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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UCLA 로스쿨 및 미국 사회 견문기 (2007)

Onepark 2024. 8. 27. 15:20

[주의] 아래 소개하는 미국 로스쿨 방문수학기는 본래 경희대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년 퇴직한지도 오래고 비록 17년 전의 기록일 망정 디지털 콘텐츠를 일원화한다는 취지에서 Tistory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므로 현 시점의 UCLA나 지역에 관한 정보로서는 부정확하고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2007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교수로서 처음 맞는 연구년(Sabbatical)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2001년에 1년간 미국 보스턴에서

방문교수를 지낸 인하대 윤진호 교수
미국의 대학 캠퍼스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면서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지식의 디즈니랜드"라고

말했다. 나도 UCLA 로스쿨 안팎으로 다니면서

지적 재충전 작업은 물론 미국 현지 사회를 탐구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윤진호 교수가 제안한

것처럼 에피소드 별로 요약하여 40편 이상 이곳에

올릴 작정이다. 내 스스로도 10여년 전 SMU에서

공부하던 때와 여러 모로 비교가 될 것 같다. (2007)

 

목     차

프롤로그
로스쿨 모의재판 경연대회
미국은 현대판 카스트 사회?
세 번만에 붙은 운전면허 시험
미국의 자동차문화
25년만의 재회: 이철수 심포지엄
UCLA 로푸키 교수의 명강의
우수교수 시상식의 주인공은 한국인 교수
Nobless Oblige: 말리부 게티 빌라
세계가 놀라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
로푸키 교수와의 인터뷰

의지의 한국인 석세스 스토리
어느 한국인의 비극적인 몰락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대학도 산다
익사이팅한 고속도로 자동차 여행
살아 움직이는 미국 사법제도
라스베가스를 석권한 태양의 서커스
동화 같은 성을 쌓은 랜돌프 허스트
통제불능의 헐리웃 연예인들
미국의 REAL ID 논란
로스쿨 졸업생 취업대책
CNN 현장보도의 기린아 앤더슨 쿠퍼
헐리웃 볼에서의 핑크 마티니 공연 관람
캘리포니아에서 활기를 띠는 줄기세포연구
미국에서도 화제인 한국인의 교육열풍
미국 로스쿨 졸업생들, 희망 끝 고생 시작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LA 지역
변모하는 미국 사회의 인종구성
유태인과 닮은 듯 닮지 않은 한국인
'잊게 해야 한다'는 프라이버시 특강
법학교수와 '학문의 자유' 논란
법학교수들의 지뢰밭 - e메일과 블로그
거침없이 빚을 지는 미국의 법대생들

LA의 또 다른 명물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여성지휘자의 LA 필이 연주한 교향곡 신세계
쉽고 감동적인 조엘 오스틴 설교
UCLA 로스쿨 제리 강 교수와의 대화
미국은 소비자들의 천국
부동산대출 부실로 한인교포 은행들 고전
롬니 전 주지사는 진짜 '경제대통령' 후보
헐리웃을 뒤덮은 작가조합의 스트라이크
미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미국의 대통령 경선
에필로그

 

프롤로그

교수들은 6년 가르치고 한 해 (또는 3년에 6개월) 쉴 수 있는 안식년(Sabbatical)이 있다. 이를테면 지적 재충전을 하라는 것으로 학문이란 가르치기만 하여서는 바닥이 날 수 있으니 쉬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고 안식년에 반드시 해외에 나가서 연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자기가 학위과정을 마친 학교의 은사를 찾아가서 새로운 학문의 경향과 자료를 배워오기도 하지만, 어떤 교수는 타 지역의 학교에 가서 교수연구활동을 하기도 한다.

나도 교수 7년차에 귀중한 연구년을 얻게 되었다. 우선 연구비 지원을 받기 위해 거창한 연구계획을 세워 LG 연암문화재단에 신청하였으나 나이가 45세를 넘었다고 거절 당했다. 50대의 학자는 연구를 못한다는 것인지... 그 대신 지원금은 많지 않아도(왕복 항공비 플러스 월 3백불. 나 다음 2007년 2학기부터는 월 6백불로 증액) 경희대학교에서 매 학기 2명씩 보내는 해외연구교수로 선정될 수 있었다.
방문교수(visiting scholar)로 갈 학교는 일찌감치 대학 1년생인 둘째의 어학연수를 위해 영어권 대학으로 결정은 하였으나 어느 지역의 학교로 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일찍이 뉴욕과 댈러스에서 살아보았으니 이번에는 서부지역으로 가고 싶었다.

우선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의 제인 윈(Jane Winn) 교수에게 연락을 취하였더니 'SMU에서 사제지간'이었다는 인연으로 반갑게 초청해주겠다고는 하였으나 8천불을 내라는 것이 적잖은 부담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전공과 관련이 있는 패컬티와 커리큘럼이 있는 로스쿨이어야 했다.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UBC)도 괜찮았지만, UCLA로 갈 수 있다면 LA에는 형님과 누님이 살고 계시므로 여러 가지 편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UCLA 로스쿨의 비지팅 스칼러 피는 5천불이었다. 요즘 미국 대학들은 서로 오려고 하는 방문학자들에게 도서관 등 시설 이용료 명목으로 연간 5천불에서 1만불이 넘는 금액을 요구하고 있다. 워싱턴 대학에 비해 3천불이 적다는 것은 둘째 아이의 한 학기(semester) 학비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4월 하순 UCLA 로스쿨에 학교에서 요구하는 신청서와 연구계획을 제출하고 호주의 그린리프 교수를 포함한 동료교수 세 분의 추천장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6월 중순쯤 되었을까 UCLA 로스쿨의 학장실(Dean's Office)에서 일한 적이 있는 조카(현재 샌디에고 Daton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박재균)로부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전갈이 왔다. 서류를 보내놓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고 답신을 보냈더니 즉각 회신이 왔다. 전에 같이 일했던 교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삼촌을 돌봐주겠다(sponsor)는 패컬티가 없어 보류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뿔싸! 나와 전공분야가 비슷한 복수의 교수에게 스폰서십을 요청하였는데 두 분이 모두 스폰서십을 서주질 않아 공중에 떠있는 모양이었다. 급히 담보법과 정보법을 담당하는 린 로푸키(Lynn LoPucki) 교수에게 부탁을 하여 그 다음날로 초청장을 받을 수 있었다. 6월 22일자였으니 학교가 방학중인 것을 고려하면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연말이 다가오는 2006년 11월 말부터 출국준비를 시작하였다. UCLA 로스쿨로부터 DS-2019 서류를 받아 인터넷으로 J-1 비자를 신청하고, 미국 대사관에서 영사와 짧막한 비자 인터뷰를 한 후 마침내 1월 18일 J-1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UCLA 어학원에 가서 어학연수를 받기로 한 둘째도 순조롭게 F-1 비자를 받았다. 교환교수 가족으로 신청할 수도 있었지만 나보다 더 오래 유학을 할 가능성도 있어 분리하여 신청하였다.
그리고 ACE 교환교수 보험을 구입하고 2월 말에 출국하는 것으로 항공권 예약을 마쳤다. ▲

 

로스쿨 모의재판 경연대회

3월 21일 오후 로스쿨 1층 모의법정에서 모의재판 최종 라운드(56th Roscoe Pound Tournament Finals Round)가 열렸다. 미국의 유명한 법사회학자 로스코 파운드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가 1949년 UCLA 로스쿨 설립 당시의 패컬티 멤버였기 때문이다. 2006년 가을학기부터 로스쿨의 모의재판(lawyering moot court) 과목에서 소장작성(brief)과 구두변론(oral argument)의 시합을 벌여 점수가 좋은 학생들이 토너먼트로 결승전까지 올라온 것이다.
2-3명은 여학생일 것이 아닐까 하는 내 예상과는 달리 결선 출전자들은 모두 남학생들이었다. 다들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재판부가 입장하기를 기다렸다. 방청석에서는 마침 점심시간인 까닭에 피자와 샌드위치를 들고 와서 먹는 학생들도 있었다.

사안을 살펴보니 그리 복잡한 내용은 아니었다.
첫 번째 사례는 공립고등학교 학생의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에 관한 문제였다. 시골의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이 방과 후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호텔재벌 2세 패리스 힐튼이 찾아오기로 한 광장으로 나갔다. 세 학생이 마침 TV 카메라가 비칠 때 재킷을 벗고 마약복용을 부추기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흔들었다. 학교 당국이 세 학생의 품행을 문제삼아 정학처분을 내리자 그 중 스타크라는 학생이 이는 수정헌법 제1조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소원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문제의 스타크 학생이 시내 중심가를 통과할 때 속도위반을 하자 경찰관이 정차를 명하였는데 그가 도주를 한 사건이었다. 8분여 동안 고속도로와 쇼핑몰 주차장에서 경찰의 추격이 벌어졌고 경찰차와 가벼운 접촉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이 건설공사장 안으로 과속으로 도주함에 따라 경찰차가 그 앞을 가로막아 겨우 정차시킬 수 있었다. 이 경우에 경찰이 매우 위험한 강제력(deadly force)을 행사하여 그의 도주를 막은 것이 과연 필요가 있었는지, 과잉조치가 아니었는지 하는 것이 문제였다.

