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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내 인생을 바꾼 책 한 권(2)

Onepark 2024. 11. 23. 08:00

Liar's Poker는 처음엔 제목에 이끌려, 점차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씩 배우는 재미로 읽었다.

특히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MBS (mortgage-backed securities)를 만들어 팔게 된 경위와 그 발전 및 쇠퇴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산업은행 국제금융부에서 근무할 때 국제금융시장 동향 조사를 맡았었는데 그때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보내오는 정보지는 대부분 MBS에 관한 것이었다. 모기지가 주택담보 대출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유가증권 앞에 '-backed'란 말이 붙는 이유, 그리고 설명 중에 나오는 'pass through'란 말의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상사도 없었다. 실로 우리나라에는 전혀 생소한 증권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이클 루이스는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주로 국공채 트레이딩에 주력했던 살로먼 브라더스가 어떻게 모기지 증권시장의 강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들려주었다. 그것도 아주 흥미롭게 말이다.

증권거래를 잘 안다고 해도 그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것을 마치 추리소설처럼 풀어쓴 것도 놀라웠다.

 

밥 달(Bob Dall)은 채권거래를 좋아했다. 지니매이(GNMA: 정부주택저당금고에서 발행한 채권)에 대한 공식적인 의무는 없었지만 그는 이들 채권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일이었다. 1977년 9월 달은 모기지 증권 분야에서 살로몬 브라더스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드렉셀 CEO 프레드 조셉의 동생인 스티븐 조셉과 함께 최초로 모기지 증권을 사모로 발행했다. 그들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를 설득하여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주택 대출을 채권(bond) 형태로 판매하도록 했다. 그리고 보험회사 등 기관투자자들에게 새로운 모기지 증권을 사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되면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원래 주택 소유주에게 해준 대출금을 받아서 새로 대출해줄 수 있었다. 주택 소유주는 계속해서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모기지 원리금을 지불했지만, 그 돈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채권을 매입한 살로몬 브라더스 고객에게 지급되었다.

 

달은 이것이 미래의 물결(the wave of the future)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주택 수요의 증가가 자금 조달 가능액을 초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구는 고령화되고 있었고 자기집을 소유하는 미국인의 수는 줄어들었다. 국가는 더 부유해졌고 더 많은 사람이 세컨드 하우스를 구입하기를 원했다. 저축대부조합(S&L)은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만큼 빠르게 성장할 수 없었다. 또한 러스트벨트(과거 공업이 발달했던 인구감소 지역)에서 선벨트(기후가 온화한 인구증가 지역)로 사람들이 꾸준히 이동하면서 자금수급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선벨트의 S&L들은 예금은 적고 주택 구매자들의 자금 수요는 많았다. 러스트벨트에 있는 S&L들은 수요가 없는 막대한 예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달은 해결책을 찾았다. 러스트벨트의 S&L들이 선벨트 S&L들의 모기지 증권을 매입해 선벨트 주택 소유주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출을 해주는 것이었다.

 

살로몬 브라더스 경영진의 요청에 따라 달은 모기지 증권시장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요약한 3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작성했다. 그리고 굿프로인드 회장에게 국채 거래 부서에서 지니매이(GNMA) 채권거래를 없애는 대신 모기지 증권부서를 설립하도록 설득했다. 1978년 봄 굿프로인드가 회사 창립자 3인 중 한 명의 아들이었던 윌리엄 살로몬에 의해 이 회사의 회장으로 지명된 때였다. 달은 돈이 되는 국채 거래를 그만두고 예전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로 옮겨 앉아 몇 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그리 했던 것처럼 은행 및 S&L과 협상을 벌여 그들의 대출채권을 팔도록 설득할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대출채권을 모기지 증권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스티브 조셉을 택했다. 조셉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거래에서 달과 호흡을 맞춰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 일을 맡을 적임자였다.

