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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스테디 셀러《총, 균, 쇠》

Onepark 2023. 6. 13. 07:00

G : 오늘은 무슨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P : 나온지 20년도 넘었습니다만, 지금도 꾸준히 독자들의 수요가 있는 재레드 다이아몬드[1] 교수의 책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입니다.

 

G : 저도 오래 전에 읽어보았습니다만, 요즘 시국에 무엇이 관심을 끌기에 이 책을 들고 나오신 건가요? 

P : 최근 G7 정상회의 등 일련의 외교활동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글로벌 중추국가(Global Pivot State: GPS)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대통령 당선되었을 때부터 세계의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중추적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외교분야의 공약 사항이기도 하지요. 

제가 주목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러 신생국이 미국의 원조를 받았음에도 70년이 지난 지금 국제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만한 국력을 갖춘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 UCLA의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일찍이 뉴기니에서 조류 탐사 연구활동을 벌일 때 현지의 젊은 지도자에게 받았던 질문과 유사합니다.

 

G : 저도 기억합니다. "백인들이 뉴기니에 올 때 쇠 도끼, 우산, 성냥, 의약품, 의복 등 많은 물건을 가져 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물건들을 만들지 못했을까요?"

그 질문을 받고 다이아몬드 교수는 무엇 때문에 여러 대륙 간에, 여러 인종과 민족 간에 문명 발전의 차이가 생겨난 것일까 탐구하여 25년에 걸친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 원인이 총 같은 근대무기, 천연두 같은 감염병 그리고 제철야금 기술의 차이로 인해 발전속도에 차이가 났다고 했어요.

P : 저도 우리나라가 6.25 전재(戰災)를 딛고 이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다행이지만, 이러한 발전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전근대적 환경 또는 식민지 상태에서 신생독립국이 되어 미국의 원조를 받은 나라는 많은데 한국은 무엇을 잘했기에 오늘날 이들 나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국과 대등한 파트너가 될 수 있었는가" 그 요인을 파악해 두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승 발전시키지 않으면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G : 저 역시 그와 비슷한 의문을 품곤 했어요. 이를테면 같은 유럽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간에 발전 양상이 달랐던 것은 앵글로-색슨과 라틴 민족성 때문인지, 개신교와 가톨릭 종교 때문인지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P : 저도 이 책을 집어들고 이 대목에 꽂혀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스페인 콩퀴스타도(conquistador)가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장면이었어요.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532년 11월 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최초로 마주친 사건이었다. 아타우알파는 신세계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국가의 절대 군주였고 피사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또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를 대신하고 있었다. 168명의 스페인 오합지졸을 거느린 피사로는 낯선 땅에 들어왔다. 그는 그 지역 주민들을 잘 몰랐고 가장 가까운 곳(북쪽으로 1600km나 떨어진 파나마)에 있던 스페인인들과도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으므로 때 맞춰 원병이 도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아타우알파는 수백만의 백성이 있는 자기 제국에 버티고 있있으며, 더구나 다른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막 승리를 거둔 8만 대군이 그를 둘러싼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두 지도자가 얼굴을 맞대고 미처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피사로가 대뜸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피사로는 그로부터 8개월 동안이나 이 인질을 붙잡아 놓고 나중에 풀어준다는 약속하에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을 뜯어냈다. 피사로는 가로 6m, 세로 5.2m에 높이 2.4m가 넘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몸값으로 받은 후에 약속을 저버리고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고 말았다.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것은 유럽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스페인의 무기가 더 우수했으므로 어차피 결국에는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겠지만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은 덕분에 정복 과정이 훨씬 더 쉽고 신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타우알파는 잉카족이 태양신으로 숭배하는 존재였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그가 사로잡힌 상태에서 내리는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했다. 아타우알파를 죽일 때까지의 몇 달은 피사로가 탐험대를 파견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잉카 제국의 다른 지역들을 마음껏 돌아다니게 하고 파나마에 원병을 요청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따라서 아타우알파를 처형한 후 드디어 스페인인과 잉카족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스페인의 병력은 전보다 막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아타우알파가 생포된 사건은 근대사의 가장 큰 충돌이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보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왜냐하면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을 수 있게 만든 요인들은, 본질적으로 근대에 세계 각지의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졌던 유사한 많은 충돌 사건들, 그것들을 결정 지었던 요인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은 세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넓은 창문인 셈이다.
93-94쪽.

