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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5] 반크 아르메니아 교회와 체헬소툰 궁

Onepark 2016. 7. 21. 17:32

이스파한에서 이틀째.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반크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찾아갔다.

교회 외관이나 내부는 그리스 정교회와 비슷하였으나 고난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성화들로 벽면을 장식해 놓았다. 남성들의 아카펠라 찬송이 낮은 울림으로 방문객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기네 영토 안에 있는 아라랏 산에 내린 노아와 그 가족이 아르메니아인의 먼 조상이며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코카사스 지방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하여 오스만 튀르크는 이들을 각지로 집단 이주시켰다. 코카사스 지방은 러시아의 남하통로인 데다 기독교인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유럽 여러 나라와 내통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을 스탈린 정부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소개시킨 것과 비슷했다.

그렇기에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나톨리아(터키) 반도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학살(Genocide)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1915년에는 독립운동을 하던 아르메니아인 지도자 300여명이 앙카라에서 집단 처형 당하는 일도 있었다. 

 

교회 옆 박물관에서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이란에 강제이주하게 된 배경, 여러 차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박해와 집단학살을 당한 일, 특히 1915년 독립운동이 집단처형과 인종청소로 이어졌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에는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피난을 갔는데 유명한 샹송 가수 샤를르 아즈나브르도 아르메니아인이며 그들은 ". . ian"으로 끝나는 이름을 갖고 있어 쉽게 알 수 있다.

 

위의 흉상은 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운동을 벌인 아르메니아인 지도자 예프림 칸(Yeprem Khan)이다. 그가 테헤란 경찰국장이 된 후로는 분리주의자들과 거리를 두어 아르메니아인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 다음 코스는 체헬소툰(Chehel Sotun, 40개의 기둥이란 뜻) 궁전이었다.

이곳은 이란 왕국의 영빈관과 하계별장으로 쓰였는데 궁전의 이름이 20개의 궁전 기둥이 연못에 비쳐 40개로 보인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하다. 실제로 가서 보니 기둥 외에도 정원의 키 큰 나무들이 기둥처럼 많이 보였다. 이 연못 주변에서는 수십 명의 후궁과 무희들이 뇌쇄적인 춤을 추었다니 그 환락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유리거울로 천정이 장식된 궁전 안에는 이란의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와 풍속화들이 걸려 있어 외교사절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환대를 받았는지 묘사하고 있었다.

동성애와 성교 장면을 보여주는 19금 벽화는 아프간 군대가 이곳을 침공했을 때 뜯어갔다고 한다. 마치 폼페이 유적의 수많은 프레스코 벽화들을 독일이 약탈해 간 것을 방불케 했다.

 

체헬 소툰 궁의 별화는 이곳이 외국의 외교사절이 머물렀던 곳 답게 전성시대 이란 왕조에 주변국 사절단이 조공을 바치고 외교사절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장면, 코끼리 군단을 물리치는 전투장면 등이 아주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랜드 홀 한쪽 면 복판에 코란 경전이 펼쳐져 있기도 했지만 빙 둘러 그려진 풍속화에는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사냥을 하거나 시녀들의 동성애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전 10세기에 쓰인 코란이 안쪽 벽면 가운데 놓여 있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여행을 할 때 쿠란의 밑을 지나가면 행운이 온다는 풍습이 있는데 여행을 자주하는 외교사절을 위한 서비스 차원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곳 체헬 소툰의 그랜드 홀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12세기의 천문학자ㆍ수학자ㆍ시인 오마르 하이암(Omar Khayyam, 1048–1131)의 사행시와 잘 어울려 보였다. 19세기 영국 시인 피츠제럴드가 번역한 그의 시집 Rubaiyat(4행시)에 실린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나무 그늘 아래 시집 한 권,
빵 한 덩이, 포도주 한 병을 벗삼아 
그대 또한 내 곁에서 노래를 하니
오, 황야도 천국이나 다름없구나!

A Book of Verses underneath the Bough,
A Jug of Wine, a Loaf of Bread—and Thou,
Beside me singing in the Wilderness,
And oh, Wilderness is Paradise now.

 

저기서 뜨는 달, 우리를 다시 찾네
찼다가 기울었다 억만 번 거듭하며
똑같은 정원에서 아무리 저 달이 찾는다 해도
이 한 사람 모습만은 영영 보지 못하리

Yon rising Moon that looks for us again —
How oft hereafter will she wax and wane;
How oft hereafter rising look for us
Through this same Garden — and for one in vain!

 

반짝했다 사라질 존재인데 벗이여, 
삶의 비결 찾느라 ― 그것도 재빨리 보내는 거요! 
허위와 진실은 머리카락 한 올 차이인데
말해 보오, 무엇에 의지하여 일생을 살 건가요?

Would you that spangle of Existence spend
About the Secret ― Quick about it, Friend!
A Hair perhaps divides the False and True ―
And upon what, prithee, may life depend?

 

이건 알지요 한 가닥 진실의 빛에 
사랑이 불붙거나 분노로 내 몸을 태우거나 
술집에서 섬광처럼 보았던 그것이
사원에서 잃어버린 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And this I know: whether the one True Light
Kindle to Love, or Wrath-consume me quite,
One Flash of It within the Tavern caught
Better than in the Temple lost outright.

 

궁 밖으로 나오니 이미 한낮이었다. 한창 더울 때에는 처마 아래로 커튼을 쳐서 햇볕을 피했다고 한다.

풀장의 물이 깨끗하기만 했어도 풍덩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란과 세계 각처에서 관광객들 사이에서 40개 기둥 아니면 키 높은 정원수, 페르시아 용맹의 상징인 사자 석상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바빴다.

그리고 궁전 밖으로 나와 공원 담장을 끼고 한참을 걸어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궁전 바깥 공원의 담에는 코란의 명구가 걸려 있었다.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인과응보'라는 부처님 말씀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는 점심 때가 되자 당연하다는 듯이 홀이 아주 넓은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거리의 이란어로 된 간판 글씨의 조형미가 아주 뛰어나 보였다.

 

여러 시간을 달려 도착한 쉬라즈에서는 라이브 공연을 하는 이란의 전통 음식점에 갔다. 내부 장식이나 조명이 매우 특이했다.

우리 일행은 현지인들이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하는 것처럼 8명씩 빙 둘러 앉아 식사를 하였다.

끝나갈 무렵 현지 음악에 도취한 일행 중의 한사람이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추어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