 

달은 또한 조셉이 만든 모기지 증권을 가지고 시장을 조성할 트레이더가 필요했는데, 이것은 더 큰 문제였다. 트레이더는 정말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트레이더는 채권을 사고 파는 일을 하지만 유능한 트레이더는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주었고, 그의 존재만으로도 시장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트레이더는 살로몬 브라더스에게도 돈을 벌어주었다. 이 때문에 트레이더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지켜보고,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달은 언제나 모기지 증권 트레이더였다. 이제 그는 관리자가 되었다. 그는 회사채나 국채 트레이딩 데스크에서 검증된 능력자를 데려와야 했다. 이것은 큰 문제였다. 살로몬에서는 어느 부서에서 사람을 내보낼 때는 그 부서가 그를 내보내고 싶은 좋은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다른 부서에서 사람을 데려오려면 아무도 원치 않는 사람만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굿프로인드 회장이 힘을 써줘서 달은 그가 첫 번째로 점찍었던 루이 라니에리를 데려올 수 있었다. 라니에리는 서른 살 먹은 유틸리티 채권 트레이더였다(유틸리티 채권 트레이더는 내야수처럼 1번 타자가 부상 당했을 때 대타로 출전하는 트레이더가 아니다. 루이지애나 전력회사 같은 공공 유틸리티의 채권을 거래하는 트레이더이다). 라니에리가 모기지 부서로 자리를 옮긴 것은 채권 트레이더의 황금기를 맞이하려던 참이었다. 1978년 중반 그가 부임하면서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전설처럼 전해오는 모기지 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pp.88-90)

 

 

MBS는 모기지 대출채권에서 나오는 원금과 이자 등 현금흐름을 기초로 발행되는 증권이다. 말하자면 모기지 원리금이 MBS 투자금을 회수하는 담보가 되는 것이므로 '-backed' 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기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확보되는 자산은 그게 무엇이든지 현금흐름을 담보로 증권을 발행(securitization)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증권을 자산담보부 증권(asset-backed securities: ABS)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자산보유자(originator)가 파산을 할 경우에는 증권 투자자가 자금을 회수하기 곤란하므로 파산으로부터 절연(bankruptcy remote)시키기 위해 특수목적기구(special purpose vehicle: SPV)를 설립하게 된다.[3] 이때 자산보유자가 SPV에게 유동화 대상 자산을 확실하게 양도(true sale)함으로써 파산가능성에서 멀어졌다는 변호사의 법률의견서를 받아놓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이러한 자금조달 방식을 구조화금융(structured financing)이라 일컫는다.[4]

 

Liar's Poker에서는 1980년대 전반 미국 사회의 변혁기에 살로몬 브라더스가 모기지 증권 시장을 석권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를 꼽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채거래 전문 트레이더의 아이디어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채택하고, 그가 원하는 유능한 인력을 그의 휘하에 배속시킴으로써 유기적인 팀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했다. 좋은 금융상품을 만들기만 하면 소용없고 이것을 잠재적인 수요처를 발굴하여 그들에게 판매하는 마케팅이 그 못지 않게 중요함을 경영진과 실무자 모두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달은 라니에리를 택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유능한 트레이더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라니에리는 단순한 트레이더가 아니라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신력과 의지가 있었어요. 그는 강인한 사람이었지요. 필요하다면 관리자에게 백만 달러의 손실을 숨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았습니다. 그는 도덕성(morality)에 얽매이지 않았어요. 도덕성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지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저는 교육을 받았든 못 받았든 그보다 더 빠른 정신(quicker mind)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몽상가였습니다.”

 

굿프로인드 회장이 라니에리에게 달이 관리자로 있는 아직 걸음마 단계의 모기지 담보증권부의 수석 트레이더로 발령을 낸다고 했을 때 라니에리는 당황했다. “저는 회사채 부서에서 가장 인기 많은 인재였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납득할 수 없어요."