12시 15분 정각 3인의 법관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입정하였다. 모두 일어선 가운데 제6 항소법원의 보그스(Danny J. Boggs) 판사, 제10 항소법원의 맥코넬(Michael W. McConnell) 판사, 중부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의 프리거슨(Dean D. Pregerson) 판사가 착석하면서 경연이 시작되었다.
변호사가 "May it please the court?"로 진술을 시작하고, 말끝마다 "Your Honor"를 붙이는 것만으로 법관의 권위가 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풍부한 법률지식을 가지고 헌법과 법률, 그리고 사회균형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할 때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원고측 변호사(Petitioner)가 변론을 시작하자마자 법관들이 토론을 하듯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간혹 학생들이 쩔쩔 매는 예리한 질문도 있었다. 보그스 재판장 외에는 농담도 하지 않고 두 배석판사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잇달아 질문을 던졌다. 예컨대 두 번째 이슈에서 "고속도로에서 시속 75마일로 달렸다면 어떻게 되느냐",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건축현장은 공로(public road)가 아니지 않으냐" 는 등의 질문을 하였다.

15분 동안에 재판부의 질문을 소화하면서 자기 의뢰인에게 필요한 진술을 얼마나 요령있고 설득력 있게 하느냐가 포인트인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리를 맡은 여학생이 10분, 5분, 2분, 1분이 남았다는 카드를 계속 들어 보였다. 마침내 제한시간 15분이 지난 다음에는 스톱 사인을 보냈다. 피고측 변호사(Respondent)가 같은 요령으로 15분 동안 토론과 진술을 마쳤다. 그리고 원고측 변호사가 다시 나와 3분간 보충 진술을 하였다.
두 번째 케이스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1시 25분이 되었다. 잠시 휴정한 후 선고공판과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로푸키 교수의 강의에 참석하여야 했으므로 결론은 보지 못한 채 다른 학생들과 함께 모의법정을 빠져 나왔다. ▲

 

미국은 현대판 카스트 사회?

전에도 여러 차례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있지만 요즘은 "이 사회에 적응하고 살려면 무슨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가"하는 관점에서 미국을 관찰하고 있다. 전에 은행 주재원이나 유학생으로 와서 살 때에는 잠시 살다가 갈 곳이라는 생각이 앞섰는데, 지금은 은퇴(retirement)한 후에는 이곳에 와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나이 탓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헐리웃과 가까운 만큼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무슨 시나리오를 갖고 누구를 캐스팅할 것인가, 제작진과 자본주는 어떻게 구성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경우 누구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지 분명해진다. 내가 맡을 역할도 거의 정해져 있을 것 같다. 일단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배역에 거의 변동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는 여러 인종,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의 부품(mechanical parts)처럼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V에서 보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은 일찍부터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거나 치열한 선발절차(screening procedure)를 거친 끝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맨들도 자신의 운동기량을 바탕으로 뛰어난 실적을 올리게 되면 많은 수입과 인기를 얻게 된다. 성공한 스포츠맨들은 특히 흑인의 경우 가족 친지들까지 선수의 매니저로 관여하는 등 잘 살게 된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으로 공평하게 그러한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별 불만이 없다고 한다. 성공을 못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그에 못 미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는 멕시코인들이 땀 흘려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9.11 사건 후에는 이민요건이 강화되어 불법체류자의 경우 임금착취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마치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미국에 부활한 것 같다.
얼마 전 먼지 때가 묻은 차를 세차하러 라브레아 거리의 한 세차장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는 수많은 멕시코인 종업원들이 손님들의 차를 손세차(hand wash) 해주고 있었다. 손세차에 특별한 기량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종업원들은 아는 사람의 소개로 들어와 자기에게 할당된 작업을 하고 일당과 손님이 주는 팁으로 생활하는 것 같았다. 이날 나는 세차비 10.99불, 세금 2불, 팁 2불 도합 15불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자동세차가 일반화되었는데 "인건비가 비싸다는 미국에서 손세차를 하다니…"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저임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한 이에 의존하는 업종도 장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서 생활할 때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고 하였다. LA 같은 대도시는 집세가 워낙 비싸고(투 베드룸의 경우 월 15백불 이상)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 유지관리비도 많이 들어 온 가족이 한두 가지 일자리를 갖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울 정도라 한다. 특히 멕시코 사람들은 가족애가 강하여 고향집에 송금도 많이 한다는데, 이처럼 벌어서 그대로 먹고살기만(from hand to mouth) 해서는 향상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 동안 내가 만났던 많은 한인 교포들은 우러러 보였다. 물론 제1 세대는 처음 이민 와서 지금의 멕시코 사람들처럼 밑바닥에서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자녀들을 열심히 가르쳐 그들이 자기 몫을 할 나이가 되어(미국에서는 18세가 되면 성년으로 취급되며,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자금융자(student loan)를 받아 학비를 조달하는 등 사실상 자립을 한다고 한다) 은퇴를 할 즈음에는 어느 정도 재산도 형성하고 유족하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근검생활을 통한 저축과 열성적인 자녀교육이야말로 미국 사회에서 수직으로 신분상승은 못 하더라도 건전한 중산층을 구성하는 한국인들의 저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

 

세 번만에 붙은 운전면허 시험

미국은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이다. LA에서 처음 집을 마련할 때 학교 가까운 곳에서 도보로 다니든가, 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장거리 여행은 고사하고 우유와 생수, 과일 등 무거운 먹거리 장을 보는 데에도 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對民접촉이 제일 많은 관공서는 자동차등록국(Department of Motor Vehicles: DMV)이다. 운전면허를 신청하거나 자동차를 등록·양도하는 것은 물론 사진 붙은 신분증(ID)을 만들 때에도 DMV를 찾는다. 미국에서는 교통사고($500 이상의 재산손해 또는 인명사고)가 나면 경찰서가 아니라 DMV에 신고하여야 한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무슨 차를 몰고 다닐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캘리포니아주의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물론 서울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왔으나 이것은 2개월만 유효하다고 했다. 캘리포니아주에 2개월 이상 체류하는 사람은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지고도 현지 운전면허증이 없으면 '무면허 운전' 벌칙을 적용받는다고 했다(DMV 담당자의 말).
다행히 필기시험은 예상문제 중에서만 출제가 되고 한국어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교통규칙과 도로표지에 관한 총 45개 문항 중에서 7개 이내로 틀리면 합격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치른 도로주행시험은 만만치 않았다. 나의 경우 운전경력이 통산 20년 이상이고, 유럽과 뉴욕, 뉴저지, 텍사스에서 각각 운전을 한 경험도 있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불합격한 끝에 세 번째 도전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시험관(examiner)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교통신호등 앞에서 과감하게 운전을 하고, 횡단보도와 주차장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양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너무 조심스럽게 운전하다가 규정속도에 미달하였다는 이유로 또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에서 굳어진 나쁜 운전습관 때문이었다. 서울의 도로에서는 행인보다 차가 우선이고, 운행 중에 차선을 바꾸는 것은 내 멋 대로이고, 내가 먼저 양보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습관화 된 탓이었다.
게다가 명색이 법과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지켜야 할 운전관행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첫째는 자동차 문화의 차이이다. 미국의 거리에는 사람은 별로 없고 차만 다닌다. 대부분의 주택이 차고 또는 주차공간을 끼고 있으므로 작은 도로가 많고 신호등 없이도 좌회전을 할 수 있다. 그래서 LA 지역에서는 파란불이 끝나고 노란불이 들어올 때 두 대 정도가 좌회전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큰 교차로에서는 파란 화살표의 좌회전 신호등이 가동된다.
둘째는 철저한 인명존중 사상이다. 특히 횡단보도나 주차장에서는 행인이 절대 우선이다. 내가 첫 번째 주행시험은 제대로 마쳤음에도 마지막 코스인 주차장에서 사람들을 밀치듯이 차를 몬 것이 결정적인 패착(fatal mistake)이었다. 그 후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횡단보도에 사람이 서 있는 한 횡단보도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이네들의 운전관행이었다.
셋째는 매우 투철한 권리의식이었다. 예컨대 우선멈춤(Stop) 사인에서는 3초간 정지하여야 한다. 4곳에 스톱 사인이 있는 교차로(4-way Stop)에서는 정지선에 먼저 접근한 차량이 통행의 우선권(right of way)을 갖는다. 자기의 순서를 지키지 않고 양보하는 것은 사고의 위험을 초래한다.

