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People

Travel

[탐방] 밀림 속의 경이 앙코르 와트 기행

Onepark 2009. 4. 17. 18:53

2009년 2월 앙코르 와트(Angkor Wat)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아직 안 가본 곳으로는 일본의 도시들도 많았지만, 환율을 고려하여 행선지를 앙코르 와트로 정했다.

L관광의 고품격 패키지를 이용하였는데 숙소는 최고급의 시설과 서비스를 자랑하는 Royal Angkor Hotel이었다.
큰 기대를 하고 떠난 게 아니었음에도 나로서는 세 가지의 의미있는 만남(encounter)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밀림 속의 석조사원과 힌두교, 그리고 육감적인 조각상들로 일상생활에서는 마주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첫째는 씨앰립(Siam Reap)의 허접한 마을과 울창한 밀림 속에서 발견한 석조 사원과 대도시의 유적이었다.

앙리 무오(Alexandre-Henri Mouhot 1826-1861)라는 프랑스의 탐험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밀림을 헤쳐 나가던 여행자들에게 석조의 사원은 그때까지의 온갖 노고를 다 잊게 하고 감탄과 환희의 느낌을 안겨주었다. 마치 사막을 헤매다가 푸른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 마술에라도 걸린 듯 여행자들은 갑자기 야만에서 문명,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체험하였다."

 

사면이 해자로 둘러싸인 앙코르 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 사원으로 1113∼1140년 사이에 수라바르만 2세(Suryavarman II)에 의해 건설되었다.
수십 km 떨어진 곳에서 큰 바위돌을 운반해다 거대한 석조 건조물을 만들었다 해서 이집트 피라밋, 이스터섬의 석상, 안데스 고원의 마추피추 등과 더불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다.

 

앙코르 와트 사원의 대회랑에는 고대 힌두신화에 나오는 "우유바다 젓기"(乳海攪拌 Churning the Sea of Milk) 이야기가 돋을새김으로 그려져 있다.
악신 아수라의 무리들에게 곤경을 당하던 선신 데바의 무리가 비슈누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비슈누는 "우유의 바다를 저어라!"라고 말했다.

[* 우유를 저으면 버터와 치즈가 되는데……?!  그래서 힌두교의 천지창조 설화는 낙농업자들의 경전이 되었나? 그와 반대로 힌두교도들은 살생금지 계율 때문에 채식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우유의 바다를 저으려니 큰 막대기와 고정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다라 산을 바다 한가운데 옮기기 위해 데바신들은 아수라신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수라신들은 밧줄로 쓰려고 독사 바수키(Vasuki)를 깊은 바다에서 끌어올렸다. 그리고 만다라산을 휘감게 했다.

 

마침내 만다라산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비슈누는 스스로 거북이 꾸르마(Kurma)가 되어 바다 속에 뛰어들었다.
거북이로 변한 비슈누의 등이 막대기의 중심축이 되어 드디어 우유바다를 휘저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바수키가 숨을 쉬면서 내뿜는 독에 머리 쪽을 잡은 아수라신들은 힘을 잃었다. 다행히도 꼬리 쪽을 잡은 데바신들은 무사했다.
'우유바다 젓기'가 끝나고 불로장생의 감로수 암리타(Amrita)를 획득하기 위해 데바와 아수라는 계속하여 힘을 합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과 악이 합일하는 순간이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듯이 선과 악은 둘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는 위에서 본 것처럼 앙코르 도처에 새겨져 있는 힌두교의 세계관이었다.
힌두교에서는 창조의 신 브라마(Brahma), 유지(維持)의 신 비슈누(Vishnu), 파괴의 신 시바(Shiva)의 세 신을 섬긴다.
그리고 윤회(輪廻)와 업(業, Karma), 해탈(解脫)과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생활을 중시한다.
상당 부분이 석가모니의 불교로 전해졌고, 기독교에도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도 공생애 전에 인도에서 수행을 하셨다고 하며, 사도 도마는 주로 인도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힌두교가 오늘날 인도에 선물한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빼도박도 못할 4성 카스트 제도와 주어진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내세에 잘 되기만을 바라는 체념론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이들 석조 사원과 대도시를 건설한 앙코르 왕국과 그 주민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멕시코의 테오띠와칸(Teotihuacan)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의문과 같았다.
앙코르 왕국은 13세기 말부터 라오스 지역에 살던 참족 등에 시달리며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어서 몽고족과 타이족의 침공을 받으며 급속하게 쇠락하여 마침내 1431년에 아유타야(Thay) 왕조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대도시 앙코르 톰(Angkor Thom) 일대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우림 속의 돌무더기
우중충한 바위 속에
빛나는 천년의 미소
Piles of stone in rain forest
Reveal luminous
Thousand-year old smiles. 

 

숲 속의 석상들은
누가 만들었다는 기록도 없으니
필시 하늘의 작품임이 분명
Stone sculptures in the forest
With no record by whom
Must be divine works.

