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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백야기행] 차르의 화려한 자취: 상트페테르부르크 (1)

Onepark 2013. 7. 14. 15:28

공항에서 짐을 찾아 자정이 다 되어 투숙한 소코스(Sokos: '협동조합'이라는 뜻) 호텔은 위치나 시설, 식사 면에서 모두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이 호텔에서 2박할 예정이었으므로 아침에 짐을 새로 꾸릴 필요가 없었다.

6월 25일(화) 아침 호텔 내 큰 행사가 예정되어 있어 안팎으로 부산해 보이는 가운데 아침식사를 마치고 잠시 바깥 구경에 나섰다. 호텔 주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바실리브스키 섬에 자리잡고 있어 그런지 Free WiFi Zone 이었다. 한 블럭만 걸어가도 네바 강과 옛날 표트르 대제가 맨처음 건설했다는 요새가 보였다.

 

3천루블(10만원)을 내면 15분 동안 헬리콥터를 타고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를 어떻게 건설하고 운하를 조성했는지 상공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키가 2m 장신이었던 그는 재위에 있던 1697년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 각국을 돌아보던 중 홀란드에 가서는 직접 인부들 사이에서 선진 조선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귀국한 다음에는 유럽식 도시, 즉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의 건설을 현장에 가서 진두지휘했다.

표트르 차르가 네바 강 하류의 늪지에 도시를 건설한다고 발표하자 왕족은 물론 관리들도 거세게 반대를 하였다. 늪지에 석축을 쌓고 유럽식 건물을 세우고자 했던 표트르는 전국의 공사를 중지시키고 모든 돌을 네바 강 하류로 실어나르게 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곳을 찾는 사람은 자기 머리통보다 큰 돌을 2개 이상 바쳐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성스러운(Saint) 돌(Peter)의 도시(Burg)는 불과 10년 만에 3만 5천 채의 건물이 들어선 도시로 변모했고 171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수도를 옮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표트르 대제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천도는 러시아가 유럽의 변방에서 일약 주류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위 사진은 전에 증권거래소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해군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역사적 건물의 표석이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 토끼섬에 있는 피터 폴(페트로 파블로프스키) 요새를 보러 갔다. 표트르 대제가 도시를 건설할 때 러시아의 숙적 스웨덴의 침공을 막기 위해 네바 강 어구에 포대부터 설치했다. 그리고 신의 가호를 빌기 위해 첨탑이 높은  베드로와 바울 성당을 세웠다. 그 당시 이 일대는 늪지대여서 무엇보다도 기반을 다지는 일이 중요했고 해빙기 네바 강의 범람을 막아내야 했다.

 

러시아 해군기가 펄럭이고 있는 요새 밖은 물론 네바 강이었는데 해빙기에는 종종 강물이 범람하여 사람 키를 넘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아래 사진의 표지). 차라리 겨울에 얼어붙은 네바강(사진 안의 작은 사진)이 좋았을 것이다.

표트르 대제는 허허벌판의 늪지대에 수만명에 달하는 맨손의 인력을 동원하여 부지를 조성하고 운하를 만들었다. 매우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였지만 수많은 노동력의 피와 땀, 희생 위에 이루어졌기에(그 당시 15만명의 인력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 그들의 원성이 누적되었다가 바로 이곳에서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으로 분출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몽골계 타타르 족의 지배 하에 있던 러시아 공국은 17세기 이반대제와 이반뇌제 치하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표트르가 공동 차르에 임명될 즈음에는 근대화 작업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년 반에 걸친 외유를 통해 서구문명의 발전상을 직접 목도한 표트르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하여 보다 과감하게 서구 문물을 수입할 작정으로 발트해에 면한 네바 강 하구에 도시를 건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북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희생 위에 유럽풍의 운하도시를 건설하고 마침내 1712년 천도를 단행하였다. 보수적인 귀족계층은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기 위해 표트르 차르의 아들 알렉세이를 앞세워 정변을 일으켰으나 이내 평정되고 황태자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300여년 전 이곳에서 불철주야 수도건설에 힘썼던 표트르 대제의 좌상 앞에서 중국의 관광객들이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고 또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생전에 표트르는 몽고 스타일을 혐오하고 길게 수염을 기른 사람들은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는데 지금 중국사람들에게 에워싸인 모습을 보니 참 아이러니칼하게 느껴졌다.

그 다음 관광을 한 곳은 노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일본함대에 괴멸 당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군함 한 척, 나중에 겨울궁전을 향해 포를 쏘아 볼셰비키 혁명의 신호탄을 올린 오로라 순양함이 네바강변에 기념물로 정박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퇴역한 러시아 전함보다도 한 건물 옥상의 삼성 사인보드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200년간 러시아 정치와 경제, 문화의 수도였던 이곳은 데카브리스트 난, 볼셰비키 혁명 같은 정변도 일어났지만 프쉬킨,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같은 예술인의 자취가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대의 걸작은 러시아의 성인 이삭을 기념하여 건립된 이삭성당이었다.

시내 어디서나 눈에 번쩍 뜨이는 금빛 돔을 한 웅장한 건물은 이것을 보러 온 수많은 관광객들의 차량들로 주차하는 것부터가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긴 줄을 서서 들어간 성당 내부는 눈길을 주는 곳마다 명화와 아름다운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결코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사원 못지 않았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대가 이 도시를 900일 포위한 동안 수많은 아사자가 속출하였음에도 러시아 인들은 독일군의 공습과 포격으로부터 이 성당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소리 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무명의 예술인들이 자기 조각에 색칠을 하여 모자이크처럼 붙여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과 부활승천하는 장면, 선교를 위해 애쓰는 사도 바울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이삭성당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우리 일행은 러시아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이자 러시아군 사령관을 역임한 니콜라이 3세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곳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 노동조합의 본부로 쓰이다가 지금은 정부요인이나 관광객들의 예약을 받아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궁중 시종 시녀의 복장을 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의 서빙을 받으며 맛은 별로였지만 아주 우아하게 러시아식 식사를 하였다. 성악을 하는 우리의 가이드가 러시아의 민요 "백학"(드라마 모래시계 삽입곡)과 이태리 민요 "오쏠레미오"를 불러 분위기를 한층 돋구어주었다. 

 

차르 왕실의 화려했던 라이프스타일이 극동에서 온 관광객들에게도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앞을 지나 이번 러시아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에르미타쥐 미술관(The Hermitage Museum)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