그러나 고속도로든 시내도로든 끼어 들기 위해 깜박이를 켜면 열 중의 아홉 운전자는 양보를 해주었다. 그 다음에 잠깐 양보했던 시간과 거리를 만회할 수 있기 때문에 양보를 하는 것은 사고위험을 방지할 수도 있고 결코 손해보는 일은 아니었다. ▲

 

미국의 자동차문화

땅덩이가 넓은 미국은 자동차와 철도 위에 건설된 나라라 할 수 있다. 물론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에는 말과 마차가 그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자동차 없는 미국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우리 아들 이야기가 UCLA 어학원에서도 차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행동반경이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없었다고 했다.
미국인들은 자동차를 타고 햄버거를 사 먹고, 영화도 보고 은행거래를 한다.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쇼핑몰(outlets)은 도심지에 있지 않고 자동차로 한두 시간씩 달려가야 하는 한적한 교외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도시는 자동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LA의 경우만 해도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항공·석유산업이 발전하자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이 때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미국의 중산층이 선망하는 차고와 정원이 딸린 주택을 인기리에 건설,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캘리포니아 란초(rancho)" 스타일이라고 불렀는데 그 도로망은 반드시 고속도로 접근성이 좋아야 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가 2차 대전 당시 유럽총사령관으로서 가 보았던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을 모방한, 신호등 없이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Interstate Highway)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LA에는 남북으로 5번과 15번, 동서로는 10번 고속도로가 시발하거나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자동차문화를 전에 플로리다 디즈니월드의 에프콧(EPCOT) 센터에서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LA는 그 이상 가는, 전시물이 다채롭고 내용도 알찬 자동차 박물관을 자랑하고 있다. 헐리우드 아래 윌셔와 페어팩스 교차지점에 있는 피터슨 자동차 박물관(Petersen Automotive Museum)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는 3층에 걸쳐 미국 자동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온갖 자동차(오토바이 포함)와 주유소, 매점, 정비소를 전시, 재현해 놓고 있었다. 1940년대에 미국 대통령이 탔던 방탄승용차도 볼 수 있었다. 미래의 방에는 하이브리드 카와 새로운 유형의 콘셉카들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평생동안 집념을 갖고 콜렉션해 놓은 것도 대단하였지만, 평일임에도 적잖은 수의 미국인들이 진지하게 전시물을 둘러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미국인들은 자동차를 자기 가족구성원처럼 여기고, 차고 안에서 어지간한 자동차 정비와 수리는 손수 한다고 한다.

나도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땄겠다 이제 미국 생활의 일부분으로 즐겁게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미국자동차협회(AAA)에 회원으로 가입(연회비 $67)하여 나에게 필요한 상세 지도와 여행 가이드북을 무제한으로 제공받고, 필요하면 상담도 요청하기로 했다. AAA TourBook은 미국생활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데, 누구나 그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운전할 때에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다른 운전자에게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도로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또한 늘 다니는 곳에는 랜드마크를 설정해두는 즐거움도 갖기로 했다. 거리이름을 확인하지 않고도 주변의 지형지물이나 가로수 모습을 보고 좌회전 또는 우회전을 하여 자기가 들어갈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높은 건물 위에 삼성 입간판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윌셔 그레이스 한인교회가 있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다. ▲

 

25년만의 재회: 이철수 심포지엄

4월 7일 부활절 전날인 토요일 오후 UCLA 로스쿨에서는 매우 뜻깊은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형수로서 교도소에서 10년간 복역했던 이철수 씨가 한인 교포들을 비롯한 아시아 아메리칸들의 시민운동(Pan Asian American League)에 힘입어 25년 전에 석방된 것을 기념하여 이경원 리더십센터가 UCLA 인종문제연구소(Critical Race Study: CRS)와 공동으로 학술행사(Justice on Trial: The Battle to Free Chol Soo Lee)를 개최한 것이다.
바깥 날씨는 연일 꾸무럭하였지만 주말의 로스쿨 구내는 많은 참석자들로 활기를 띠었다. 당사자인 이철수 씨를 비롯하여 행사의 주관자인 이경원 노기자, 서울에서 온 유재건 의원도 보였다. 미주 중앙일보, KTAN 같은 교포언론도 취재에 열을 올렸다.

이날 행사는 TV 프로듀서인 중국계 산드라 긴 여사가 디지털로 새로 제작한 다큐필름을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73년 6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백주 대로상에서 중국계 갱단 간부가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며칠 후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아시아계 젊은 남자 여럿이 용의자로 체포되어 서스펙트 라인업에 섰다. 이 때 인상착의가 범인과 비슷하다고 목격자의 지목을 받은 21세의 이철수가 살인범으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wrongful conviction) 받았다. 그에 대한 재판은 그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검찰에 의하여 묵살된 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황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철수는 12살 때 국제결혼을 한 홀어머니를 찾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나 뱁새 눈에 말도 통하지 않고 하는 짓마다 눈 밖에 나는 비행 청소년이 되어 소년원을 안방 드나들 듯하였던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수 없으면 충분히 양해가 될 수 있는 상황도 비행을 저지른 것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그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악의 길을 달려가는 것으로 오해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니 콧수염까지 기른 불량청년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고, 시 당국이나 재판부에서도 중국 갱단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짓고 차이나타운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1977년 10월 교도소 안에서 다른 백인 갱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정당방위로 그를 살해한 것까지 유죄로 인정받아 그는 꼼짝없이 사형수가 되었다. 이 때 재판이 벌어진 새크라멘토(캘리포니아의 州都)에서 유니언지의 기자로 활약하던 이경원 기자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불우한 한국 청년이 미국에서 희생되는구나" 생각하고 이미 4년도 넘은 사건을 파헤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경원 기자가 옥중에서 만나 본 이철수는 불우하기는 했지만 선량한 청년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벗겨줘야겠다고 마음먹고 관련인사들을 찾아다니는 한편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뒤졌다. 그리고 재판의 허점을 찾아내 1978년 1월 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의 1면 톱 기사로 "이철수에 대한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유죄판결은 잘못되었다"고 보도했다.

서양사람들이 보기에 동양사람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키도 작은 이철수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부당하고, 무엇보다도 중국말도 못하는 그가 갱단의 행동대원이 되었을 리 만무하며 이에 관한 유력한 증거들이 재판 과정에서 일체 묵살되었음을 폭로하였다. 그가 100차례도 넘게 탐사보도를 한 영향으로 한인사회는 물론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도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마침내 1978년 11월 이 사건의 결정적 증인이 "이철수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증언을 번복하면서 그에 대한 재심이 결정되었다. 1982년 9월 샌프란시스코 법원에서 열린 재심판결에서 배심원들은 전원일치로 이철수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1983년 1월 캘리포니아주 고등법원은 이철수 사형선고 판결을 무효화하였고, 이어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에서도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동안 숨죽이며 살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모처럼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도 이경원 기자의 사명감 넘치는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가 시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양심들도 불량기 있는 동양청년을 미국 사법제도의 수레바퀴에 제물로 바칠 수 없다며 구명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철학교수 자리를 내던지고 사립탐정이 되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력했던 조시아 "팅크" 톰슨, 그의 1심 변론에 매달렸던 레오나드 웨인글라스 변호사와, 재심 변호사였던 스튜어트 핸론 변호사, 그리고 재심 때 이철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배심원회의에서 그에게 유리한 평결을 이끌어냈던 스콧 존슨 씨는 그를 살린 보통시민 영웅들이었다.

그 모든 사람이 25년이 흐른 후 UCLA의 한 강의실에 모인 것이다. 이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보기에도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세월은 과거의 상처를 아물게도 하고, 그 때 그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다큐에도 등장하였던 더벅머리 핸론 변호사는 머리숱이 거의 없는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 '삶의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이철수 변호인단의 일원이자 후원회 회장을 맡았던 유재건 변호사는 한국에 돌아와 교수, 방송인, 국회의원이 되었고, 민완 탐정이었던 팅크 톰슨은 지금도 여전히 소수인종의 용의자가 갱단관련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는 사건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창 이름을 날리던 웨인글라스 변호사와 핸론 변호사도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모습이었다. 스콧 존슨 씨는 그의 겸손하고 너그러운 품성만큼이나 여유있게 나이 들어 보였다.
풍채 좋던 이경원 기자가 바짝 마른 할아버지가 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이 사건의 주인공은 그 후에 험한 풍파를 잇달아 겪었는지 사진과는 전혀 딴 판인 모습(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은 흔적)이 되어 있었다. ▲

 

로푸키 교수의 명강의

요즘 한국의 법대교수가 미국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려면 돈을 싸들고 가야 한다. Visiting Scholar Fee는 재정확보에 부심하고 있는 미국 로스쿨들이 도서관 출입증과 캐럴을 마련해 주고 패컬티 콜러퀴엄이나 관심있는 수업을 청강하는 데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동부의 명문교는 1만불이 넘었다고 하며 서부의 유명 대학들도 몇 천불씩 내야 한다. 방문교수가 강의를 하면 할인혜택이 있다. 미국의 장기체류 비자 얻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DS-2019 서류를 받아 가족들까지 J1/J2 비자를 얻으려면 그 정도의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 처음 도서관 출입증과 개인용 좌석(carrel)을 배정받고 나서 어떻게 해서든지 본전을 뽑아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였다. 내 경우 판례집과 논문집으로 둘러싸인 로 라이브러리에 앉아 책을 보거나, 나를 초청해준 로푸키(Lynn M. LoPucki) 교수의 상법(담보거래법) 강의를 들으면서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푸키 교수의 강의는 2006년 가을 학기에 하버드 로스쿨에서 강의를 들었던 서울중앙지법의 문유석 판사가 국내에 소개를 한 바 있지만, 로푸키 교수는 학생들보다 먼저 수업시간 시작 5분전에 입실한다. 그의 저서(Aspen출판사 간 Secured Credit)가 교재임에도 파워포인트로 강의를 하므로 이리저리 전선을 연결하고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켠 다음 강의할 대목을 찾는 데 4-5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같은 교수임에도 나는 어쭙잖게 "Academic Fifteen"(과거 독일에서 대학강의를 15분 늦게 시작하던 전통) 운운하며 5분쯤 늦게 수업을 시작하였던 게 부끄러웠다.

