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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프라하의 연인 '알폰스 무하'?

Onepark 2007. 6. 4. 14:06

* 몰다우 강 건너편의 프라하 성

프라하에 관해서는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첫 장면 무대였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아는 것도 없이 2001년 9월 런던에서 프라하행 브리티시에어(BA)에 몸을 실었다.

마침 체제전환국(transition economies)에 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체제전환국의 사례로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찾아가 볼 작정이었는데 체크의 프라하로 행선지를 바꾸었던 것이다. 출장 중이던 런던에서는 프라하가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이자 음악도시라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프라하에 거의 당도할 때까지도 승무원이 입국신고서(landing card)를 나누어주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옆자리의 영국 사람에게 물어보아도 어깨만 으쓱 할 뿐이었다. 그 이유는 금방 알게 되었다. 입국심사라는 게 여권만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끝났던 것이다(우리나라는 일찍이 체크 공화국과 비자면제 협정 체결).

 

날이 어둑어둑해진 공항 밖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일단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려고 하였으나 안내판도 없고 바로 앞에 공항 택시가 서 있기에 바가지 쓸 각오를 하고 잡아탔다. 택시가 독일제 포크스바겐 중형차라서 요금이 꽤 비싸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미리 예약을 해둔 숙소(Alta Hotel)를 일러주고 어디로 가나 살피고 있는데 영수증을 써준다고 하지 않은가! 영수증을 써줄 정도라면 바가지 염려는 없다고 안심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기사였지만 호텔까지의 요금은 700코룬(2만6천원, 1코룬=38원)이라 했다. 체크의 일반적인 물가 수준에 비하면 비싼 편이었으나 나중에 호텔에서 공항에 갈 때 이용한 호텔 전용택시도 650코룬이었으므로 결코 '바가지' 수준은 아니었다.

 

이미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으므로 호텔에 체크인한 후 로비에서 입수한 프라하 관광안내자료를 점검했다. 기내(機內)에서 늦은 점심 겸 저녁 식사를 하였으므로 식욕도 나지 않았다. 이 호텔은 베스트 웨스턴 체인으로 시설이 훌륭하면서도 객실료가 저렴한 게 다행이었다. 현지 방송과 독일 방송이 반반인 호텔 TV를 시청하면서 체크 프라하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9월 29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한 후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지하철역(메트로 C라인의 종점인 Nadrazi Holesovice역)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10시경 관광 길에 나섰다. 매표창구 앞에 장사진이 늘어선 것을 보고 역 바로 옆의 맥도널드에서 콜라를 한 잔(19코룬) 시켜 마신 후 동전을 거스름돈으로 받아 자동판매기로 왕복 지하철표(15분용 8코룬, 60분용 12코룬)를 샀다. 프라하에서 메트로를 타려면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허리 높이의 자동개찰기에 표를 집어넣어 사용개시 시각을 인자(print)해야 한다.

프라하 시내관광의 출발점인 박물관(Museum) 역에서 내려 우선 인근의 국립오페라극장으로 가서 오늘 저녁의 오페라 티켓부터 사놓기로 했다. 마침 오늘 저녁 7시에 시작하는 공연은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으로 유명한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였다. 로열석(900코룬) 표를 살 때 뮌헨에서 관광여행을 온 한국 여성 두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다. 나처럼 2박3일 여정으로 내일 밤에는 기차편으로 프랑크푸르트로 떠난다고 했다.

 

프라하 시내 관광
드넓은 광장을 호령하는 듯한 체크의 건국영웅 바츨라프의 기마상 앞에는 미국 테러 참사의 피해자를 위한 촛불과 조화가 놓여져 있었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오랜만에 비치는 햇빛을 피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체크 사람들은 보헤미안 기질이 아직도 살아 있어서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들로서 소련의 압제와 공산체제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체크인들이야말로 공산체제의 자멸과 냉전체제의 종식을 20년 전에 이미 예고한 사람들이었다.

