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방문할 곳은 고대 그리스 유적지 아그리젠토(Agrigento)의 신전의 계곡(Valle dei Templi)였다.
어제처럼 8시 반에 호텔에서 출발했는데 2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였으므로 인솔자는 세계여행을 다니는 즐거움과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또 현지 가이드는 관광 가이드 자격증을 따게 된 사연을 각기 소개해 주었다. 그 만큼 우리 일행은 친밀도가 높아지고 서로에 대한 궁금증도 많이 해소가 된 터였다.
주유소와 카페가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번 쉴 때에는 시칠리아의 농부들이 농지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잘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탄 버스는 도로공사 등으로 길이 복잡한,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아그리젠토 시내에 진입했다.






그리스 신전이 있는 신전의 계곡 언덕 위에는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소지품 검사를 받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신전의 계곡에는 헤라, 헤라클레스, 제우스, 콘코르디아, 쌍둥이 등 여러 신을 모신 신전들이 세워져 있다고 했다. 그 앞 바닷가로 이어진 평원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결판이 난 곳이었다. 어떻게 대리석도 나지 않는 이 황량한 언덕 위에 그리스 신들을 기리는 신전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로마군은 한니발의 지휘 하에 이탈리아를 침공해온 페니키아 군대를 격파한 다음 그들을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17세기 말 지진으로 무너졌다가 새로 건설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품은 곳이었다.


다행히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가 내리지 않아 우리는 유적지 입구 주차장에서 버스에서 내려 헤라 신전부터 찾아갔다.
이곳에 정착한 그리스 인들은 무슨 연유로 성벽을 쌓기보다 신들을 모신 신전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이것은 첫날 방문지였던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을 찾았을 때 들었던 의문이기도 했다.
기원전 5~6세기 경 이곳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은 해상무역으로 부가 축적되고 인구가 늘어나자 공통의 목적과 염원을 담아 자기네 비전에 부합하는 신에게 신전을 지어 봉헌했을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컸던 만큼 본토 그리스 신전을 능가할 정도의 규모로 짓고자 했다.
이것은 처음 방문한 헤라 신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제우스 신에 앞서 헤라 여신을 모셨다는 것은 결혼과 가정을 수호하는 여신이었기에 항해의 안전과 본토 배우자의 유입을 통한 그리스 이민사회의 번영을 간구하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유적지를 탐색할 수록 이 지역이 처음엔 굴을 파고 시신을 매장했던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았다. 그 과정에서 토양과 석재의 형질을 파악하고 대형 건조물을 지을 생각을 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들에게 대형 신전을 지을 재력도 비교적 충분하였으므로 건설기간 동안 이 지역에는 평화가 지속되었으리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시라쿠사와 전쟁을 벌였을 때에는 전쟁 포로들을 신전 건설에 동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칠리아가 지중해의 가장 큰 섬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카르타고, 로마 제국, 북아프리카 이슬람 왕국, 노르만 왕국 등이 차례로 침입해오면서 신전들 역시 지배자의 종교에 따라 변형이 불가피하였다.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콘코르디아 신전은 기독교 예배장소로 이용되었다 한다.
그러고보니 이곳 풍경이 결코 예사로울 수가 없었다.





화해와 협력을 상징하는 콘코르디아 신전 앞에는 20세기에 제작된 추락한 이카루스의 동상이 팔다리가 부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인간이 제아무리 웅장한 건물이나 정교한 장치를 만든다 해도 흐르는 세월과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점에서 이곳 신전들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았다.




점심은 그리스 신전들이 바라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여기서는 특식으로 각자 피자 반판과 테이블마다 시칠리아 산 레드와인이 한 병씩 제공되었다. 하이엔드 패키지 투어의 혜택인 셈이다. 우리는 후식까지 먹은 후 다음 행선지 라구사(Ragusa)로 이동했다.


조금 전까지 흐리기만 했던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버스 앞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4시 40분경 17세기 말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재건된 구시가지와 그 후 건설된 신도시가 병존하는 라구사에 도착했다.
우리는 구시가지의 산 지오르지오 대성당과 산 주세페 성당을 둘러보고 성당 앞 광장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6시 10분 예약해둔 동굴 형태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삶은 계란 같이 생긴 모차렐라 치즈와 샐러드로 식욕을 돋군 다음 메인으로 넙적한 모양의 스파게티를 먹었다. 우리는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은 후 비가 내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가 탈 버스는 저지대의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 투숙할 메디터라네오 팰리스(Mediterraneo Palace) 호텔에 캐리어를 끌고 당도해보니 내 휴대폰이 없지 않은가! 버스 기사에 생수를 2병 구입하느라 휴대폰을 의자에 놓고 내린 것이 생각나 부랴부랴 버스 기사에게 연락하여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아뿔싸! 휴대폰 분실은 앞으로의 여행을 망칠 수도 있는 중대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운전기사도 우리와 같은 호텔에 투숙하기로 되어 있어 무시히 휴대폰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유럽의 수돗물에는 석회 성분이 많아 음용이 곤란하고 4성급 호텔에서도 생수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 시칠리아 5: 시라쿠사 네아폴리스 고고학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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