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에는 아무래도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요즘은 디지털 방송 앱을 깔아놓고 컴퓨터 작업을 할 때도 좋아하는 프로를 청취하곤 한다.
엊그제 KBS 1FM을 들을 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어나운서가 느닷없이 박정대 시인의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라는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서해의 독도'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1]는 마치 ‘새가 열을 지어 날아가듯 대형을 갖춘 섬들’이란 뜻의 한자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시인이 지적하였듯이 '격렬하면서도 비열한 사랑'을 상상하게 된다.
어느 누군들 젊은 시절에 격렬하면서도 비열한(또는 창피한) 사랑을 안 해 본 사람이 있으랴 싶어 그 시 전문을 찾아 영어로 옮겨 보았다. 젊은 시절 일단 사랑에 빠지면 바다 저 멀리 날아가 '불멸', '불면', '사랑', '입맞춤'의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간밤에 내린 눈을 쓸 듯이 아침밥을 짓듯이 새벽에 일어나 음악 같은 눈송이가 내리는 것[2]을 가슴 아프게 떠올리는 것이다.
2001년 민음사에서 펴낸 박정대 시집에는 연(聯)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散文詩) '음악들'이 수록되어 있다.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격렬비열도를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일단 Gyeokryeolbiyeol-do라 적고 Fierce Rainy Islands로 의역하였다. 그리고 주 3]에 그의 한자 이름을 풀이해 놓았다.
음악들 -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 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Pieces of Music by Park Chung-dae
There were nights when I fell asleep
with you in my arms. Outside my window, the snow fell all night long, and I used to sail in the white sailboat to the farthest reaches of the night, and arrived at Gyeokryeolbiyeol-do (which sounds like the fierce rainy islands) of my youth, where I could see the Shandong Peninsula. On the island, you and I lived in the immortality of one leaf, the insomnia of two, the love of three, and the kisses of four.
The sound of winter night is like galloping horses in the wilderness of those who lost their love. Uighur, Uighur, I hear. When I open the window of my little nation, which no one has ever invaded, I hear the few drops of music that still hang from the icicles on the eaves. As the morning is still far away, the daylight and the evening are still far far away, at` dawn, when someone is shoveling the snow like roots of green onions and washing the rice to make breakfast in silence, there is still musical snow on the fierce rainy islands of my youth.[3]
Note
1] 충남 태안군은 서해의 군사요충지이자 황금어장의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격렬비열도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7월 4일을 '격렬비열도의 날'로 선포했다.
늘 바다를 동경했던 김정섭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는 군에 입대했을 때 충남 서산·태안·당진 해안부대로의 배치를 자원하였다. 그 때 서해 먼바다에 떠 있는 이 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박정대 시인의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공감하고 있던 김 교수는 2014년 중국인이 아직 사유지로 남아 있는 西격렬비열도를 매입하려한 사실을 알고 직접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2년간 발품을 팔아 이 섬의 문화·관광·역사·생태·안보 콘텐츠를 민속지학 방법으로 채록·검증하고 심층 분석했다. 그리하여 2020년 수필집처럼 간직하고 싶은, 방대한 내용이지만 산뜻한 원색감으로 가볍게 읽히는 색다른 연구서를 펴냈다. 이유리, "뜨거운 사랑·지키지 못한 사랑 아! 서해의 독도 격렬비열도…, K-공감, 2020.11.2.
2] 박정대의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제목에 부합하는 음악으로 당시 인기 심야방송의 시그널 뮤직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청춘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던 시절 Pat Metheny Group의 'Last Train Home'과 비슷한 곡조의 이 시그널 뮤직은 듣는 이로 하여금 뭔가 뚜렷하진 않지만 (고향을 찾아가는) 희망과 기대를 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3] 격렬비열도의 한자 이름 格列飛列島을 영어로 풀이하면 'islands which look like birds flying in formation'이지만 시인이 상상하듯이 fierce rainy islands라고 번역하였다. 또 제목도 '음악들'이라는 복수형이므로 여러 개의 눈송이 같은 음악 곡이라는 의미에서 pieces of music으로 옮겼다.
원시(原詩)의 구두점은 오직 쉼표(,) 한 가지뿐인데 영역시는 독자가 외국인임을 고려하여 중간 중간에 마침표를 붙이고 새 문장을 시작할 때에는 대문자를 써서 가독성을 높였다. 그리고 내러티브의 시제가 과거형에서 현재형으로 바뀔 때에는 줄바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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