 

그 때에도 폴포트가 자행하였던 킬링필드(Killing Field)가 벌어졌단 말인가.
아니면 타 프롬(Ta Prohm) 사원의 석조건물을 마구 휘저으며 하늘 높이 자라는 스펑(spung)나무처럼 자연의 힘(Force Nature) 앞에 맥없이 스러지고 말았다는 것인가. 타 프롬은 그 괴기스러운 모습 때문에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툼레이더'와 한국 영화 '알 포인트'의 로케 장소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가 국가적 위엄과 지도자의 치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국력을 동원하여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였다. 바꿔 말하면 기록을 가진 민족은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기록을 남기지 못하는 민족은 이민족이나 자연의 공격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석조건물을 무너뜨린 가공할 위력의 스펑나무

현재의 캄보디아인(크메르족)들이 그들의 후손인지 여부도 불확실하다고 한다.
그에 관한 기록이 없는 만큼 오늘날의 캄보디아가 앙코르 제국을 자기네 선조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웃 나라인 태국도 앙코르 문화가 타이 문화와 같은 뿌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태국의 아유타야 유적을 보면 앙코르 유적과 유사한 것이 많다. 오늘날 앙코르 왕조의 연대표가 전해진 것은 1868년부터 앙코르 유적 발굴이 본격화된 이후 고고학자들이 비문이나 조각에 새겨진 산스크리트(Sanskrit 고대인도어)를 해독하였기 때문이다.

 

* 앙코르 톰의 부처 상 앞에서

앙리 무오는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밀림 속에 수백 년 방치되어 있던 폐허같은 유적지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다행히도 6백년 전에 전성기의 앙코르 톰을 방문하고 생생한 기록을 남긴 사람이 있었다.

 

13세기에 원나라 사신의 수행원으로서 크메르에서 1년 남짓 체류한 후 귀국하여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란 견문록을 쓴 주달관(周達觀)이다. 진랍(眞臘)은 옛 캄보디아 왕국의 이름이다.

"주성(主城)은 둘레가 약 20리(12km)로 5개의 문이 있는데 성문은 각각 이중으로 되어 있다. 동쪽으로 2개의 문을 열어놓았고 나머지 방향은 모두 하나의 문을 열어놓았다.
성곽 밖에는 커다란 해자(垓子)가 있다. 해자 바깥에는 네거리로 통하는 큰 다리가 있다. 다리 양쪽에는 각각 54개의 석신(石神)이 서 매우 크고 험상궂게 생겼다. 이들 54개의 선신(Deva)와 54개의 악신(Asura)은 한결같이 손으로 뱀을 붙잡고 뱀이 달아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서 있다."

 

* 앙코르 와트 복구작업 현장
* 유적복원은 레고블록 쌓듯 허물어진 바위돌의 짝을 맞춰가는 작업이었다.

주달관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앙코르 톰은 성으로 둘러싸이고 백만 가까운 주민이 살았던 대도시였다.
한 복판에 있는 바이욘(Bayon) 사원은 앙코르 와트 사원보다 80년 뒤늦게 지어졌는데 앙코르 제국의 영웅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25-1215)가 지은 불교사원이었다. 그는 똔레샵(Tonle Sap) 전투에서 참족(베트남)에 대승을 거둔 후 왕위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얻은 승리였기에 그는 용맹스러운 군인보다는 자비스러운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비춰지기를 원하여 바이욘 사원에 54개의 부처상을 만들었다. 실은 관세음보살의 얼굴 아니라 자야바르만의 얼굴이 조각된 것이라고 한다.

 

* 지옥의 형벌을 재현한 크메르 루지의 킬릴필드 기념관

세 번째로 관광객들의 눈에 각인된 것은 앙코르 유적지의 벽과 기둥마다, 계단마다 레테라이트 돌 위에 새겨진 부조(浮彫)였다. 무엇보다도 '天上의 무희 압사라(Apsara)'의 자태가 시선을 끌었다.
힌두교 3대 神 중 하나인 시바신의 기쁨조 역할을 하였던 압사라의 모습은 앙코르 유적지의 어느 사원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풍만한 젖가슴, 잘록한 허리와 늘씬한 다리 이들을 감싼 하늘거리는 비단옷이 매우 육감적이었다.

 

* 앙코르 와트 사원의 압사라 상

무서운 시바신을 기쁘게 한 압사라의 춤추는 모습은 앙코르 와트에만 1700여 개 새겨져 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똑같은 모습의 압사라가 없다는 점이다. 머리에 쓴 관이 같으면 춤추는 손동작이 다르고, 손동작이 비슷하면 옷맵시가 달랐다.
정교하게 조각이 새겨진 문틀 장식과 함께 이국적인 동양의 여인 모습은 이곳을 찾은 서양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에 반테아이 스레이(Banteay Srey) 힌두사원의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앙드레 말로는 그가 '동양의 비너스'라고 일컬은 석상을 몰래 반출하려다가 적발된 적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압사라의 춤을 재현하여 민속공연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장애인들에게 공예를 가르쳐 현대적인 관세음보살 상과 압사라 상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아티상(Artisans Angkor) 공예학원에서는 원생들의 자립을 도울 수 있도록 완전 수공업 형태의 실크 공예와 나염 기술, 그리고 유적을 재현하는 목공예와 석공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