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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Great Expectations (위대한 유산)

Onepark 2021. 4. 24. 23:10

Great Expectations 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의 오리지널 타이틀이다.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기에 그 스토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주인공 Pip로 하여금 거창한 기대를 하게 만들었을까?

 

* 자코메티, `초원` (1950), 이건희 컬렉션

 

그림에 소질이 많은 시골 소년이 순수한 마음에서 탈옥한 죄수를 도와준다. 조실부모한 소년은 결혼한 누나 집에 얹혀 사는데 그 마을의 부잣집에 가서 심부름을 하며 밥벌이를 한다. 그 저택에는 사랑에 배신 당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꾀하는 부유한 독신녀가 혼자 살고 있다. 그곳에는 그녀의 분신처럼 훈육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등장하여 소년의 마음을 흔들지만 그는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 어느날 익명의 독지가가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함에 따라 소년은 런던에 가서 화가로서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 덕에 마침내 옛사랑도 되찾게 된다.

좀더 단순화하면 일상의 조그만 선행이 주인공이 영육간에 성장하면서 기대하지 않은 유산처럼 예상 밖의 큰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내용이다.

 

기업인으로서 크게 성공하여 거부(巨富)가 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종합상사의 무역 부문에서 비철금속(구리)을 취급하다가 체제전환 이후 경영난을 겪고 있던 카자흐스탄의 국영 구리회사 카자묵스의 위탁경영을 맡게 된다. 그 지역 지사장을 하다가 본사의 호출을 받은 그는 큰 수완을 발휘하여, 광산 채굴에서 제련, 구리 제품의 생산ㆍ판매에 이르기까지 부실 국영기업의 경영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 등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 증시에서의 기업공개(IPO)까지 성공시킴으로써 연봉과 보너스, 스톡옵션으로 초대형 대박을 터트렸다.[1] 그러나 다시는 한국에 일체 나타나지 않고 영주권이 있는 영국에 눌러 살면서 1조원대로 추산되는 막대한 재산을 오롯이 지켰다.

 

* 피카소, '도라마르의 초상'과 샤갈, '신랑신부의 꽃다발', 이건희 컬렉션

 

또 한 사람은 재벌가의 후계자[1]로서 일본 제품의 복제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세계 정상의 기업으로 만들었다. 그의 '세계 일류' 정신에 자극받아 여타 한국 제품들도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선친(호암 이병철)의 영향을 받아 예술품 컬렉션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갖고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미술품과 문화재를 다수 수집하였다. 그의 사후에 유족들은 국내 여러 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연고가 있는 작품들을 나누어 기증하기로 했다고 한다.[2]

그동안 소장품의 빈곤으로 발길이 뜸하였던 국내 미술관과 박물관에도 고인의 이름을 딴 홀이 다수 개장하게 되면 우리 같은 서민들도 고인 덕분에 평소 이름만 들었던 명작을 직접 보는, 기대치 않았던 안복(眼福)을 누리게 될 것 같다. 그뿐인가! 우리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브리티시 뮤지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찾아가듯이 세계 일류의 콜렉션을 감상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람객들이 몰려오게 될 것이다.[2]

 

필생의 수집품을 세상 사람들이 보러 오네
세계적인 예술품을 한 자리에서 보니 황홀
[본인은] 빈손으로 떠나도 온 국민에겐 위대한 유산

K.H. Lee’s lifelong collection of arts are on exhibit at public museums.
It’s fantastic to see World-class art works and antiques at public places.
Tho’ he left empty-handed, it must be Great Expectations to us all.

(* 국ㆍ영문 모두 17음절의 단시임)

 

초여름 같은 봄날의 오후에 아름다운 우리 시를 찾다가 미국의 병원에서 일했던 마종기 시인[3]의 시를 읽게 되었다. 금년 따라 꽃이 일찍 피고 져버려 "봄의 조기사망"을 슬퍼하는 나를 위로해주는 시였다. 일찍이 미국에 이민가서 병원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가까이서 접하면서 이것을 수많은 시(詩)로써 풀어내는 시인의 내공이 놀라웠다.

마침 Native Speaker인 전 서강대 영문학과 안선재 교수(Brother Anthony of Taize)가 번역해 놓은 것이 있어서 대역(對譯)으로 인용하였다.

 

 

바람의 말 - 마종기

The Wind Speaks  by Mah Chonggi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After we have all departed this life,
should my soul brush past your face
do not for one moment think
it’s just the wind that shakes the springtime branches.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I intend to plant a flowering tree today
in a scrap of shade on that land
where I encountered you,
then once that tree has grown and blossoms,
all the torments that we have known
will turn into petals and drift away.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Turning into petals, they drift away.
It may be too remote
and pointless a task 
but, after all, aren’t all the things we do down here
measured with so brief a yardstick?
As you sometimes pay heed to the blowing wind,
my gentle dear, never forget, no matter how weary,
the words of the wind from far, far away.

