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로서 전공지식을 살려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의제인 국제협약 안(案)이나 액션 플랜에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은 크나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나는 2002년 2월 법무부 국제거래법 연구단의 위원으로 위촉되어 유엔 국제거래법위원회(UNCITRAL)와 세계사법통일회의(Unidroit)에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국제회의가 열리는 현지 공관의 외교관이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본부의 훈령에 따라 회의자료를 챙겨서 보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법무부에서 국제적 논의사항에 국가이익을 적극 반영하고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교수, 변호사 등 전문가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보고 국제거래법 연구단을 설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나도 2002년 12월 중순 비엔나에서 열리는 UNCITRAL 워킹그룹 회의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평소 담보법(secured transactions law)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 논문도 여러 편 발표했던 터라 학교 기말시험도 끝났기에 상당한 기대를 품고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비엔나로 갔다.
회의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심에서 다뉴브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비엔나 국제센터(Vienna International Centre) 컨퍼런스 홀이었는데, 숙소인 카프리 호텔이 회의장에서 지하철(U1)로 네 정거장밖에 되지 않아 매우 편리하였다.
회의 주제
현재 UNCITRAL은 私法의 국제적인 조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1999년에 제정한 전자거래기본법도 UNCITRAL의 모델법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기업들이 양질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담보권(security interest)이었다.
UNCITRAL의 실무작업반(Working Group) 6개중에서 도산법제를 검토하는 제5 작업반과 담보권을 검토하는 제6 작업반이 12월 16-17일 이틀 동안 도산절차에 있어서의 담보권의 취급에 관하여 공동회의를 갖고 17일부터 3-4일은 제6 작업반 단독으로 각국이 담보법제를 개선 또는 현대화함에 있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담보거래법의 입법지침(legislative guide)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하여는 담보법제부터 정비하여야 한다고 보고 우선 우리나라(南韓)에서 실시할 수 있는 담보제도를 모색하는 데 연구를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는 동산, 기업 재고자산, 매출채권 등을 담보화할 수 있는 방안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학회발표, 논문기고 등을 통해 일관된 주장을 펴 왔다. 법인등기부의 전산화, 기업자산양도의 전자공시 등 제도적 인프라는 진즉 갖추어져 있으므로 일부 법률을 손질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회의 진행
UNCITRAL 실무작업반 회의는 각 회원국 및 옵서버국의 대표와 회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국제기구·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사무국(Secretariat)에서 미리 작성한 심의자료를 놓고 열띤 토의를 벌이게 된다. 회의 첫날에는 사무국장의 주재로 의장(Chairman)과 보고자(Rapporteur)를 선출하고, 의장의 사회에 따라 발언권(floor)을 얻어 심의자료의 항목별로 의견(comment, remark)을 말하거나 찬성·반대의견(observation, intervention)을 발표하는 것이다.
UNCITRAL의 모든 회의는 유엔에서의 회의가 그러하듯이 영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동시 통역이 되고 있다. 독일어와 일본어는 2차 대전의 침략국이므로 회의 공용어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번 회의에서도 중국 대표는 기탄없이 자기 나라 말로 발표를 하는 반면 일본 대표는 할 말이 많음에도 답답해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심의자료는 사무국에서 회의를 개최하기 10주전에 참가국들에 배포되며 인터넷 상에도 게시되어 있다.
See http://www.uncitral.org/en-index.htm → Working Groups
그러므로 회의참가자들은 심의할 내용을 자체적으로 검토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회의자료는 사무국에서 주제와 관련이 있는 각계의 전문가에게 위촉하여 초안을 작성하고 이를 취합·정리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러한 작업에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미국과 주요 국제기구·단체가 초안작성(drafting)을 통하여 회의의 내용과 방향을 좌우하는 셈이었다. 이번 담보권 회의에서도 필자가 아는 미국 SMU 로스쿨의 피터 윈십 교수를 비롯한 미국과 캐나다의 전문 교수들이 몇 章씩 초안을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 2002년 12월 비엔나에서 열린 UNCITRAL "담보권" 실무작업반 제3차 회의의 심의자료 원문은 위의 UNCITRAL Working Group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필자가 정리한 토의 내용은 별도로 소개하였다.
