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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알마티 - 왕오 천축국전

Onepark 2014. 7. 31. 15:00

알마티로 가는 길은 무척 멀었다.

그 옛날에 뜨거운 뙤약볕 아래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이동 중 세미나 시간에 공주대 김경석 교수가 "떠오르는 환동해권 관광"에 관하여 주제발표를 했다.

나는 광역 두만계획(GTI)와 관련하여 중국과 러시아, 북한, 한국과 몽골, 일본을 무슨 유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질문을 하였다. 김 교수는 자원 에너지 클러스터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12시가 되어 도착한 알마티 시내의 뷔페식 레스토랑에서 매우 푸짐하게 점심식사를 하였다.

콜라를 빼놓고는 맛이 어떤지 모르고 쟁반에 옮겨 담았으나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무엇보다도 오늘까지 다른 일행들이 고생한 설사를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알마티는 매우 깔끔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으나 시내 교통은 무척 혼잡하였다.

시내 관광은 거의 포기를 하고 심불락(Shymbulak) 스키 리조트로 올라가는 곤돌라를 타러 갔다.

2011년 2월 아스타나와 알마티에서 제7회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열리면서 시가지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한다.

도중에 방송 송신탑 겸 전망대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한여름이지만 심불락 스키장으로 올라가는 곤돌라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정도로 성업 중이었다.

곤돌라는 경사면을 올라가는 구간보다 수평으로 이동하는 구간이 훨씬 길어 보였다.

10분쯤 걸려 도착한 테라스(Intersection Station)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더 높이 올라가는 리프트는 부분 운행 중이었다.

 

 

테라스 카페에서 우리 일행은 모여 앉아 이번 여행에서 경험했던 세 나라를 비교하기에 바빴다.

주마간산 격의 체험이었지만 각자 호불호가 갈렸다.

나로서도 정년퇴직 후 봉사활동을 한다면 물가 싸고 사람 인심 좋은 우즈베키스탄이 좋을 것 같았다.

키르기즈스탄은 아직도 개혁 개방 도상이었다.

카자흐스탄은 자원도 풍부하고 경제성장률도 높지만 택시를 불러 타더라도 가격흥정을 잘 해야 한다니(아래 두 번째 사진이 그 장면인듯) 살기에는 좀 피곤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번 여행의 최종 만찬은 가야 진짜루라고 하는 한식집에서 열렸다.

넓은 홀을 우리 일행이 차지하고 떠들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내부가 너무 더워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시내 관광을 포기하고 알마티 공항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었다.

 

 

출국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 일행은 모두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비행기 안은 이미 한국이나 다름 없었다. 이륙을 한 후 창밖을 보니 비행기가 해를 따라 가고 있었으므로 날개 끝으로 비행기 구름이 퍼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찾았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몇 달 씩 걸려 이 곳까지 왔지만, 우리는 유병언 사건 등 서울 소식을 계속 청취하며 고속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었다.

불현듯 혜초 스님의 왕오 천축국전이 생각이 났다. 그는 실크로드가 발달하기도 전에 오직 불법을 구하러 듣도 보지도 못한 인도 중앙아시아의 다섯 나라(천축국)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후대 사람을 위해 보고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여기 블로그에 올린 "중앙아시아 스탄3국 탐방기"도 다른 사람이 여행계획을 세울 때 참고가 된다면 다행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타슈켄트에 며칠 머물게 된 사람이 하루를 즐기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한다면, 침간산 리조트에 리프트 타고 올라가기 위해 관련 사진과 기사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기호에 따라서는 에곤 쉴레의 그림 비슷한 회화가 라운지에 걸려 있는 차르박 호반 호텔을 찾아가 수영을 즐겨도 좋을 것이다.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은 벽화에 자취를 남겼고, 바자르에 온 상인은 이문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성지 천축국(인도)을 여행하였던 신라시대의 유학승 혜초는 무엇을 했을까?

개원(開元) 15년 즉 727년 필기도구나 종이가 귀했던 시절 여행지에서 "천축국에 다녀오다(往五天竺國傳)"는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그의 기록이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구름처럼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