로푸키 교수는 강의시간 중에 농담이나 허튼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출석도 따로 부르지 않고 좌석배치도에 각자 출석 표시를 한 후 제출하도록 했다. 수업이 시종 딱딱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스피디하게 이루어지므로 예습을 하지 않고 들어가면 도저히 강의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학기초 실러버스에 기재된 대로 거의 정확하게 진도가 나갔다. 이곳 로스쿨은 학비가 비싸기 때문인지 한국에서처럼 종료시간보다 일찍 끝내거나 휴강을 하면 교수가 학생들에게 그만큼 등록금을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로푸키 교수의 타이틀에는 "시큐리티 퍼시픽 은행"이 붙는다. 그의 전공분야가 도산법, 담보법, 정보법인 만큼 이 은행에서 연구비를 지원하는 석좌교수라는 의미이다. 로푸키 교수는 개인적으로 1980년대 이후 700개가 넘는 도산법 사례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학자는 물론 실무가와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하고 있었다. "그 엄청난 작업을 어떻게 하셨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혼자 하지요"라는 우문현답을 들었을 뿐이다.

내가 UCLA 로스쿨에 올 때 로푸키 교수의 초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와 논문을 토대로 나의 관심사항을 깊이있게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동산담보를 전자등기하는 문제라든가, 우리나라 도산법제의 개선방안을 모색함에 있어 그 이상 가는 전문가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팀 프로덕션으로서의 도산절차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이론(Creditors' Bargain Theory v. Team Production Theory)이었음에도 하이닉스, 외환은행과 같은 우리나라의 구조조정 대상기업들의 생존전략을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이론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바로 연구년을 보내는 교수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논문을 한 편 쓸 수 있는 귀중한 자료와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 몹시 기뻤다.
In the English version

 

우수교수 시상식의 주인공은 한국인 교수

학기도 중반을 넘어선 4월 19일 로스쿨에서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단순히 상을 주고받고 기념사진을 찍고 끝내는 게 아니라 우수교수법 수상자가 직접 자신의 교수법을 공개한다고 했다.
금년도 수상자는 바로 한국계인 제리 강(Jerry Kang) 교수였다. 방문교수들(visiting scholars)에게는 미처 통보가 없었지만, LL.M. 과정에 유학 중인 한국 변호사가 알려주어 대구지검의 여환섭 부부장검사와 함께 참석하였다.
UCLA 패컬티는 대부분 하버드, 예일 출신인데, 제리 강 교수는 그 중에서도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수재급 교수로 꼽힌다. 재학 중에는 우등생들만 할 수 있다는 하버드 로 저널의 선임편집자(supervising editor)를 했고 제9지구 고등법원 판사의 재판연구원(clerk)을 역임하였다. UCLA 로스쿨에서는 민사소송법과 아시아-아메리칸법, 통신법을 담당하고, 사이버법(cyberlaw), 소수민족인권법(Critical Race Study)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통신법과 정책(Communications Law & Policy): 케이스 교재](2005)가 있다.

1430 강의실에는 강 교수의 부인과 어린 딸, 학장을 비롯한 많은 동료교수들과 교직원, 학생들이 강 교수를 축하하러 나와 있었으며, 강 교수와 함께 무예를 단련하는 화랑도의 이태준 사범도 앞자리를 빛내주었다.
이날 시상식은 UCLA 로스쿨 쉴 학장(Dean Michael Schill)의 소개말로 시작되었다. 강 교수는 지적이고 나무와 숲을 함께 보는 우리의 모델이 되는 교수(model professor)로서 항상 미소짓는 얼굴, 열정에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부상은 법학도들이 늘 참고하는 길벗 아웃라인과 웨스트로 데이터베이스를 경영하는 러터(William Rutter) 씨가 제공하므로 이를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참석자들을 웃겼다.
교수법이 탁월(excellence in teaching)하다고 강 교수를 표창하는 이유는 그의 강의방법(teaching manner)이 정력적(energetic)이고 변덕스러운 유머(quirky humor)로 가득차 있으며 열정(enthusiasm)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강의내용이 매우 잘 조직화(very well organized)되어 있으며 교수와 학생들이 지적이고(very intelligent) 스마트(friggin' smart)한 수업분위기를 만든다고 말했다.

러터 상(Rutter Award)을 받은 후에 등단한 강 교수는 자신의 교수법(pedagogic method)의 요체와 실제 사례를 직접 시연해 보였다. 그는 멀티미디어, 도표를 이용한 강의안을 마련하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쉴 새 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 원하는 답변을 이끌어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시각적인 강의기법(visual presentation)을 즐겨 쓰지만 이러한 기술을 만병통치약(panacea)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왕년의 인기 드라마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Paper Chaser)에 나오는 한 장면을 보여주고, 킹스필드 교수처럼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고 또 질문을 하는 문답식 수업을 하지만, 이상한 질문으로 학생들을 괴롭히거나(curry favor, harass students) 교수가 더 스마트하다는 것을 과시하지는 않는다 했다. 강 교수는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공부하고 로여로서의 자질을 연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변호사란 생각이 기민해야 하고(think fast)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하며(communicating clearly) 핵심사항을 잘 설명하여야(answering objects)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화랑도 수련자로서 법학공부와 무예단련의 공통점(analogy)을 설명하기도 했다. 예컨대 전투(combat)하듯이 한다는 것, 능동적으로 공부(active learning)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아의 문제(problem of ego), 기술과 덕목(technique and virtue)을 중시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했다. 실제로 민사소송절차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 중에 학생들과 교감(empathy)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며, 지적인(intellectual)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emotional)인 교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며 재미있게(make fun) 수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학생들과 그들의 말을 존중함(taking you and your words seriously)으로써 학생들로부터 정직하게 존경(respect and honesty)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강 교수는 교수와 학생 사이의 간극(chasm)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학생이 원하는 것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What you want is not what you need.)는 말도 했다. 배움이라는 것은 투쟁을 요하지만(Learning requires struggle) 교수를 먼저 탓하여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버지니아테크 총격사고 때 제자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다 유명을 달리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리비우 리브레스쿠(Liviu Librescu) 노교수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의 인생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공부하고, 교직이 성스러운 책임인 것처럼 가르치자"(Learn as if your life depends on it. Teach as if it is a sacred responsibility.)며 끝을 맺었다.

나도 같은 법학교수이지만 머리를 써서 이렇게 강의안을 준비하고 학생들과 교감을 나누는 강의를 하였던가 자문하게 되었다. 법전을 펼쳐보라고만 하였지, 찾는 데 몇 분, 읽는 데 몇 분씩 시간을 허비하는지 개의치 않았었다. 앞으로는 강의안도 멀티미디어 교재로 새로 준비하고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야 함을 제리 강 교수는 몸소 보여주었다. ▲

 

Nobless Oblige: 말리부의 게티 빌라

4월 27일 2주 전에 예약을 하고 산타모니카에서 태평양해변도로(PCH: Pacific Coast Highway)를 거쳐 찾아간 게티 빌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 도처에 있는 옛날 부자들의 맨션, 미술관하고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뉴포트의 맨션은 규모나 장식 면에서 이를 능가하고, 어느 박물관에 가든지 고대 로마의 조각과 유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람객들을 안내하는 할머니 자원봉사자로부터 가이드북에도 없는 설명을 듣고 나서는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티 빌라는 1997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쳤는데 게티뮤지엄과 마찬가지로 입장료는 무료인 대신 주차료만 8달러를 받는 점이 이색적이다. 빌라는 뮤지엄과 달리 인터넷 예약을 요하는데 날짜와 시간대를 지정함으로써 적절한 관람인원을 통제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2시에 예약을 하고 1시 20분에 찾아가도 입장을 시켜주었다.]