 

관광안내 책자에서 일러준 대로 바츨라프 광장에서 도보로 나피코페가(프라하의 쇼핑 스트리트)를 거쳐 화약탑, 시청 → 시계탑, 구시가 광장으로 갔다. 도중에 블타바(영어 발음으로는 "몰다우")강에서 선유(船遊)를 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동상이 중앙에 서 있는 구시가 광장(Old Town Square)은 민속축제가 열리고 있는 탓인지 가건물이 즐비했고 중앙의 무대에서는 민속음악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부분 작은 깃발을 들고 다니는 안내원을 따라다니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아마 동구권의 언어인 듯)로 설명을 듣는 가이디드 투어였다. 요즘 바가지 쓰기 십상인 이태리 로마보다도 물가가 싼 체크 프라하로 관광객들이 더 많이 몰린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나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으로 유명한 몰다우 강을 한시 바삐 보고 싶었다. 체크橋로 통하는 파리街에는 구찌, 셀린느 등의 명품점이 즐비했다. 몰다우 강은 한강보다는 훨씬 작았으나 멀리 보이는 프라하城을 배경으로 바라보니 매우 아름다웠다. 강변에서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부탁을 하여 사진을 몇 장 찍고 유대인 거리를 거쳐 카를(영어로는 챨스) 다리로 갔다.

 

* 보행자 전용 카를 다리

양쪽에 통행료를 받는 탑이 세워진 카를 다리는 15세기 초 카를 4세가 당대 최고의 토목기술을 동원해서 건설했다고 한다. 난간을 온갖 성상(聖像)들로 장식한 보행자 전용의 다리 위는 관광객들과 거리의 악사, 화가, 노점상들로 벌써부터 붐비고 있었다. 나 혼자서 이국적(異國的)인 풍경을 구경하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다리 중간쯤 소원을 비는 성상 앞에서 다음에는 우리 가족(집사람)과 같이 올 것을 다짐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마다 한 번씩 만지고 지나가기 때문에 성인(聖人)과 번견(番犬)이 새겨진 부조(浮彫)는 반들반들 윤이 나 있었다.

 

카를 다리 밑으로 내려간 레스토랑에서 시켜 먹은 체크의 전통음식(250코룬)도 근사했다. 웨이트레스는 "Very Good!"하면서 닭다리와 돼지고기, 쇠고기를 푸짐하게 야채와 함께 버무려 맥주 1글래스와 함께 내놓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대통령 관저가 있는 프라하성 바로 밑의 말라스트라나 광장까지 갔다가 위병(衛兵)교대식이 볼 만하다는 대통령 관저는 내일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오후 2시 선유관광(Martin Tour, 370코룬) 집합시간에 맞춰 다시 시청 앞으로 바삐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몇 시간 동안 전차의 측면광고, 책방의 진열대, 크리스탈 상점의 티셔츠, 시내 곳곳에 아름다운 여성의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되었다.

 

알폰스 무하의 도시

"Alfons Mucha (1860∼1939)"

아마도 체크가 자랑하는 여성화가인 모양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도 화풍(畵風)이 비슷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여성을 즐겨 그리고 꽃과 새로 장식을 하는 아르 누보(Art Nouveau) 계열이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 서점에 들러 그의 화집(畵集)을 골랐다. 독일의 Taschen 출판사 刊, 'Alfons Mucha'(290코룬). 문제의 화가는 놀랍게도 파리와 뉴욕에서 활약한 모라비아 출신의 남성이었다.

 

몰다우 강에서 커피와 케익을 먹으며 선유를 즐기는 "한나절의 커피브레이크 크루즈"를 1시간만에 마친 후 시내에 있는 무하(프랑스식 발음으로는 "알퐁소 뮤샤")의 미술관을 서둘러 찾아갔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복스럽게 생긴 여성의 그림은 대부분이 비슷한 톤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모델의 용모도 그러했지만 화가 자신이 좋아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의 매우 화려했지만 불우하게 끝난(독일의 프라하 침공 후 슬라브 민족주의 성향의 노화가는 나찌 당국의 심문을 받은 후 그 충격으로 급서함) 일대기와 대표적 작품을 소개한 비디오를 보면서 '국제화,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에도 그와 비슷한 화풍의 미인도를 많이 그린 천경자 여사가 있지만 무하처럼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화가 자신이 해외로 돌아다니며 그의 그림을 PR해야 하겠고, 헌신적으로 그의 그림을 소개하는 평론가와 작가의 존재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나 같은 학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해외 컨퍼런스에 자주 참석하여 얼굴을 알리고, 무엇보다도 국제성 있는 주제의 논문을 영문(英文)으로 자주 발표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할 일"이 너무 많다고 갑작스레 느껴졌다.

 

무하의 그림, 포스터, 뎃상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유럽 출장 중에 부딪혔던 문제의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아니 무하의 그림에 나오는 듯한 아름다운 여인을 프라하에 남겨놓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 무하와 클림트에 대하여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의 웹 싸이트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http://mucha.new21.org
   - http://no-smok.net/ns/moin.cgi/AlphonseMucha
   - http://my.dreamwiz.com/nj0618/Artist003.html

 

⇒ 2020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알폰스 무하 전시회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