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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건국 800주년 맞은 몽골의 대평원

Onepark 2007. 6. 1. 14:01

2006년 7월 북한법연구회의 한·몽 국제학술회의 참석 차 몽골을 방문하였다.
울란바토르로 떠나기도 전에 깜짝 놀란 것은 심야에 도착하는 대한항공의 에어버스가 280석 모두 만석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일행 29명(단장 북한법연구회장 국민대 장명봉 교수)은 꽁무니 자리를 겨우 차지할 수 있었다. 승객은 일부 몽고 시민과 일본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다. 비록 여름 한 철뿐이라고는 해도 그만큼 몽골은 우리와 가까운 나라였다.

 

* 몽공의 수도 울란바토르 전경
* 건국 800주년을 기념하여 산위에 새겨진 칭기스칸의 초상

울란바토르(Ulaanbaatar "붉은 영웅"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을 때 더욱 놀라운 것은 이곳 사람들이 외모만으로는 한국 사람과 거의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청소년들이 잘 먹고 잘 자라 체형이 서구화(西歐化)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근본은 영락없는 몽골인종(Mongolian)이었던 것이다.
길거리에는 현대 액센트를 비롯한 한국 중고차들, 심지어는 페인트칠도 바꾸지 않은 서울의 버스가 그대로 달리고 있어 서울의 변두리 동네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 몽골의 초원 위에 이동식 주택인 게르가 점점이 서 있다.
* 몽근모르트 캠프장의 직원들이 영락없이 한국인과 닮아 보인다.

떠나기 전에 들은 말이지만 몽골 사람들이 한국을 선망하는 것도 놀라웠다. 몽골 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구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고 했다.
실제로 몽골 인구의 1%에 해당하는 2만 5천여명이 한국에 나가 외화를 벌고 있는데 그들이 대부분 몽골의 지식층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의 보조 가이드도 서울 장안평에서 2년간 일한 적이 있으며 본래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라고 했다.
학술회의를 위해 수고해 준 통역들은 서울대 또는 서울시립대에서 수학하였고 정확한 표준어 발음을 구사하였는데, 몽골대학의 한국어과 아니면 한국과 관련된 기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 소낙비가 온 뒤 몽골 초원 위에 뜬 무지개
* 한-몽 국제세미나에 모인 청중들

한국과 몽골의 민사법제, 토지법제를 비교하는 7·7 국제학술행사는 개혁·개방을 서두르는 몽골측이나 북한의 체제전환을 모색해야 하는 한국측 참석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번 국제 세미나를 위해 몽골은 물론 내몽고와 러시아 이르쿠츠크 대학의 교수도 와서 주제발표를 하였다.
몽골에서는 민주화 후에 제정된 1992년 헌법에 의하여 목초지와 공공소유, 특수국유지 이외의 토지는 몽골 국민의 사소유를 인정하고 있었다. 외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으며, 사유토지 외의 토지는 모두 국가소유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몽골 국토청에서는 한국법제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GPS기술을 이용하여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작성하고 사유화가 가능한 토지의 형질을 파악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사소유 토지임을 표시하는 울타리가 곳곳에 세워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토지를 담보로 제공하고 은행대출을 받기도 하지만 아직은 토지거래시장이 활발하지 못해 많은 은행들이 모기지 담보대출을 기피하거나 리스크를 고려하여 월 4-8%에 이르는 높은 대출이자를 받는다고 하였다.

 

* 축사를 하는 박진호 몽골 주재 한국대사. 오른편은 장명봉 회장
* 환영사를 하는 몽골 국립법제센터 아마르사나 소장

울란바토르와 같은 도시에서는 게르나 말과 양떼 대신 너른 평수의 아파트와 자동차가 크게 선호되고 있다고 했다. 몽골 국민의 소득수준이 향상될수록 그 경향은 심해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말타기를 할 때 고삐를 잡아주었던 13살 소년도 기어가 달린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를 공동주관한 한국법제연구원의 이준우 박사에 의하면 북한의 토지대장을 만드는 것은 인공위성 기술을 이용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통일시대에 북한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할 것인지, 남측의 원 소유자에 대한 금전보상이나 원상회복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몽골의 목초지와 같이 널리 공유지로 남겨놓을 것인지는 국민적 합의를 거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 몽골에서도 은행건물은 모두 근사하였다.
* 말과 자동차,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몽골 사회