첫째는 그가 예술품을 수집하고 빌라를 짓게 된 경위였다.
게티의 아버지(George F. Getty)는 미네소타의 보험전문 변호사였는데 그의 고객이 1,500불의 변호사비용을 내지 않고 남부의 인디안구역으로 도망가자 그를 쫓아갔다. 결국 그곳(1907년에 46번째 주인 오클라호마로 승격)의 황무지를 대신 넘겨받았는데 그 땅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영화 "자이언트"의 줄거리와 비슷하지만 "하늘이 낸 부자는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아니라 돈을 줍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1904년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오클라호마로 이주하였다. 첫딸을 장티푸스로 잃은 후 1892년 뒤늦게 얻은 아들 쟝 폴 게티(J. Paul Getty)는 애지중지 키우는 대신 아버지 석유회사에서 일당을 받고 밑바닥부터 일하도록 단련을 시켰다. 게티는 21살 때 아버지로부터 자금을 빌려 유정을 사들였는데 2년만에 1백만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부친은 게티가 여자나 밝히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며(실제로 다섯 번 결혼) 가업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게티는 그 특유의 기업가정신(Millionaire Mentality)으로 부친의 몇 배 가는 부를 축적하였으며, 노년에도 아랍산유국 왕족들과 친해지기 위해 친히 아랍어를 배웠다고 한다.

1930년대에 시작한 예술품 콜렉션도 아버지의 예상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전성기에 "석유왕", "세계 최대의 부자" 소리를 들었던 만큼 안목이나 규모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게티는 말년에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1976년 그의 사후에 유산을 신탁하여 재단을 설립하였다.
현재 게티재단은 말리부의 랜치 옆에 로마풍의 빌라를 건축하였고, LA에는 미술관인 게티 센터를 새로 건립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말리부 해안절벽(Malibu Palisades) 위의 랜치에 세워진 게티 빌라는 고대 로마 유물의 전시와 로마양식의 조경으로, UCLA의 프리웨이405 건너편 언덕 위에 새로 건축된 게티 센터는 동서고금의 미술품 전시 및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정원으로 유명하다.
젊어서 옥스퍼드에 유학을 하였던 게티는 유럽 각지로 여행을 다니면서 안목을 넓히고 예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게티 빌라는 게티가 이태리를 여행하던 도중 나폴리 부근의 베수비우스 화산으로 폐허가 된 헤라큘레니엄(Heraculaneum) 도시의 빌라(Villa dei Papiri 본래 카에사르 장인의 소유였다고 함)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는 열주회랑(Peristyle)에 그려져 있는 계란에 얽힌 에피소드이다. 게티는 옛날 로마인들이 살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로마 사람들은 회랑을 거닐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상상하기를 즐겨 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계란을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 벽 등에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게티 빌라에도 총 6만1천개의 계란을 그려 넣어야 했다. 이 작업을 화가의 젊은 조수가 맡아 하였는데, 그는 벽에 금이 간 곳에는 깨진 계란 틈으로 노른자가 흘러나온 모습을 그려 넣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작품(?) 하나로 그는 단순하고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을 살아있는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세계가 놀라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LA의 코리아타운(Korea Town)에 들어가 보면 거리에 즐비한 한글 간판들이 이곳이 서울 한복판이 아닌가 착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곳을 통과하는 대로인 윌셔가는 "을지로", 올림픽가는 "월곡로", 웨스턴가는 "서부로", 버몬트가는 "보문로"라고 불리울 정도이다. 15년 전 4.29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때 LA 도심의 한인업소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지금은 이곳 코리아타운이 전세계와 커넥션을 갖는 상권으로 부상하고 있다.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교포청년 조승희가 벌인 총기사고는 너무 끔찍한 일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인을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것을 미국 사람들에게 가르쳐줬다고 말하는 교포를 보았다. 과시할 일이 따로 있지 . . .
LPGA를 석권하다시피 한 한국의 여성골퍼들, 반기로 유엔 사무총장, 작년 12월 CBS TV의 리얼리티 쇼 "Survivor, Cook Islands"에서 우승한 권율 씨(예일법대 졸, 매킨지 컨설턴트 변호사), 27세 약관에 UCLA 로스쿨의 교수가 된 하버드 출신의 제리 강 교수 모두 자랑스런 한국인이 아니던가.
* 필자는 2007년 5월 제리 강 교수의 한국 방문기간 중에 국민일보 인터뷰를 주선하였다.

현재 통계상으로 보면 인구당 이민자의 비율이 제일 높은 민족은 유대인 다음에 한국인이라고 한다. 인구비율로 따지면 5천만명이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중국보다도 높다. 이민역사가 1백여년 밖에 되지 않는 폐쇄적이고 은둔자적인 나라(hermit country)로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한인의 대량 해외이주는 일제의 강제침탈로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시작되었다. 대하소설 "토지"에도 나오지만 한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하와이 등지로 떠났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일제시대에는 약 3백만명의 인구가 해외로 이주하였다.

두 번째 이민이 급증한 사건은 6.25 사변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종전 후 미국 군인들과 결혼한 한국 여인들이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먼저 이민을 간 여인들이 남은 가족을 초청하여 대대적인 가족이민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가족이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이 이민문호를 개방하면서 사업이민이 급증하고,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미국과의 교역량이 늘어나자 대기업의 지.상사 요원들이 미국 등지로 대거 이주하였다. 80년대에는 방문 케이스로 미국에 왔다가 불법체류자로 남아 미국에서 생활터전을 일군 사람들이 많았고 신분이 적법하게 바뀌면서 가족을 초청하는 케이스가 늘어났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 정부가 세계화를 부르짖고 조기유학이 성행하면서 유학생과 학부형의 동반진출이 크게 늘고 있다.
이리 하여 현재 미국과 중국에 각각 2백만명의 한국 교포들이 살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일본에 70만명, 구 소련 땅 중앙아시아에 50만명이 살고 있다. 미국에는 한국 유학생만 현재 10만명에 육박한다. 2004년의 제3차 세계한인선교대회의 공식발표에 의하면 172개국에 7백만명의 해외동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반도가 비좁기는 하지만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왜 세계로 떠나는가?
일제치하에서는 일본의 침탈에 못 이겨, 한국전쟁 후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떠났지만 지금은 자녀들에게 국제감각을 익히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또는 한국의 국력신장을 배경으로 한국과 관련된 사업을 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고 있다. 특히 어학연수나 조기유학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저 멀리 아프리카 남단의 남아공까지 내보내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은 한국인들은 이민을 가면 제일 먼저 교회를 찾거나 교회부터 개척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200여만명이 살고 있는 미국에 이민교회가 약 3500여개나 세워졌다. 이는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후 교회부터 세운 것이나, 유대인들이 고국을 떠나 가는 곳마다 유대회당(Synagogue)을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것과 유사하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약 2백만명의 조선족이 중국에 살고 있는데, 중국의 개방 이후 한국인들이 맨먼저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이 바로 조선족이며, 이들은 현재 중국 복음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상당수의 교회가 세계선교전략의 일환으로 세워졌고 세계선교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한인이민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고 한민족을 통하여 세계복음화를 이룩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주권과 아무도 모르는 당신만의 계획(Serendipity)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분산 Diaspora)를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고, 신약시대에 그곳을 거점으로 사도 바울과 함께 매우 효과적인 선교를 감당했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휴대폰과 자동차를 수출해서 번 돈을 유학생 학비와 해외여행경비로 모조리 쓴다"고 한탄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로 이해하는 한 한민족에게는 비전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해외에서 성장한 1.5세, 2세 한인들이 이중언어 구사능력과 이중문화 적응능력을 기반으로 세계경영, 세계선교에도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적이다.
(참고자료: 오운철 목사, "하나님 왼손으로 행하신 선교", LA OMC신문, 2007. 4월호) ▲

 

로푸키 교수와의 인터뷰

5월 8일 12시 패컬티 스폰서인 로푸키 교수가 초대하여 UCLA 교수회관(Faculty Center)에서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교수회관은 교수뿐만 아니라 함께 온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하였는데(교직원은 사번만 대면 POS 결제가 됨), 홀이 널찍하고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사 먹게 되어 있었다. 나도 로푸키 교수와 똑같이 이미 만들어 놓은 연어와 야채 파스타를 골랐는데 그는 심장질환이 있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정말로 연어만 조금 먹는 둥 마는 둥 소식을 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음식은 일본 음식과 일부 이태리 음식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매일같이 직접 만들어 먹으므로 음식 한 가지 한 가지가 귀중하다며 열심히 먹었다. 그러나 기말시험 채점을 하고 있던 로푸키 교수는 1시가 넘자 일어나자고 했다. 결국 1시 15분까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칭은 생략)