회의 대책
따라서 우리나라가 실무작업반 회의에서부터 우리의 사정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주제별로 책임자가 회의자료를 면밀하게 검토·분석하고 관계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만반의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 실제로 회의에 참석해 보니 36개 회원국들을 지리적으로 안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크게 영미법계(common law)에 속하는 나라의 법률가들과 대륙법계(civil law)에 속하는 나라의 법률가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는 세계 굴지의 대국에 속함에도 아직 옵서버로 참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대표들은 언어상의 문제로 인하여 약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 한국 대표(윤성근 부천지원 부장판사, 한찬식 법무부 국제법무과 검사)의 활약이 돋보였다. 전직 국제거래 전문변호사로서, 현직 판사로서 윤 부장판사는 우리나라 가등기담보법 및 양도담보제도의 운용에 관하여 유창한 영어로 설명하여 각국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필자도 외국의 법제를 국내 소개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의 법제를 외국에 소개할 게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번 담보권 회에서 토론이 전개되는 모습을 보아도 사무국의 제안 설명에 이어 독일, 프랑스 등의 대표가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나라들이 이에 찬반 의견을 제시하면 미국 대표 및 이들과 뜻을 같이 하는 국제기구 대표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결론을 주도하는 양상을 띠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자국의 사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반면 맨 뒷줄의 국제기구·단체에서는 실무(practical effects) 차원에서 타협·조정안을 내놓는 게 보통이었다.
결국 회의 참석자의 수로 보나 토의에 참가하는 면면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의 영향력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중국세가 약진을 보이는 가운데 일본의 비중은 경제력에 비해 미미한 편이었으며, 그밖에 동구권과 중남미 대표들이 일부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이러한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대표단을 파견하고 있는 등 한국 법제의 현황을 대외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국제회의의 궁극적인 목표인 새로운 법제를 국내에 도입할 것인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된다. UNCITRAL에서 1980년에 제정한 [국제물품매매 협약](일명 유엔 매매협약)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거니와 민·상법 등 국내법과 저촉이 되지는 않는지, 거래계의 실무에 비추어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학계와 정부, 국회 등의 다각적이고도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국제적으로 새로운 법률제도에 관한 논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무역대국인 데다 외국인들이 기업하기에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PR하고 있는 만큼 우리의 거래상대방들이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법제를 갖추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나라의 회의참석자들은 성실하게 심의자료를 분석·검토함으로써 국내의 법제운용 경험을 외국에 소개하는 한편 생산적인 회의진행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선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외국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고 국제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가이익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 For more information on the international business law, refer to http://onepark.khu.ac.kr.
그 당시 나로서는 비엔나 여행도 처음이었지만 소련 붕괴 후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웃나라 헝가리에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주제를 놓고 수년간 진행되는 비엔나 UNCITRAL 회의에 이력이 붙을 즈음 주말을 이용하여 부다페스트를 방문하기로 했다. 비엔나에서는 열차 편을 이용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꼭 찾아가 보아야 할 것, 구경하거나 먹어볼 것 등 사전조사를 대강 마쳤다.
그리하여 2003년 7월 비엔나 국제회의 참석한 기회에 주말을 이용하여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찾아갔다.
부다페스트는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쌍둥이 수도로서 관광명소가 많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된 지 10년이 넘어 주민들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무척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의 노천 온천도 소문대로인지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날씨는 계속 쾌청한 편이었다. 유럽 일대를 엄습한 6월의 폭염에 이어 7월의 날씨는 간혹 흐리기도 하였으나 여행기간 중의 기온은 25℃를 넘지 않았다.
비엔나에는 유럽 각 방면의 행선지 별로 기차역이 있기 때문에 부다페스트 행 열차가 출발하는 서부역에 가서 미리 좌석을 예약했다. 열차는 컴파트먼트식으로 어느 국제열차나 다름이 없었는데 유럽 배낭여행을 하는 중국계 미국 대학생 지미와 대만에서 독일어 강사를 한다는 독일 노신사, 그리고 헝거리에서 승차한 헝가리 여대생 이렇게 일행이 되어 지루하지 않게 약 3시간의 기차여행을 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行 준비물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체크의 프라하와 함께 동구의 유명한 관광지이다. 역사가 깊어 볼 것이 많고 체제전환국으로서 일반 물가도 싼 편이니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열차가 동부역(Keleti Pu.)에 도착할 때쯤이면 정거장 플랫홈은 설렘을 안고 막 도착한 승객과 손님을 잡으려는 택시기사, 숙박업소 주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행 안내서를 읽어보면 지붕에 택시 표지를 달고 회사마크와 전화번호가 붙어 있는 회사택시를 잡아타야지 손을 잡아끄는 대로 자가용 택시(unmarked taxi)를 탔다가는 바가지를 쓴다고 주의를 주었다.