이번 학술행사의 몽골측 파트너는 국립법제센터의 소장이자 몽골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을 겸임하고 있는 아마르사나(Amarsanaa. J) 소장이었다. 그는 민주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법조계의 실력자였다.
그는 나담축제의 전야제가 열리는 7월 10일 월요일에도 여러 공식일정을 미루고 우리 일행을 헌법재판소로 초청하여 헌법재판소장을 면담할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재판관 석에 앉아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일행 중의 연세대 김상용 교수(한국토지법학회 회장)는 앞으로 몽골의 초원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몽골의 전통 초지법(meadow land law)을 연구해보고 싶다고 아마르사나 소장에게 밝혔다. 김 교수는 연구의 성과로서 몽골의 목초지에서 한국 자본으로 소, 양, 염소를 키워 국내 도입하거나 해외에 가공 수출하는 방안을 모색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국내 굴지의 축산대학이 있는 건국대 법대 김영철 학장도 이에 관심을 보여 몽골 국립법제센터와 공동으로 몽골 초지법을 연구하고 이에 관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장기 플랜을 수립하기도 했다.

 

* 장명봉 회장의 몽골 헌법재판소장 면담. 맨 왼편은 최종고 서울대 교수
* 몽골 헌법재판소 법정에서 회원들 단체사진

몽골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초원에서 말을 타보고 밤에 별자리를 찾는 일이다.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건국한 지 800주년이 되는 나담축제 기간과 겹쳐 호텔을 구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이동식 전통가옥(ger)에서 묵는 것도 대초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뜻깊은 행사였다.
우리가 칭기즈칸의 고향에 가까운 몽근모르트(Mongonmorit) 캠프장에서 묵은 게르 숙소는 원형으로 되어 있고 4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중앙에는 장작을 태우는 페치카가 있고 연통을 밖으로 설치한 중앙의 천장은 절반이 뚫려 있어 채광창과 환기창 역할을 했다. 밤에는 별자리를 보고 시각을 짐작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우리가 묵고 있는 기간 중에는 연일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렸다.

 

* 몽골 초원에서 말젖을 짜는 장면
* 영화 칭기스칸을 촬영할 때 사령부가 사용한 바퀴가 달린 이동식 게르

다행히 우리가 묵었던 게르에는 비가 들이치지 않았으나 난로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작을 피울 때는 찜통 속처럼 덥고 불이 꺼지면 한기가 들었으니 말이다.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면 서너 시간에 한 번씩 장작을 보충해주어야 했다. 한 번 불을 지피면 밤새도록 보온이 되는 한국식 온돌이 그리워졌다.
몽골에서는 지난 수백년 동안 게르의 난방효율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주부들의 입김(Woman Power)으로 누구나 전기밥솥과 김치냉장고라는 세계적인 명품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것과 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게르가 유목민들의 이동식 주택이고 1시간 안에 설치하고 철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난방에는 초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나 말똥을 연료로 써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 생각은 자못 사치스럽다고 생각되었다. 며칠 지내보니 게르의 개방형 구조는 현대건축의 디자인에도 채택할 만하다고 여겨졌다.

 

* 현대식 건물에 적용한 개량형 게르
* 추운 날씨에 대비하여 페치카가 중앙에 자리잡은 게르의 내부

울란바토르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펼쳐진 몽골의 대초원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나무도 거의 없이 말과 양떼가 풀을 뜯어먹는 초원 그대로였다. 몽골 유목민들은 겨울철에도 가축을 방목하며 따로 사료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만일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일하러 온다면(아직은 원주민과 탈북자 전도를 목적으로 한 기독교선교사들이 많이 나와 있다) 무엇부터 할까 즉석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마도 (정착 농경민의 후예답게) 농장의 울타리부터 빙 둘러치고 사육하는 가축의 육질(肉質)과 털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목초를 개량하고 곳곳에 지하수를 파거나 지하 광물을 캐내려 할 것이라고 말하며 서로 웃었다.
산에 나무를 심는 것도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착민에게나 통하는 이야기일 터였다. 마침 우리가 묵고 있는 캠프장에도 한국의 적십자 동아리(ICY) 대학생 60여명이 식목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울란바토르에서 가까운 테를지(Terelj)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거북 바위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었는데 이 부근에는 곳곳에 유럽과도 같은 침엽수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 도시 주변에 울타리로 구분해 놓은 사유지
* UNESCO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테를지 국립공원의 거북이 바위