 

G : 남미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아주 치욕스러운 사건이었어요. 직전에 전승을 거두었던 8만 대군이 불과 128명의 스페인 군대에 유린을 당한 것이니까요.[2] 

P :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에 속한 겁니다만, 구약 성경을 보면 이와 비슷한 싸움이 없진 않았어요.

예컨대, 사사시대에 300명의 기드온 용사가 항아리에 감춘 횃불과 뿔나팔만으로 미디안 군대를 물리친 이야기(사사기 7:15-23), 또 南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 성 밖에 앗시리아 대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의 통신 교란(?)으로 산헤립 왕이 혼비백산 도망쳤다는 이야기(이사야 37장)가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어요.

 

* 루벤스, 앗시리아 산헤립 군대의 패주.

G : 당시 잉카 제국의 군대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쓸 줄 아는 지휘관도 없었고 포로가 된 황제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칩시다. 그래도 전력(戰力)에 있어서는 스페인 정복자들과 큰 차이가 있었던 것 아닌가요? 스페인인들을 오합지졸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1당 500'일 정도로 전투력이 뛰어나진 않았거든요. 

P : 스페인 병사의 화승총은 다루기가 어려워 심리적 효과만큼 살상 효과는 크지 않았다 해요. 그보다는 쇠칼, 창, 단검, 쇠 갑옷 등 쇠로 된 무기의 위력이 압도적이었고, 잉카인들이 처음 보는 말(馬)은 심리적으로나 전술적으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스페인 기마병들은 인디언 파수꾼이 배후의 아군에게 알리기 전에 간단히 앞지를 수 있었으며, 도망치는 인디언도 금방 쫓아가 쓰러뜨리고 죽일 수 있었다. 말이 돌진하여 부딪칠 때의 엄청난 충격, 조종하기 쉽다는 점, 그리고 신속한 공격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탁 트인 곳에서 보병들은 거의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낸 효과는 처음으로 말에 맞서 싸우는 잉카 병사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잉카족의 대반란이 있었던 1536년 무렵에는 잉카족도 기병대에게 대항하는 요령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비좁은 샛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스페인 기마병들을 전멸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보병들처럼 잉카족도 역시 넓은 곳에서는 기병대를 물리칠 도리가 없었다. 아타우알파의 뒤를 이은 잉카 황제 망코의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던 키소 유팡키는 1536년에 리마에서 스페인인들을 포위하고 그 도시를 치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기병대 두 부대가 평지에서 훨씬 더 많은 인디언들에게 돌격을 감행했고 첫 공격에서 키소와 휘하 지휘관들을 모두 죽여서 전군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망코 황제가 쿠스코에서 스페인인들을 포위했을 때는 스물여섯 명의 기마병이 돌격하여 황제의 친위병 중에서도 최정예 부대를 궤멸시킨 일도 있었다.  106쪽

 

[한 가지 더 스페인인들이 비대칭적 전력을 가졌던 것은] 문자 덕분이었다. 그들이 인간의 행동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또한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온 침략자들을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역사적으로 앞선 다른 시대에 무수히 일어났던 유사한 침략 위협에 대해서도 전혀 듣지도 읽지도 못했다. 그러한 경험의 격차 때문에 피사로는 함정을 파게 되었고 아타우알파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사건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을 식민지로 만들지 못하고 유럽인들이 신세계를 식민지로 만들게 된 직접적 요인들을 보여주고 있다.
피사로가 성공을 거두게 한 직접적 원인에는 총기, 쇠 무기, 말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 기술, 유라시아 고유의 전염병, 유럽의 해양 기술, 유럽 국가들의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 문자 등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총, 균, 쇠"는 그러한 직접적 요인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 요인들 덕분에 근대의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어째서 그와 같은 직접적 이점들이 신세계보다 유럽에 더 편중되었을까? 어째서 잉카족은 총과 쇠칼을 발명하거나, 말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짐승을 타고 다니거나, 유럽인들에게 저항력이 없는 질병을 지니거나, 바 그다를 건널 수 있는 배와 발전된 정치 조직을 만들어내거나 수천 년에 걸쳐 기록된 역사로부터 경험을 얻거나 하지 못했을까?
  112-113쪽