헝가리 포린트(Forint)화는 가두의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보다 크레딧 카드로 필요한 금액만큼 현금 서비스를 받는 것이 제일 유리하다. 1유로≒260포린트, 1포린트≒5원으로 계산하면 대강의 예산을 세울 수 있다. 그 다음은 역 구내(9번 플랫홈 옆) 여행안내소에서 부다페스트 카드를 사는 일이다. 이틀, 사흘 체류일정에 따라 3,950 또는 4,950포린트짜리 카드를 사면 시내교통 및 박물관 이용은 모두 공짜이다. 전차 1회 탑승권이 120포린트, 박물관 입장료가 통상 7백포린트하니까 계산이 될 것이다. 부다페스트에서는 표 없이도 자유롭게 전철, 전차, 버스를 탈 수 있지만 불시에 완장을 두른 검표원이 나타나 표를 검사하므로 반드시 티켓을 구입해야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다.
일반적인 관광 코스
부다페스트를 방문하기 전에는 이 도시가 부다와 페스트로 나뉘어 있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다뉴브 강으로 나뉘어 있던 이 두 도시를 연결한 것이 1849년에 영국인 토목기술자(클라크 애덤)에 의해 건설된 세체니(체인) 브리지인 것도 처음 알았다. 이 다리는 주말에는 교통이 통제되어 행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다.
영국 템즈강의 런던 브리지, 빠리 세느강변의 에펠 타워, 프라하 블타바(몰다우)강의 칼 브리지처럼 세체니교는 브다페스트 관광의 시발점이다. 이어 케이블카(funicular: 부다페스트 카드가 통용되지 않으므로 별도 요금을 지불해야 함)를 타고 부다 성(Buda Castle)으로 올라간다. 페스트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城 지구(Castle District)에서는 시간이 허용하는 대로 국립미술관으로 쓰이는 왕궁을 비롯하여 현대사 박물관, 역사 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과 15세기 후반의 위대한 마차시(Matthias)왕을 기념하는 마차시 교회, 삼위일체(Trinity) 탑, 우리나라의 행주산성 같은 어부의 요새를 차례로 둘러보면 된다.
국립미술관에는 15∼17세기 투르크 정복 전후의 역사적 사실화와 성화·성물, 인상파 영향을 받은 19세기 회화, 현대화와 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다만, 많은 작품이 우수해 보임에도 세계 미술계에 소개되지 못한 것은 작가가 국내에서만 활동하였거나, 폐쇄적이고 이념 중심인 공산체제 탓에 서방에 알려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 지구에서 순환버스를 타고 모스크바 광장으로 내려오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시내로 진입할 수 있다. 부다페스트 시내의 지하철(Metro)은 런던 다음으로 일찍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1호선은 지표 가까이 있지만, 다뉴브 강 밑을 통과하는 2호선은 땅 속 깊이 건설되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60∼70m를 내려가야 한다. 부다페스트 지하철은 목적지를 놓칠 염려가 없다. 물론 차장의 헝가리 말 안내방송은 알아듣기 힘들지만 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전력공급이 잠시 중단되기 때문인지 실내등이 깜박 하고 꺼지기 때문이다.
다뉴브 강을 건너면 헝가리의 '벨벳 혁명'을 이끈 국회의사당이 나오고 성 이쉬트반(스테반) 성당, 주변 건물을 구경하며 보행하기에 좋은 안드라쉬 거리, 오페라 하우스, 영웅광장(발음이 '회색'테르로 들림)을 차례로 둘러본다. 영웅들이 이끌어온 헝가리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건국천년 기념비 뒤편은 보트를 탈 수 있는 호수와 분수, 세체니 온천이 있는 시민공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어린이 대공원과 여의도 공원을 합쳐놓은 듯한 서민들이 휴일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안 하면 후회할 일
뭐니뭐니 해도 온천욕과 헝가리 전통음식을 맛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시대 때부터 시작된 온천욕은 관광객 상대의 호텔 부설 겔레르트 온천(온천탕과 천장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실내풀장, 그리고 인공파도가 이는 야외 풀장이 있음)과 서민 상대의 세체니 온천이 있다. 전자는 1인당 2,900포린트(락커룸 사용료 500포린트는 별도)로 비싼 만큼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 온천욕을 할 수 있으나, 후자는 한 여름철 풀장처럼 부산한 가운데 서민적으로 즐길 수 있다. 어느 경우나 우리나라의 사우나탕을 연상하면 오산이며 수영복은 빌려서라도 입어야 입장할 수 있다. 겔레르트 온천의 경우 수영모자는 샤워캡을 무료 제공한다.