몽골은 국토면적이 우리나라의 7.7배나 되지만 인구는 15분의 1에 불과하여 내수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 한반도 좁은 땅에서 많은 인구가 살아남기 위해 생존경쟁을 벌이며 노력해 온 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인의 장점이고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조급증은 지탄대상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와 정치가 초스피드로 발전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칭기즈칸이 지휘하던 몽골 기마군단의 스피드 전술에 따라 오늘날 한국의 기업인들이 세계를 무대로 경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몽골인들의 말타기 경주와 씨름경기의 순서로 진행된 미니 나담축제를 구경하면서 같은 몽골인종으로서 야릇한 동류의식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씨름은 한국에서와 같은 샅바를 쓰지 않고 허리띠를 두르고 하였는데 진행방식이 얼추 비슷하였다.
우리 일행은 몽골 축제에 구경꾼으로 왔지만, 우리가 바로 경기장에서 뛰어야 하는 플레이어인 점을 깨닫게 되었다. 몽골 기마군단의 전술·전략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던 조선일보의 조갑제 기자에 의하면 몽골 기마군단이 적은 병력으로 유라시아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3S, 즉 기동성(speed)과 간편성(simplicity), 자부심(self-assurance)에 기인하였다고 했다.

 

* 울란바토르 도심의 수흐바토르 광장
* 칭기스칸 건국기념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국립박물관

당시 몽골 군대와 맞서 싸워야 했던 유럽의 기사단은 질풍처럼 이동하는 몽골 기마부대가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무슨 일이고 마다 않는 몽골 기마병에 대하여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은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몽골 군대가 승전한 후의 뒷처리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가혹했다. 오죽하면 250년간 몽골 군대의 지배를 받았던 러시아인들이 공산화된 몽골에서 '칭기스칸'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정복전쟁에 나설 때 몽골군대는 1명의 기마병이 직접 보급품을 실은 4∼5필의 말을 끌고 다녀 따로 보급부대가 필요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조직과 사고방식은 단순 명쾌할 수밖에 없었으며, 몽골 군대는 부족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칭기스칸과 국가를 위해서만 충성하는 정예부대(케식)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원리는 소수의 몽골인 파견관(다루가치)이 감독하는 것만으로 여러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는데, 오늘날 기업의 현지화(localization) 전략과 상통하는 것이다. 당시 몽골인들의 행동원칙은 전투는 무자비하지만 통치는 너그럽게, 작전은 타이밍과 기동성을 최우선시하고 조직관리는 孝와 의리에 바탕을 둔 끈끈한 인간관계를 중시하였다.

 

* 나담축제의 하일라이트인 말달리기 현장
* 한국의 씨름과 흡사한 몽골 씨름 경기

전성기의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행동 및 사고방식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멸하였다. 만일 몽골인들이 중국 사람들의 안락한 삶을 동경하였다면 순식간에 중국에 동화(同化)되고 말았을 것이다. 몽골인들은 유식하고 안락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도, 존경심도 갖지 않았다. 조갑제 기자는 이런 주체성이 몽골 기마군단의 경쟁력과 효율성의 원천이 되어 13-14세기의 유라시아 대륙에 '팍스 몽골리카나'(Pax Mongolica)를 구현할 수 있었다고 분석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길이길이 번성하는 길은 세계화에 너무 휩쓸려서는 아니되고,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의 가치를 중히 여기고 이를 세계에 전파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몽골인종은 매우 유능하고 실용적이었으며 위대하였던 것이다.
이번 몽골 방문을 통해 칭기스칸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법학 분야에 있어서도 영미법과 대륙법, 나아가 사회주의법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제3의 대안(a third solution)을 이끌어내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mission)이라는 자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하여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는 상념이 들었다.

⇒ 참고할 만한 책은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사계절출판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