 

G : 이 책에서 제일 놀라웠다고 할까 어처구니가 없었던 대목은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인들, 그들이 탐험가이든, 정복자이든, 이주민이든 접촉의 결과는 세균이 좌우했다는 것이었어요. 전쟁이 벌어졌을 때 가장 훌륭한 장군이나 무기를 가졌던 군대가 승리한 게 아니라 가장 지독한 병원균을 퍼뜨린 군대가 승리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P : 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뉴잉글런드에 도착하여 토착 원주민들과 접촉을 가졌다고 하지요. 얼마 후에 찾아가 보니 옥수수 알곡더미는 그대로 있는데 인디언들이 자취를 감췄다고 해요. 나중에 알고보니 영국인들에 의해 감염된 천연두로 인해 면역력 제로인 인디언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천연두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도 맹위를 떨쳐 미국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럽인들이 무기류, 기술, 정치 조직 등의 우월성만으로 비유럽인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유럽이 다른 여러 대륙에 사악한 선물, 즉 유라시아인들이 오랫동안 가축과 밀접하게 살았기 때문에 진화된 각종 병원균을 주지 않았다면 그러한 정복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농업의 발생과 더불어 인류가 많아지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성 질병(crowd disease)은 진화되고 존속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285쪽

 

1519년 코르테스는 지독하게 군사 중심적인 인구 수천만의 아스텍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600명의 스페인인을 이끌고 멕시코 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여 겨우 병력의 3분의 2만을 잃고 무사히 탈출했으며 싸움을 거듭한 끝에 결국 해안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코르테스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 아스텍인들은 더 이상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았고 몹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도 스페인인들이 유리했던 것은 바로 천연두 때문이었다. 이 병은 1520년에 스페인령 쿠바에서 감염된 한 노예와 더불어 멕시코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유행병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아스텍족을 몰살시켰으며 그 속에는 쿠이틀라우악 아스텍 황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치 스페인인들은 무적임을 알리려는 듯 스페인인은 내버려두고 인디언만 골라 죽이는 이 수수께끼의 질병 때문에 아스텍의 생존자들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약 2000만에 달했던 멕시코 인구가 1618년에 이르렀을 때는 약 160만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307쪽

 

오늘날 북아메리카에서 최고의 농경지가 펼쳐져 있는 미시시피 강 유역의 경우 그곳의 인디언 사회들이 붕괴되기까지 정복자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대신 한 발 앞서 전파된 유라시아의 병원균이 모든 일을 해치웠다.
1540년 에르난도 데 소토는 미국 동남부에 진출한 최초의 유럽인 정복자였다. 당시 그가 지나간 인디언 마을들은 주민들이 유행병으로 전멸하여 이미 2년 전부터 텅 비어 있었다. 그 유행병들은 해안에 찾아온 스페인인들에게서 전염된 해안 지방의 인디언들로부터 퍼진 것들이었다. 스페인인들의 세균이 오히려 스페인인들보다 먼저 내륙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 소토는 미시시피 강 하류 쪽에서 인구가 조밀한 여러 인디언 마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탐험이 끝난 후 유럽인들이 다시 미시시피 강 유역에 진입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 유라시아의 세균들은 이미 북아메리카에 뿌리를 내리고 계속 전파되었다. 미시시피 강 하류에 다시 나타난 유럽인들은 1600년대 말엽의 프랑스 정착민들이었다. 그때 이미 인디언의 큰 마을들은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고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는 미시시피 강 유역 여기저기에 축조해 놓았던 거대한 둑뿐이었다.
  308쪽

 

G : 전에 다이아몬드 교수가 한국 특파원과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요. 여전히 UCLA에서 현역으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원고는 반드시 연필로 쓰는 원칙을 고수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어요. 