* 이번에 발표한 "Bankruptcy Fire Sales" 논문은 도산기업을 곧바로 매각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재건을 하는 것이 기업가치를 곱절은 더 받을 수 있어 채권자와 주주들한테도 이익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언론에도 크게 보도된 이번 실증적 연구결과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떠한가?
- 내가 논문에서 공격한 변호사나 판사들로부터 아직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 미국에서는 정말로 파산법원을 선택할 수 있는가?
- 그렇다. 회사를 등록한 델라웨어주와 실제 영업활동을 하거나 자회사를 둔 예컨대 뉴욕, 캘리포니아주 중에서 원하는 판결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미국에서는 담당판사를 제비뽑기식으로 정하는데 파산사건의 담당 재판부를 누가 정하는가?
* 확실히는 모르지만 사건접수 순서에 따라 일정 기준에 따라서 배정될 것이다. 어느 재판부에 사건이 많이 밀려 있으면 다른 재판부로 넘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은 새 도산법을 시행한 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한미 FTA 체결을 계기로 미국식 도산법과의 비교하여 한국 기업에 도움이 될 미국 제도를 과감히 도입할 방침이라고 한다.
- UCLA 로스쿨에 연방파산법 제정작업에 관여하였던 교수가 있다. 원한다면 소개해주겠다.
* 이번 프로젝트를 수임한 한국의 변호사들도 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이미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 있어서 귀하가 직접 만든 도산사건 데이터베이스(BRD)가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 물론이다. 한국에도 그와 비슷한 파산사건 DB가 있는가? 그런 내용의 DB가 있다면 국제비교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 한국에서는 도산법이 인기강좌가 아니어서 이 분야의 전문 연구자가 별로 없다. 그런 DB를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만들어 놓으면 크게 유익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금 미국식 로스쿨을 도입하려고 많은 학교가 준비하고 있다.
- 우리가 보기에 미국 로스쿨이 좋은 법률가를 양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 일본도 미국 비슷한 로스쿨을 도입했지만 실패했다는 의견이 많다.
- 법률제도와 마찬가지로 법학교육도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정보기술이 발달한 한국에서 RFID를 이용하여 담보관리를 한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아이디어다. 어떠한 진전이 있었는가.
* 현재 정부에서 동산담보제도 입법작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기업동산의 전자등기에 RFID를 채택할지는 미지수이다. 그것은 마치 컬럼버스의 달걀과 비슷하다. 현재 유통업체에서는 RFID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도 이를 전자등기에 활용하는 것은 정부관료나 입법자들이 그 기능에 의심이 많은 까닭에 별 진전이 없는 것 같다.

- 이곳에 온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력적으로 많은 논문을 쓰는 데 놀랐다.
* 귀하의 귀중한 논문을 한국에 번역 소개하는 것이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한국에 수입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귀하의 팀 프로덕션 이론이 도산법제를 개정하는 데 좋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보고 한국의 학술지에 기고하면서 도산절차에서는 이사회 중심의 정보공유 스킴이 중요하다는 내 의견을 추가했다.
- 그런데 KEB 사건에서 왜 행장이 BIS 수치를 조작하는 위험한 일을 벌였을까? 일반적으로 값을 많이 받으려고 회사 실적을 좋게 꾸미지 않는가?
* 첫째는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에 외자유치에 매달렸는데 미국의 펀드 말고는 시티은행 같은 정통 금융기관은 매입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사겠다는 사람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검찰 수사결과에 의하면 당시의 행장은 개인적으로 행장 자리를 보장받으려 했다고 한다. KEB 사건에서는 오히려 국세청이 강력히 론스타의 처벌을 요구했다. 룩셈부르크를 거점으로 KEB에 투자를 한 것이라 양도차익에 대해 세금을 한 푼도 안내려 했기 때문이다.
- 그런 일은 미국에서는 다반사이다. 미국에서는 버뮤다, 케이만 제도가 많이 이용된다.

* 나도 존 그리샴 소설과 영화에서는 케이만 제도가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어떤 곳인가 호기심을 느꼈다. 한국 기업들은 말레이시아 라부안을 조세피난처로 많이 이용한다.
- 나도 그리샴처럼 남부의 소도시(Gainesville)에서 8년간 변호사를 했다. 플로리다 대학 경영학부에서 상법을 가르쳤는데 나의 경력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다. 존 그리샴의 "레인 메이커"에 나오는 젊은 변호사처럼 비슷한 일을 하다가 교수가 되었다.

* 린(Lynn)이란 이름이 여자 이름 같은데 무슨 숨은 이야기가 있는가.
-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어서 만족할 만한 답변은 못하겠다.
* 성은 뭐라고 발음하는가?
- 로--키라고 한다. 폴란드 성씨이다. 할아버지가 1914년 1차 대전 직전에 폴란드에서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오셨다. 미국은 자유스러운 나라여서 아버지도 나도 군대에 안 갔다.

* 가을 학기에 센트루이스 워싱턴대학에서 방문교수로서 강의를 하기로 했는데 언제 떠날 예정인가.
- 8월 초에 연구조교의 임기가 끝나므로 그때까지 학교 연구실에 나올 예정이다. 센트루이스는 덥고 폭풍우도 잦고 날씨가 별로 안 좋다. 집사람이 워싱턴 대학 교수인데 방학 때면 살기 좋은 LA(Century City에 거주)로 온다.
* 매일 학교에만 나오면 가족들이 싫어하지 않는가?
- 집사람도 자기 연구하느라 바쁘다. ▲

 

의지의 한국인 석세스 스토리: WTCA 수석부총재

5월 중순 LA 동양선교교회(OMC)에서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수석부총재인 이희돈 박사(Dr. David Hee-Don Lee)의 간증집회가 열렸다. 한국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분이고 9.11 사태 때 기적적으로 살았다는 간증기를 전에 어디서 본 것 같아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5월 20일 OMC 설교 시간에 이 박사의 신앙간증을 듣고 난 후 이 분이야말로 "의지의 한국인"의 표상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박사의 석세스 스토리는 이민 1세대로서 미국 주류사회(main stream)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고백은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도전을 안겨주는데 관련 기사동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박사는 아주 동안(童顔)이지만 1959년생으로 1982년 외국어대 서반아어학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까지 마친 후 스페인 유학 길에 올랐다. 5대째 기독신앙가정에서 자란 이 박사는 "조상의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며 달랑 편도 항공권만 사주신 부모님 덕분(?)에 처음부터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학력을 보면 매우 화려하다.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 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영국 옥스퍼드 해리스 맨체스터 칼리지에서도 수학하였다. 미국 LA 풀러턴 소재 웨스턴 스테이트 유니버시티 로스쿨에서 JD 과정을 마쳤고, 경제학 교수로서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 San Diego)과 일본 교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박사의 간증을 들어보면 결정적인 시기에 그의 부인(이순성 여사)이 그의 인생진로를 바꿔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에서 학위과정을 마치지도 않고 무작정 대서양을 건너 온 것이나(재정보증서도 없이 "내가 미국에 가야 할 10가지 이유"서만 제출하고 미국 영사로부터 3시간만에 미국 비자를 받았다고 한다), 교토대학 초빙교수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멕시코 오지의 선교사역에 뛰어든 것도 부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역확대를 통한 지역개발'을 주제로 한 그의 논문이 WTC의 주목을 받아 1993년 WTC에 영입되고, 1997년에는 최연소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2002년에는 Vice Chairman으로 직위가 수직상승하였다. 지금은 연임에 성공한 수석부총재로서 고령인 현 총재가 사임하면 총재직을 승계할 수 있는 유력한 지위에 있다고 한다.
이 박사는 WTCA 총재가 자기를 보고 "당신은 다 좋은데 능력의 일부밖에는 WTCA를 위해 쓰질 않아"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그가 주일날 교회 출석을 위해 사회활동도 자제하는 등 헌신적인 신앙생활(fully committed to God)을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자기의 능력(capacity)은 솔직히 Chairman의 30%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WTCA 사무실에 출근할 때마다 하나님께 "100% 인물의 20% 헌신을 받으시는 것보다 30% 짜리인 자신의 100% 헌신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하고 기도를 올린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무역협회 회장은 부총리나 산자부장관 또는 재벌기업의 총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자리이기에 세계 92개 회원국에 320개 센터를 총괄하고 있는 그의 역량이 더욱 돋보인다.

