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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박찬수 친구의 영전에

Onepark 2014. 11. 24. 12:17

친구여,

 

이 무슨 말인가, 11월 14일 요양원에서 밤늦게 음식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1] 세상을 떴다는 게?

그대는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 해서 유능한 의사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지 않았던가!

지방의 명문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에 다니고 있었으니 장래는 보장된 셈이었지. 그런데 1972년 봄이 다 지날 무렵 우울증이 심해져 휴학을 하고 말았지. 그런데 여러 요인이 겹치는 바람에 학업도 마치지 못하고 결국은 집에서도 나와 요양원에서 생을 마치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네.

운명의 조화

무엇이 그대의 앞날을 가로막았단 말인가? 나와 같이 있을 때 눈이 곧잘 충혈된다고 한 것 말고는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었지.

무엇이 그대를 우울증에 빠트렸나?

지금은 프로작 같이 좋은 약[2]도 있고, 정신과 치료법도 많이 개발되어 있는데 왜 그때는 그렇게 무지했었지?
그대 아버지는 이학박사 대학교수님이 아니었던가? 약국집 아들이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폐인이 되다시피 했으니 무슨 운명의 조화란 말인가?

아버지가 아무리 완고하시다 해도 "저는 이렇게 살렵니다"하고 차선책을 택하여 독립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중에는 내가 그대 집에 하숙하고 있던 기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묘 자리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 지관(地官)을 불러 길지(吉地)로 이장을 하기도 했었지.[3]

우리가 모두 가정을 이루기 시작할 때 그대도 교제 중인 여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땅한 생업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친구들끼리 QS 사진인화점을 차려주자는 말을 나눈 적도 있었어.

부러울 게 없었던 환경

우리가 중2이던 1966년 말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같은 방에서 동고동락했던 초등학교 동창으로 우리는 서로 비밀도 없었지. 예쁘고 똑똑한 여동생들이 셋이나 되어 한때는 내 마음이 설레기도 했지만 '같은 朴 씨'라서 마음을 접었지.

우리집이 서울로 이사한 뒤로 초등학교 동창 집에서 하숙 아닌 하숙을 했던 1년 여의 기간은 나로서는 부잣집 도련님처럼 대접 받은 호시절이었어. 우리집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계란찜을 거의 매일 아침 먹을 수 있었고 늘 하얀 쌀밥에 김도 식탁에서 끊이질 않았지. 언젠가 어머니가 손수 추어탕을 만들어 주셔서 내가 여러 그릇을 먹었던 기억도 나네.

그리고 집안에 목욕탕이 있어서 우리는 항상 아버지가 하신 다음에 다른 식구들보다 먼저 욕조 입수의 특권을 누렸지. 어머니가 나를 친아들과 똑같이 대해 주셔서 생전 처음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사춘기 시절이었지만 난 조금도 힘들지 않았지.

그대 아버지는 고지식하지만 올곧은 분이셨어. 지금은 한옥 마을로 개발이 되었지만 당시 교동 한복판에 자리잡은 그대의 집 기둥이 뒤틀려 있다고 대목수를 불러 집구조물의 여기저기에 쇠줄을 매고 새로 기둥을 고쳐 세우고 집을 똑바로 세우셨어. 나는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어.

엄친아의 비극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밤 늦은 시간에 어쩌다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저쪽 안방에서 그대 아버지가 약국을 하시는 어머니에게 구시렁구시렁 잔소리를 늘어놓으시고 어머니가 볼멘소리로 대답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어.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시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분이셨기에 다른 식구들이 따라가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지. 그런데 예쁘고 똑똑한 막내동생마저 아버지한테 “너 예쁘다.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니 놀라웠어.

그대는 1남 3녀의 장남이니 아버지가 자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많겠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우리집 막내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중압감이 얼마나 심했겠나?

우리 아버지는 항상 나를 보고 “네가 공부를 잘하니 부모의 자랑거리란다. 너에게는 문학적 소질도 있다”는 등 칭찬을 많이 들었던 나로서는 친구의 처지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거야.