 

그저 가는 봄을 서러워하며 위로를 받는 시라고 여겼는데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사랑하는 이와 영원한 이별을 앞둔 사람이 그의 심정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둘이 만났던 땅 한 모서리에 꽃나무를 심고 꽃이 피고 그 꽃잎이 질 때 그들이 안고 살았던 모든 괴로움도 날아가버릴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그리고 피곤해질 때면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 즉 자기 영혼의 위로를 잊지 말라고 한다. 이처럼 절절한 사랑과 미안하고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 어디 있을까!

 

위 시는 아주 드물게 송재평 교수(Chae-Pyong Song)와 앤 라시드(Anne Rashid)가 번역한 것도 있으므로 안선재 교수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 비교해 보기로 한다.

 

The Word of the Wind

 

After all of us leave,
if my spirit passes by you,
don’t think even for a moment it is
the wind that sways the spring boughs.

Today I will plant a flower
on a corner of the shadow
where I got to know you;
when the flower grows to bloom,
all the distress that stemmed from our acquaintance
will turn into petals and fly away.

It will turn into petals and fly away.
Though it is unbearably distant
and futile,
how can we measure all the things in the world
with only a small ruler?
When every now and then you turn your ears toward where the wind blows,
my beloved, don’t forget even if you become tired
the word of the wind that comes from far away.

 

Note

1] 차용규와 이건희는 똑같이 삼성그룹에 속해 있었는데 삼성가의 후계구도와 관련된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함께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때 삼성물산은 위탁경영을 하면서 카자묵스의 지분도 일부 보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4년 카자묵스의 IPO를 통해 삼성물산이 막대한 차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 영국의 한 사모펀드(PEF Hermes)가 삼성물산 주식을 대거 매입하였다. 당시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으로 삼성물산을 지배하는 대주주가 후계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삼성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카자묵스의 지분을 삼성물산 알마티 지사장에서 카자묵스 CEO로 옮긴 차용규 씨에게 서둘러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삼성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차 씨가 삼성의 비자금을 관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기도 했다. 당시 삼성물산의 지분 5%를 사들이고 우선주 소각 등을 요구한 헤르메스 펀드는 그 후 삼성물산 주가조작 혐의로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으나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 이건희 컬렉션은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국보 30점과 보물 82점, 한국 근현대미술 2200여점, 서양 근현대미술 1300여점 등 2만1,693점이다. 그 규모나 가치, 종류에 있어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사이 톰블리, 알베르토 자코메티 대작 등 수백억원대 서양 근현대미술품 상당수가 포함돼 감정가 2조~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감정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이건희 회장 컬렉션은 세계 10대 미술관 소장품 못지 않다"고 평가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가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대지와 미술품을 기증한 미국 재벌 록펠러 가문에 버금가는 통큰 기부로 사회적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가는 상속세 때문에 초고가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매각할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이건희 회장 컬렉션을 국가문화유산으로 남기는 결단을 내린 것이.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국세물납제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기부한 만큼 상속세가 감면되는 것은 아니다. 생전에 고 이건희 회장은 "문화예술 보급사업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 국격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한다"는 지론을 갖고 삼성미술관 리움 등을 개관했다. 매일경제, "피카소 로댕 샤갈… 삼성가 '이건희 컬렉션' 기부 검토", 2021. 3. 3.

이건희 회장이 남긴 '위대한 유산' 중에서 용인 에버랜드 정문 앞의 스피드웨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모터스포츠의 불모지인 한국에 처음으로 서킷(자동차경주로)을 만들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자동차를 좋아해 100대 이상의 명품카를 보유한 자동차 매니아였고, 고령의 나이에도 서킷을 즐겼다고 한다. 용인 스피드웨이의 개장으로 국내 유명 레이싱팀 및 관련 업체 약 40여 개가 생겼으니, 이건희 회장이 국내 모터스포츠 산업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마종기(馬鍾基)는 한국 최초의 동화작가로서 일본에서 활동하던 마해송과 현대무용가 박외선의 사이에서 193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시절 시인 박두진 연세대 교수의 추천을 받아 1959년 현대문학에 시 '해부학교실'로 등단했다. 1963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한일협정 반대 서명을 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김수영 시인으로부터 "문단에 섞이지 말고, 문학에 의학을 잘 접목시켜 보라"는 조언을 듣고 평생 의학적 경험을 반영한 시를 썼다. 고문의 후유증을 겪은 그는 전역 후 미국으로 가서 진단방사선과 수련을 마치고 오하이오 주립대 의과대학 교수로서 생활을 하며 많은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세계는 귀소본능과 그리움을 주축으로 음악, 미술, 무용 등을 모티브로 하는 시가 많다. 그는 미국에서는 방사선과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시는 줄곧 한국어로 쓰는 두 가지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다. 2002년 의대교수를 은퇴한 후 현재는 한국을 오가며 주로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