그렇다면 이 박사의 성공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유학에 떠날 때 "세계를 그의 품안에"(World in His Arms)라는 꿈과 비전을 품었다고 한다. 그는 복음전도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시간만 나면 유럽 전역으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를 마스터할 수 있었다(그는 새벽기도를 두 시간 이상 하는데 각 나라 말로 기도를 하다보면 2시간도 부족하다고 한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득력과 협상력이 저절로 길러졌다.
처음 미국에 갈 때에는 비행기 표를 살 수가 없어 원양선원들이 타는 스판덱스라는 좌석도 없는 비행기를 얻어 탔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누구나 벌벌 떠는 문신 투성이의 왕고참에게 대담하게 전도를 하여 그의 회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두 번째 비법은 글로벌화 전략이다. 그는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스페인과 영국, 미국에서 각각 공부를 하였다. 학위논문의 주제는 "무역증진을 통한 지역개발과 세계평화"였다. 그도 자신의 주장이 나중에 WTC나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이론적 토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바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지만, 태생이 한국인이기에 '서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의 리전트(이사회) 멤버가 된 것이나, 풀브라이트위원회, 노벨상위원회의 부위장직을 맡고 있는 것도 그의 글로벌한 배경이 큰 힘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그의 성공비결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신앙의 담대함과 신념에 찬 열정이라 하겠다. 그는 어떠한 자리에서도 신앙인으로서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스스로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하나님께 함께 해주시기를 간구하기에 대담함이 생긴다고 말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공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자부하겠지만, 자신은 워낙 부족한 사람이기에 자기가 이룩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재정관은 너무나 뚜렷하다. 수입을 예상하고 미리 십일조를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빚을 지움으로써 "이래도 축복해 주지 않으시렵니까"하는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회가 있을 때면 1백만불, 2백만불씩 선교헌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스스로는 선교 능력이 부족하지만 전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이럴 때마다 그의 부인이 자신을 이끌었다고 고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OMC에서의 마지막 집회시간에는 반려자가 "World in Her Arms"가 될 수 있어야 자신도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내가 보기에도 이 박사보다 그의 부인이 참으로 놀라운 분이었다. 이 박사의 간증을 통해 들은 것만 해도 그와의 결혼을 피해 미국으로 먼저 떠나 온 것, 일본에서 초빙교수를 마치고 미국에 도착하자 곧바로 멕시코 오지 선교를 강권하다시피 한 것, LA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갈 때 집 판 돈을 선교헌금으로 바치자고 한 것 등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매번 전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으로 이어졌다. 특히 9.11 사건 전날 밤 경련을 일으키며 밤새 잠을 못 이룬 것도, 영화 "Minority Report"에서 보듯이, 남편이 끔찍한 사고를 당해서는 아니되겠다는 예지(precognition)능력의 소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 박사의 사무실이 테러리스트의 항공기가 충돌한 바로 그 층에 있어 NYT는 당연히 이 박사를 사망자 명단에 올려놓았다). 간증 가운데 이 박사는 위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반어법(反語法)적인 애정고백처럼 들렸다.

나는 그의 간증을 처음 듣고 인터넷에서 간증녹음과 동영상을 여러 편 들어보았는데 그는 신앙간증을 하는 것만으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가 행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미국식 이름인 다윗이 물매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실제로 바위가 깨지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 모두 그를 통하여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In the English version

 

어느 한국인의 비극적인 몰락

미국에는 불법체류자와 유학생을 포함하여 200만명에 육박하는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2000년 미국 인구센서스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계로는 인도, 중국, 필리핀, 베트남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1,076,872명이다).
그러니 이희돈 박사같이 "American Dream"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그 문턱에서, 아니 문간에 가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사람들도 많다. 5월 24일 LA의 교포신문에는 안타까운 기사가 실렸다.

하나는 경찰특공대(SWAT)까지 동원되었던 어느 교포의 치정극에 의한 총기 살인사건의 속보였고, 다른 하나는 아이비리그 출신의 엘리트 청년이 허위 세금환급(tax return) 신청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기사였다.

22일 오후 LA 한인타운의 갈비냉면전문 서라벌 식당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던 중년 남자(나세균 47세)가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는 것처럼 뭐라뭐라 하다가 업주(임효진 51세)를 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나도 마침 한인타운에 이발을 하러 갔다가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들이 몰려 가길래 무슨 큰 사건이 터졌나 보다 생각했는데 버지니아텍 사고가 벌어진 지 한 달만에 또 한인에 의한 총기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LA경찰국(LAPD)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범행동기는 범인과 그의 아내, 피살자가 얽힌 삼각관계라면서 다른 한인들이 불안해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신문기사는 나 씨가 한국의 명문 K대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이민 와서 한 때 잘 살다가 부동산중개업이 불황을 타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서라벌 식당에서 웨이트레스를 하는 부인과 불화가 잦아졌다고 전했다.
신문기사는 또 한인들이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이민생활 속에서 속내를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나 친척이 없다 보니 고민과 갈등이 누적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신문은 한 달 전에 한인 여성이 심야에 남편을 총격 살해한 후 자살한 사건을 예로 들고 극한 분노를 여과없이 분출하는 한인 교포들의 비극이 잇따르는 것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또 다른 기사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응용수학을 전공한 캐나다 시민권자인 선위진(24세) 씨가 허위로 뉴욕 주정보에 30여 건의 세금환급을 신청한 혐의로 5월 22일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사실(보석금은 50만달러로 책정)을 보도했다.
선 씨는 200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모건스탠리 런던지사, 시티그룹 글로벌, 뉴욕 바클레이은행 등에서 투자전문가로 근무하였는데(이렇게 세계 유수의 은행들이 스카웃할 정도라면 아마도 천재급인 모양이다) 그의 비상한 머리를 불법으로 세금을 환급받는 일에 쓴 것이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선 씨는 지난 3-4월 홈리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이용해 이들이 연봉 7-9백만 달러를 받는 고소득 금융종사자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이들의 신용정보를 도용해 허위로 520만달러의 세금환급을 신청한 선 씨는 이미 572,500달러를 환급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타인 계좌에 입금된 세금환급금 189,671달러를 인출하려는 그를 의심스럽게 여긴 은행원의 신고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미국에서 몇 해 살지 않은 나도 미국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 "탈세와 마약"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선 씨가 '눈먼 돈'이라 생각하고 세금에 손을 댔다가 최고 30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선 씨는 왜 그의 비상한 수학적 두뇌를 좀 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일에 활용하지 않았을까? 이는 그의 유전적 성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천적인 교육이나 환경 탓이었을까?
그가 미국의 명문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지도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noblesse oblige)만 자각을 하였어도 이렇게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명문대학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만 뽑지 않고 커뮤니티의 리더가 될 만한 학생들을 일찌감치 발굴하여 훈련시키는 것을 제1의 사명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대학도 산다

5월 25일자 UCLA 대학신문(Daily Bruin) 1면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UCLA의 LA시와 캘리포니아주에 대한 경제적 기여도가 연간 90억달러가 넘는다는 한 연구기관의 보고서 내용이 실려 있었다. LA경제개발공사(Los Angeles Economic Development Corporation)라는 곳에서 조사해 보니 UCLA가 LA 지역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economic impact)는 연간 93.4억달러, 캘리포니아 주 전체적으로는 98.9억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연구보고서는 그 이유로 UCLA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어 건설공사 발주 및 각종 물자 구매, 고용실적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사실 UCLA 및 부속기관은 LA 지역에서 일곱 번째로 많은 2만7천명(교수진 포함)을 고용하고 있다. 연구보고서는 또 UCLA의 왕성한 소비활동으로 주변지역에 대략 4만2천8백명의 고용유발효과가 생긴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UCLA 의과대학에서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으며, 공학, 사회과학, 예술 분야에서도 학문과 기술, 예술의 발전을 촉진하고 지역사회 주민들의 삶의 질(quality of life)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UCLA가 미국에서도 손꼽는 일류 대학으로서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많은 학생들이 UCLA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만큼 신입생들의 수준이 높고(GPA 평균이 전년의 4.14에서 4.18로 상승) 그 결과 UCLA가 LA의 교육과 문화, 경제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심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신문(Daily Bruin)의 5월 14일자 기사에서 읽었지만, 이러한 학교의 역할은 입학사정(admission) 절차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입학허가의 일정비율을 소수인종(minority)이나 저소득층(연수입 3만달러 이하의 가정)에 배정하여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의 리더로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2007-2008학년도에 입학허가를 받고 등록예정서(statement of intent to register: SIR)를 제출한 총 4,636명의 예비 신입생 중 흑인학생이 203명(전년도에는 96명)으로 크게 늘었다는 것이 빅 뉴스였다. 학교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대학을 다니며 자신과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도록 권장할 방침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소득층이나 소년소녀 가장(first generation)인 학생의 수는 작년의 1,691명에서 1,260명으로 크게 줄었다고 하여 이들에게 장학금 등 혜택을 늘리는 등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UCLA 신입생 중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학생들은 1500명에 육박하여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히스패닉(Chicano and Latino), 흑인(Black), 인디언(Native American)을 인구 수에 비해 적게 입학하는 소수인종(underrepresented races)으로 특별관리하고 있다.

나는 UCLA가 왜 돈을 대줘 가면서 이런 조사연구를 시키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지 궁금하였다.
현재 UCLA는 연방정부 및 지방정부에 도합 12억달러를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는데 동시에 주립대학으로서 주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2005-2006년에는 경상운영비의 17%를 주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고려하면 주민들이 내는 세금 1달러가 UCLA에 투입됨으로써 이 대학교는 지역사회에 15달러를 창출하여 돌려주고 있으므로 이는 매우 효과적인 투자이고 이러한 경제적 효과는 미국 대학 전체적으로도 손꼽을 정도라고 자랑했다.
그 반대급부로서 주 의회가 주립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을 재개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의 교육비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는 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어찌 보면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여 설득력을 높이고 학교 관계자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놀라웠다.