P : 그분은 세계 어느 문자와 비교해도 한글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뼈를 때리는 일침을 가하고 있어요. 우리가 자랑하는 구텐베르크보다 앞서 발명한 금속활자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구텐베르크가 성경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했던 것처럼 금속활자의 이점을 살려 대량인쇄를 하지 않았다면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글도 아녀자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거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라는 말이 있다. 발명은 한 사회가 아직 충족되지 못한 어떤 필요를 느낄 때, 즉 어떤 기술이 불만스럽거나 부족하다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발명가 지망생들은 금전이나 명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동기 부여를 받아 이 같은 필요를 감지하고 거기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어떤 발명가가 드디어 기존의 불만스러운 기술보다 우수한 해결책을 찾아낸다. 이 해결책이 사회의 가치관이나 각종기술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실 이처럼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고 보는 상식적인 견해를 뒷받침하는 발명품은 제법 많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정부는 나치 독일보다 먼저 원자 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발명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20억 달러(오늘날로 치면 200억 달러가 넘는 거금)를 소비한 후 3년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또 다른 예로는 미국 남부에서 재배한 목화를 다듬는 고된 수작업을 대신하기 위해 1794년 엘리 휘트  니가 발명한 조면기(변화의 씨를 빼거나 솜을 트는 기계), 그리고 영국의 탄광에서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69년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 등이 있다.
이처럼 낯익은 사례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밖의 중요한 발명품들도 모두 필요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수많은 발명품, 또는 대부분의 발명품은 호기심에 사로잡히거나 이것 저것 주물럭거리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개발했고, 그들이 염두에 둔 제품에 대한 수요 따위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일단 어떤 물건이 발명되면 그때부터 발명자는 그것의 용도를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상당 시간 사용된 이후에야 비로소 소비자들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물건은 어느 한 가지 용도를 위해서 발명되었지만 결국에는 오히려 예기치 못했던 다른 용도에 더 많이 쓰이 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렇게 어느 한 가지 쓸모를 위해 만들어졌던 발명품들 중에는 현대에 이루어진 중요한 기술적 혁신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비행기와 자동차, 내연기관과 전구, 축음기와 트랜지스터 등 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발명이 필요의 어머니일 때가 더 많다.
[3]  351-352쪽

 

인류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도약한 것은 우리가 정주형(定住型) 생활 방식을 채택하면서 일어났다. 그 시기는 세계 각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달라서 빠른 곳은 13000년 전에 일어났고 또 어떤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무소식이다. 그 같은 생활을 채택 하게 된 것은 대개 식량 생산의 채택과 관련이 있었다. 식량 생산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농작물과 과수원과 저장된 잉여 식량이 있는 곳에 가까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청주형 생활은 기술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러한 생활 덕분에 사람들은 들고 다닐 수 없는 소유물들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랑 생활을 하는 수렵 채집민들은 휴대할 수 있는 기술밖에 가질 수 없다. 자주 옮겨 다니면서도 탈것이나 짐 나르는 동물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기와 무기류, 그리고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부피가 작은 최소한의 절대 필수품 정도로 자기 소유물을 제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몇 가지 기술이 매우 일찍부터 나타났으면서도 오랫동안 발전하지 못했던 현상은 아마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379쪽

 

* 아시아 남성 성악가로서는 최초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리톤 김태한

G : 처음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우리가 제2의 경제 도약을 이루고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인류문화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4]

P : 네, 세계 1등 제품과 서비스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아요. TV, 냉장고, 휴대폰 같은 가전 정보통신기기, BTS와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팝 연예인들, 그리고 기악, 성악 등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젊은 음악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요. 싸이의 "강남 스타일", Netflix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은 어쩌다 한 번 나오는 히트작이 아니라 계속 후속작들을 이끌어 내고 있기에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G : 그럼 이제 결론을 내려주세요.

