록 권력자는 보석에 탐닉할까?
보석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유사 시 들고 튀려는 심산도 있지 않을까?
일찍이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부동산 같은 유형의 자산을 보유하기보다는 무형의 지식재산을 존중하고 물건을 소지하더라도 다이아몬드 같이 고가 소형의 보석을 선호한다.
우리나라에도 "백성들이 자신의 보석"이라고 말하는 위정자가 나와야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에 관심있는 일행들도 있어 혼잡함을 각오하고 테헤란의 그랜드 바자르로 갔다.
역시 수많은 인파로 혼잡하기 그지 없는 이 지역에서는 소매치기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9년 호메이니가 혁명을 선포하였을 때 보수적인 상인들이 그를 적극 지지했었다고 한다.
테헤란의 그랜드 바자르는 규모와 상품 면에서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볼 만한 것도 적지 않았다.
무사히 그랜드 바자르를 빠져 나온 우리 일행은 교통체증이 심한 거리를 이리저리 통과하여 북쪽에 위치한 테헤란 공원으로 갔다. 이곳의 명소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고속도로 건너편 높은 국기게양대가 서있는 공원과 연결하는 자연의 다리(Tabiat Bridge)였다.
저녁 무렵의 테헤란 공원은 고즈녁하고 산책나온 시민들도 많았다.
사전지식이 없이 이곳에 온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서울 서초동 누에다리와 비슷한 3층의 보행자 전용 철제다리가 고속도로 위에 가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26세의 아르메니안계 여성 건축가 라일라 아라기안(Leila Araghian)이 1년에 걸쳐 설계하고 그 아래 고속도로 통행을 막지 않은 채 첨단 공법을 써서 3층으로 된 270m의 다리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자연의 다리' 위에 서는 순간 사방이 푸른 녹지라서 눈이 시원해졌다.
보행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홀로 경치를 구경할 수도 있고, 친구와 둘러앉아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아래층에서는 간단히 식사를 하거나 차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니 이 다리 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경이로웠다.
우리는 가이드의 해설을 듣기 위해 마이크 달린 헤드폰을 위해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보는 것이 그대로 이해가 되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내일 아침에는 두바이행 비행기를 타야 하므로 새벽 4시에 호텔에서 출발해야 한다.
테헤란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고대하던 중국음식이었다. 한국 음식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한-이란 관계와 경제협력방안에 관한 특별 강연을 듣기로 했기에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홀이 필요했다.
이란 여행을 결산하자면 A학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페르시아 왕국의 영화가 7세기 이슬람교 전래 후에도 찬란한 이슬람 문명으로 꽃 피운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이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친절했다. 다시 오고 싶다는 일행이 많았다.
그러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화장실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도로의 교통이 무질서한 것은 문제였다.
페르시아 기행의 마지막 행사로 SAT Consulting Engineers의 Edmond Mizakhanian 씨가 한국-이란의 경제협력 방안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다. edmond@sat-iran.com 통역은 홍형택 박사가 수고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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