필자는 아침 6시에 개장하여 6시에 문을 닫는 겔레르트 온천에 갔는데 미지근한 물이 영 '아니올시다'(no good)였다. 다른 관광객들이 물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입장할 때 나눠준 샴푸로 샤워하는 것으로 끝내야 했다. 2시간 이내에 나오면 상당한 환급을 해주므로 영수증을 끝까지 챙겨야 한다. 4시간이 넘으면 환급은 없다.
그러나 헝가리 레스토랑의 메뉴는 우리 입맛에도 맞고 값도 저렴한 편이다. 헝가리산 드레허 맥주를 곁들여 굴라쉬(우리나라 육개장 같은 얼큰한 고기국물) 스프, 거위간 요리를 가미한 스테이크 또는 필레미뇽이 5∼6천포린트(팁 포함)이면 해결되었다. 필자는 한 번은 겔레르트 호텔에서, 또 한 번은 서울의 명동과 같은 바치 거리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 정도의 분위기와 미식을 풀코스로 즐기려면 서울에서는 1인당 10만원 가까이 들었을 것이다.
여행안내서에 없는 명소
페스트 도심의 교통요지인 아스토리아 광장 부근의 시나고그는 유럽 최대의 유대교 회당이라는 점에서 필수의 관광명소임에 틀림없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전면만 보고 사진을 찍고 돌아간다.
그러나 옆으로 돌아가면 회랑이 있는 중정이 나오는데 이곳은 유럽의 큰 건물 중앙에 자리잡은 여느 정원과는 다르다. 크고 작은 나무가 서 있는 정원은 온통 1945년 홀로코스트 때 죽은 유대인들의 묘비명으로 즐비하다. 로마의 기독교도 지하묘지(catacomb)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조금 더 가면 시나고그 후문이 나오는데 그 후정의 풍경은 자못 충격적이다. 그 한복판에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비가 서 있는데 이것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버드나무 모양의 기념수인데 버들가지가 온통 스텐레스로 되어 있는 조각물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유대인들의 소망과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일까?
後 記
시나고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동부역을 출발하는 비엔나행 열차에 올랐다. 비엔나 숙소에 도착하여 TV를 켰을 때 마침 스페인 방송에서는 축구경기처럼 투우 장면을 중계하고 있었다.
관중이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환성을 지르는 가운데 검은 황소가 우리가 열리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뛰쳐나왔다. 사납게 보이는 검은 황소는 4∼5명의 조연 투우사가 분홍색 천을 휘두를 때마다 이리저리 달려나가 뿔을 휘두르며 (그만큼 헛힘을 쓰는) 공격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주연 투우사가 등장하여 한 번에 2개씩 작살을 세 차례 등판에 꽂고 나면 투우사가 접근하여 진짜 붉은 천을 흔들더라도 황소는 몇 걸음 움직여 머리의 뿔만 내지를 뿐 종전과 같은 맹렬한 기세는 없었다.
투우사가 붉은 천을 휘두르는 멋진 동작을 몇 차례 선보이고 나면 황소는 그때그때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그만 혀를 빼물고 헐떡이면서 맥없이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리고 투우사로부터 목의 급소에 칼을 받은 다음 말에 끌려 투우장에서 치워졌다. 그 시간은 20분을 넘지 않았다.
불과 60년 전에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에서, 네덜란드에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투우장의 황소와 오버랩되었다. 영화 "글루미 썬데이"에서 유대인 주인공 라즐로 자보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아름다운 우정과 최상의 서비스를 베풀었지만 독일군 SS장교의 편견과 욕심 앞에서 촛불처럼 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만일 그가 실재 인물이었다면 부다페스트 시나고그의 중정에 그의 묘비명을 남겼을까?
부다페스트는 마차시 같은 위대한 왕의 등장을 보기도 했고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지만 2백년 이상 투르크 족의 지배를 당했고 20세기에는 연거푸 나치의 박해와 스탈린의 압제를 받았던 어두운 과거를 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이 비엔나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강제수용소에서 의미요법(Logotherapy)을 발견한 정신과의사 빅터 프랭클이 살았던 곳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보고 온 스텐레스 기념수의 의미(meaning)가 절로 깨달아졌다. 이들은 지적 능력이나 문화적 소양이 모자라서 희생된 것은 아니었다. 황소 이상의 파워를 갖고 있음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계시(revelation)을 전하기 위해서 제물이 된 것이 아닐까?
TV에서 본 투우장의 황소는 군중들의 찰나적인 오락과 흥분을 위해 동원되었을 뿐이지만 어딘가 하나님의 어린 양과 닮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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