P : 한국이 글로벌 중추국가(GPS)로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다이아몬드 교수가 西유럽이 앞선 이유로 총, 균, 쇠 3가지를 제시했던 것처럼 우리도 다음 세 가지는 꼭 간직하고 기존 것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① 정주영이병철 같이 앞다퉈 세계 1등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고자 하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② 정부와 기업, 일반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세계를 선도하려는 의지(the will to lead the world), 그리고 ③ 오일 쇼크 때 중동 건설수출에 박차를 가했던 것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는 타이밍(timing to seize opportunity)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Note

1]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1937~  )는 영국 케임브리지大 트리니티 칼리지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생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 지리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생리학으로 과학 인생을 시작했으나 수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조류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 등으로 자신의 영역을 점점 확장해 나갔다. 진화생물학이나 인류학에 관해 Discover, Nature, Natural History 등 전문지에 폭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글들을 기고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저서 《제3의 침팬지(The Third Chimpanzee)》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의 과학출판상과 미국의 LA타임스 출판상을 수상했다.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미국과학아카데미, 미국철학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총, 균, 쇠》는 1998년 퓰리처 상, 영국의 과학출판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에 《섹스의 진화 (Why is Sex Fun)》 《문명의 붕괴(Collapse)》 등의 저서가 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제3의 침팬지》에 이어 《총, 균, 쇠》 책이 한국민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문자 한글로 출간됨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난 13000 년간 지리적 조건이 인류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역사와 지리에 대한 그의 생각을 공유하기를 희망하면서 한국의 지리적 저건이 모든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가져다주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뉴기니에서 원주민으로부터 사냥술을 배우는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

2] 1532년 11월 16일 잉카 제국의 카하마르카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히 잘 알려져 있다. 피사로의 동생을 비롯한 여섯 명의 스페인 참가자들이 진술한 목격담이 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95-102쪽 참고.

 

3] 토머스 에디슨의 축음기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가가 이룩한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1877년 에디슨 이 최초의 죽음기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 발명품이 소용될 만한 열 가지 용도를 제시하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을 보존하는 일, 시각 장애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책을 녹음하는 일, 시간을 알려주는 일, 철자법을 가르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악을 재생하는 일은 에디슨이 제시한 우선순위에서 상위권에 들지도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에 상업적인 가치가 없다고 조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시 몇 년 후에는 마음을 바꾸어 축음기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용도는 사무용 구술 기계였다. 다른 기업가들이 축음기를 이용하여 동전을 넣으면 대중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크박스를 만들어냈을 때 에디슨은 자기 발명품이 사무용이라는 중요한 용도를 벗어나서 그렇게 전락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에디슨도 축음기의 주된 용도는 음악을 녹음하고 재생하는 말이라는데 마지못해 동의했던 것이다.  352-353쪽

 

4] 다이아몬드 교수는 한국어판 특별증보면에서 일본인 조상에 관한 세 가지 학설을 소개하였다. 

일본에서는 ① 1만여 년간 지속된 '새끼줄 무늬'의 토기를 사용하던 조몬 시대를 거쳐 ② 한반도의 벼농사 기술과 문화를 갖고 한반도에서 도래(渡來)한 이주민들이 세력을 확장하던 야오이 시대가 700년간 계속되었다고 본다. 그 후 ③ 벼농사를 짓는 이주 노동자들이 식량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인구수가 급증하여 주로 수렵생활을 하던 원주민인 조몬인을 능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토 부근에는 길이 450m, 높이 3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흙무덤)이 있는데 일본 당국은 왕실 조상들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발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일본 왕실이 천손(天孫)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도래하였다는 원치 않는 사실이 드러날까 하는 우려도 있다.  645-649쪽 참조

다이아몬드 교수는 증보판에서 최근에 발견된 유전적 증거를 토대로 현대 일본인들이 《총, 균, 쇠》에서 다룬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농업적 팽창의 산물이란 사실을 밝혔다. B.C. 400년경 한반도의 식량 생산자들이 남서부 일본을 시작으로 일본 열도 북동부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주민들은 집약적인 벼농사와 금속 도구를 전파했고,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살던 농경민들이 영역을 넓혀 유럽의 원시 수렵 채집민들과 섞여 현대 유럽인이 된 것처럼, 현대 아이누족과 관련 있는 원시 일본인과 섞여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6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