그가 떠남으로써 그는 경쟁에서 밀려난 것처럼 보였다. 유틸리티 채권은 큰 돈을 벌고 있었다. 커미션을 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매년 연말이면 돈뭉치를 가리키며 “저거 다 내 거야, 내가 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수익은 곧 권력을 의미했다. 루이가 보기에 연말에 모기지 부서에는 돈뭉치가 없을 게 명약관화했다. 더 이상 승진이나 승급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두려움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터무니없어 보인다. 6년 후인 1984년 라니에리는 사석에사 그해 모기지증권 거래 부서가 월스트리트의 다른 모든 사업부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주장하곤 했다. 그는 부서의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부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는 굿프로인드의 다음 자리인 살로몬 브라더스 부회장으로 내정되었다. 굿프로인드 회장은 라니에리를 후계자로 자주 언급했다. 하지만 라니에리로서는 1978년 당시에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처음 발령이 났을 때 그는 속았다고 느꼈다.  (p.90)

 

미국에서 내가 이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미국의 M&A시장을 쥐락펴락 하던 마이클 밀켄이 내부자 거래(insider trading)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정크본드 시장도 붕괴되었다. 그러자 여기에 과도한 투자를 했던 S&L들이 대거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부실화된 S&L 및 지방은행들을 정리하기 위해 정리신탁공사(Resolution Trust Corporation: RTC)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먹튀 논란을 일으킨 론스타는 부실화된 S&L이 가장 많았던 텍사스 주에서 RTC를 도와 자산관리, 구조조정을 전문으로 하는 사모 펀드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IMF 사태를 맞게 되었을 때 이러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나는 정부의 대책반에 실무자로서 참여하여 「자산유동화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5] 그리고 1999년 그 때의 실무자들과 함께 공저로 〈금융혁명 ABS〉(위의 사진)를 펴내게 되었다.

 

나아가 자산유동화와 프로젝트 금융이 SPV를 매개로 한 구조화 금융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두 가지를 결합한 금융방식을 제안하였고, 실제로 그 아이디어가 천안-논산 고속도로 건설에 활용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금융방식이 통일 후 북한의 인프라를 재건하는 데도 유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구조화금융이 통일시대에 유력한 금융방식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추가한 학위 논문을 제출하여 2000년 초 경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므로 내가 은행원에서 대학교수로 전직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발단은 Liar's Poker 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6]

 

Note

3] 특수목적기구(SPV)를 만들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을 구조화 금융(structured financing)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파산으로부터 절연(bankrupcty remote)하기 위한 목적으로 SPV(유동화 전문회사와 신탁)를 만드는 자산유동화(asset-backed securitization)와 사업주가 사업 실패 시 소구(遡求)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non- or limited recourse financing) 위해 독립된 사업주체로서 SPV를 설립하는 프로젝트 금융(project financing: PF) 두 가지가 있다. 넓게는 조세 절감 내지 회피를 목적으로 역외금융센터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드는 Tax leverage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4] 살로몬 브라더스가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MBS 시장을 조성하자 다른 금융회사들도 경쟁적으로 ABS 시장에 뛰어들었다. 1985년 스페리(Sperry)사의 리스료 수취권을 담보로 한 유동화증권(ABS) 발행 이후 미국의 유동화증권 공모발행 시장은 해마다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 중 신용카드 채권과 자동차관련 증권화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1995년에는 상당 부분이 신용카드 채권관련 증권화였다. 신용카드 채권은 자동차관련 채권을 포함하여 약 40%에 달했다.
국제적인 ABS 발행도 활발하여 1987년 멕시코의 국영전화회사(Telefonos de Mexico SA)가 미국의 장거리 전화회사로부터 받게 될 국제전화 정산료 채권을 담보로 유동화증권을 발행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5] 자산유동화법  입법작업 당시 내가 강력히 주장했던 것은 자산양도에 관한 서류는 반드시 CD같은 전자기록으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엄청난 분량의 자산양도 관련서류를 간편하게 제출하라는 것과 함께 자산양도 계약서 및 진정한 양도에 관한 법률의견서를 공개하라는 취지도 있었다. 그 결과 자산양도 계약서 등이 DART 전자공시를 통해 모두 공개됨에 따라 자산유동화에 있어서는 법률비용이 대폭 절감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6] 2018년 8월 경희대에서 정년 퇴직할 즈음 경희법학의 정년기념호(2018.6.30)에 "학자로서 정년을 맞는 소회"를 기고한 바 있다. 이때 자산유동화와 관련하여 정부의  입법 실무팀에 참여하였던 것이나 IMF 사태 이후 몇 차례의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강연을 다니고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은 의도적으로 제외하였다. 대부분의 성과가 교수로 전직하기 전 은행 재직 시에 이룩한 성과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