결국 휴학을 하고 고향에 내려간 그대를 보고 아버지는 스파르타식 치료법을 택하셨지.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쉬운 학과로 전과(轉科)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때 나는 고시공부를 하고 있어서 직접 나서지 못하고 서울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삼성병원 이시형 박사)를 소개하는 데 그쳤지. 서울 동숭동에서 같이 하숙을 하던 친구가 같이 내려가 부모님을 설득하려 했지만 꾸지람만 듣고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어.[4]

복학을 한 다음에는 정신과 전문의를 지도교수로 택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때 자주 만나 위로를 하는 등 내 몫을 다하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 서울에서 같이 하숙했던 친구도 얼마 후 군에 입대하는 등 대부분 곁을 떠나는 바람에 말벗도 없고 더욱 외로왔을거야.[5]

미안해, 용서해 줘

용서해 주게. 형제나 다름없이 의존할 수 있는 상대였음에도 고시공부다, 해외파견이나 내 앞가림만 하느라 제대로 친구 구실을 못했어.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곤 그대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보지도 않고 매달 동창들하고 십시일반으로 입원비를 대준 것밖에는 없구먼. 정말 미안하이.[6]

2009년 6월 그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전주에 내려갔음에도 상주(喪主)로 나설 수 없는 그대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면회도 가지 않고 그대로 상경하고 말았어. 마음속으로는 그대가 친구들도 몰라볼 정도로 변했으니 그대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었지.[7]

정말로 우리 동창들 중에서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 했던 그대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잘 살피고 헤아리는게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

이제는 홀로 되신 어머니께 종종 안부 여쭙는 것도 잊지 않을게.

친구여, 저 세상에서는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이루고 싶었던 꿈을 성취하길 바래.[8]

 

2014년 11월 24일

 

친구에게 바치는 곡:  Jane Trojan, "Prayer for a Friend"

 

* 위 사진을 보니 1968년 1월 중학교 졸업식 날 전주에서 약국을 운영하면서 그대를 물심양면으로 돌봐준 김영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네그려. 왼편의 나는 무슨 메달을 목에 걸고 있군. 아무렴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이 어찌 이 추억의 사진 한 장뿐이겠는가?

주 석

1] 당시 어머니가 허리 치료를 받으시느라 연속 4주간 요양원에 면회를 가지 못해 친구가 몹시 불안한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2] 다국적 제약회사 일라이 릴리가 세로토닌의 농도를 높여주는 플루옥세틴 원료를 이용해 기적의 우울증 치료제 Prozac을 개발했다. 1987년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은 프로작은 우울증에 대한 종래의 관념을 바꾸어 놓았다. 우울증은 단순히 신경전달물질의 이상으로 생긴 ‘질환’일 뿐이라는 것. 신경전달물질을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우리는 감정을 지배·통제할 수 있는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3] 선영에 할아버지 묘 자리를 잡을 때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와 나란히 터를 잡지 않고 몇 미터 상거한 곳에 모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내가 부모님께 적극 제안을 하였다. 그 결과 할아버지 유체를 감싸고 있던 나무뿌리를 모두 제거하고 좋은 자리에 편하게 모셨다고 들었다. 그대 부친이 학장이 되시는 등 집안의 경사가 따랐지만 친구의 병세는 별 차도가 없었다.

4] 지금은 유명 정치인이 된 그 친구의 말은 이렇다. “그 때 친구의 우울증은 심각했어. 어버지만 몰랐고 폭력적으로 문제에 접근했지. 다른 가족은 심각성을 알았지만 우울증을 지금만큼 이해하지 못한 데다 그게 이처럼 장기적이고 심각한 불행으로 이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나도 역시 짐작할 수 없었고 군대 가느라고 챙기질 못했어. 당시 1∼2년이 정말 중요했는데. 좋은 친구와 인재를 잃었어.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아이들에게 진로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 같아.”

5] 전주에서 약국을 하던 김영택 친구는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면 그대가 대들지도 못하고 약국으로 찾아와 위로를 구하곤 했다고 말했다. 영택이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기에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때로는 드라이브도 같이 하면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6] 전주에 사는 김영택 친구가 동창들로부터 돈을 모아 어머니께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결산해 보니 2005년 9월부터 108차에 걸쳐 도합 4,865만원을 전해 드렸다고 한다.

7] 중3 때 공부하다가 지치면 우리는 가창교본을 펴들고 같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박영효와 같은 반남 박씨(潘南 朴氏)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친구를 만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같은 영화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잘 있었어?"하고 물어보는 것 외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8] 친구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직계 가족만 모여 화장을 한 후 친구가 늘 산책을 다니던 전주 남고산 산길에 뿌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