경희대의 경우 금년도 등록금 인상률을 놓고 총학생회는 학교측의 인상안에 반대하고 있으며 일차로 교.직원들의 급여 인상폭을 등록금 인상률 이내로 못박았다고 한다.
우리 학교에서도 이러한 연구결과가 나와 있는지는 모르지만, 경희대가 지역사회에 경제적으로나 삶의 질 향상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경희대에 다님으로써 어떠한 혜택을 받게 되는지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지역사회와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많다면 협상을 해가며 구차스럽게 등록금을 올려받을 게 아니라 당당하게 인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 자신 연구년 중임에도 강의할 때와 큰 차이 없는 연봉을 받으면서 소속 학교와 우리 학생들에게 얼마나 경제적, 경제외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

 

익사이팅한 고속도로 자동차 여행

미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은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자동차로 해야 한다.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버스인 그레이하운드가 있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역시 자동차가 필요하므로 급한 일정이 아니면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다. LA 시내에서도 뉴욕주나 플로리다주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를 흔히 볼 수 있다.

미국은 사통팔달로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 망이 깔려 있고 도로표지나 지도(요즘은 네비게이션)가 잘 되어 있어 황량한 도로를 몇 시간씩 달리는 것만 제외하면 자동차 여행에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휴게소가 우리나라처럼 고속도로 연변에 있는 게 아니고, 프리웨이에서 나들목(exit)으로 나가 높은 폴대 표시가 있는 식당이나 주유소를 찾아가야 한다. 대부분 큰 쇼핑몰과 함께 자리잡고 있는 곳이 많다.

문제는 액셀을 조금만 밟아도 시속 70-80마일(110-130km)로 달리게 되므로 55-65마일 구간에서 속도위반으로 고속도로 경찰(Highway Patrol)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앞뒤 차량의 흐름을 타고 달리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고속도로 곳곳에는 경찰 오토바이나 순찰차가 단속을 하고 있고 또 한적한 곳에서는 항공단속을 한다는 경고판도 눈에 띈다. 실제로 규정속도보다 15마일 이상 초과해서 달리면 난폭운전자(reckless driver)라 해서 딱지를 떼는 것은 물론 수갑을 차고 연행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물론 보험료도 껑충 뛰게 된다.

최근 미국의 많은 주(26개 주와 워싱턴DC)에서는 경찰 단속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운전자들이 음주운전이나 난폭운전, 어린아이에게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차량을 발견하면 경찰에 신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캘리포니아주가 대표적인데 휴대폰이나 인터넷으로 신고를 받으면 즉각 고속도로 경찰이 출동하여 조사를 하거나, 문제의 차량 소유자에게 경고장을 보낸다고 한다(USA Today 2007.6.11자 1면). 우리나라의 '카파라치'처럼 사진을 찍어 보내면 보험회사에서 돈을 주는 그런 식은 물론 아니다.

나도 조카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6월 중순 산호세와 샌프란시스코에 자동차로 다녀왔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단속하는 경찰을 전혀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 이런 길을 또 달릴 수 있으랴 싶어 시속 70-80마일로 달렸던 것 같다.
도중에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여행을 끝내고 몇 주일이 지날 때까지는 혹시 무슨 고지서가 날아올지 몰라 안심할 수 없었다. 속도위반 딱지 말고도 유료도로 구간을 요금을 안 내고 달렸다는 고지서도 올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주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통행료가 없는 프리웨이이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1개 차선을 유료로 운영하고 있다. ▲

 

살아 움직이는 미국의 사법제도

미국의 사법 시스템은, 외국의 법학자가 보기에 예측가능성이 없다 할 정도로 다양하고 역동적이다. 심지어는 교통사고, 소액 채권채무사건을 시민법정의 형태로 열어 TV 중계 하에 재판을 벌이기도 한다. 다음 세 가지 케이스는 2007년 초여름 신문지면을 뜨겁게 달군 사건들이다.

하나는 우리 교포 세탁업자가 소송을 당한 이른바 "5백억원 바지" 소송이다. 바지수선을 의뢰한 손님이 바지를 잃어버린 세탁소 주인에게 5400만달러 손해배상을 요구한 사건이다. 피해액이 1천불이 넘지 않았음에도 워싱턴DC 행정법원 판사인 원고는 일반공중에 대한 '고객만족' 서비스 약속을 어겼다 하여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청구액 중에는 앞으로 10년간 다른 세탁소에 가는 데 사용할 렌트카 비용 1만5천달러도 포함돼 있다).
워싱턴DC의 바트노프(Judith Bartnoff) 판사는 6월 25일 "이성적인 소비자라면 고객만족보장(Satisfaction Guaranteed) 서비스가 고객의 불합리한 요구까지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거나 합리적인 법적 다툼까지 포기하라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원고 패소를 판결했다.

둘째는 항상 화제를 뿌리고 다니는 힐튼가의 상속녀(heiress socialite) 패리스 힐튼(Paris Hilton)을 재수감하도록 한 LA카운티 고등법원의 결정이다. 패리스 힐튼은 난폭운전(reckless driving)으로 면허가 정지된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45일 구류형을 받았는데 LA 다운타운의 구치소는 패리스가 형기의 10%를 채우자 석방했다. 그러나 '有錢無罪'라는 여론의 반발에 밀려 재수감되었다가 3주를 더 감옥에서 보낸 뒤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수감자들로 넘쳐나는 LA카운티의 셰리프는 경범의 경우 형기의 10%를 채우면 전자족쇄를 차고 집안에만 있는 조건으로 석방할 수 있는데 법원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패리스 힐튼은 6월 26일 0시가 지나자마자 구치소를 걸어나왔다. TV방송에서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귀가하는 장면을 생중계하는 등 야단법석이었다.

셋째는 2007년 5월 27일자 LA 타임스가 탐사보도한 사건으로 나카라과 등 중앙아메리카의 바나나 농장의 근로자들이 현지는 물론 미국에서도 손해배상 집단소송을 제기하였다는 내용이다. 30여년 전에 바나나 농장에 DBCP(dibromochloropropane)라는 살충제가 살포되었는데 그로 인해 생식능력을 상실한 현지주민들이 농장에서 살충제를 사용한 돌식품(Dole Food)과 살충제 메이커인 다우 화학을 상대로 LA에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라 한다.
DBCP가 인체에 유해하여 미국 식품의약청(FDA)가 그 사용을 금지한 것을 알게 된 미국 로펌들이 이들 대기업을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미국 법원은 부적절한 법정지(forum non conveniens)라는 이유로 심리를 거부하였다. 그러던 것을 LA에서 상해(personal injury)사건 전문변호사 버스광고로 유명한 후안 도밍게(Huan J. Dominguez) 변호사가 니카라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정액검사 결과 정자가 일정 수 이하인 수천명의 주민들로부터 사건을 수임하여 LA 카운티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도밍게 변호사는 원고를 일단 13명으로 하여 시작하였지만 만일 화해(settlement)로 결말이 나더라도 종전보다 훨씬 많은 피해보상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2002년에 니카라과 법원이 450명의 현지근로자에게 4억9천만 달러 배상하도록 명하는 등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자 돌과 다우는 미국내 강제집행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돌식품은 온두라스에서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바나나농장 근로자들에게 1인당 5800달러를 지급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니카라과 정부는 2000년 자국민에게 유리하게끔 살충제(DBCP)는 생식능력을 해친다고 규정한 DBCP소송촉진법을 시행하고 피고회사가 니카라과 법정에 서기 위해서는 10만달러를 공탁하도록 했기 때문에 니카라과는 미국민에 적대적인 법정지(hostile jurisdiction)가 되었다. 따라서 미국 법원이 더 이상 현지 법원에 소송을 미룰 수 없게 되었고 이번에는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재판이 열릴 공산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피고회사들이 문제의 살충제가 유해함을 알고 사용했다 할지라도 현지주민들이 건강을 해치게 된 데는 30년 전에 DBCP 말고도 DDT 같은 유독성 살충제, 오염된 식수원 등 여러 가지가 있어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5월 초 LA 카운티 지방법원(LAC Superior Court)의 빅토리아 체니(Victoria Chaney) 판사는 도밍게 변호사에 대해 니카라과 외에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파나마 사건도 병합하여 일괄 심리하기로 하고, 피고에 델몬티, 치키타 브랜드, 셸 석유회사를 추가하도록 하여 올 여름에 벌어질 소송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라스베가스를 석권한 태양의 서커스와 블루오션 전략

사람들은 라스베가스에 뭐 하러 가는가?
그곳은 도박이 합법화된 곳이기에 카지노에 가서 슬랏 머신이나 포커나 룰렛을 하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Comdex 같은 첨단산업 전시회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LA에서 자동차로 5시간 이상 걸리는(464km) 곳에 있는 라스베가스를 찾아갈 때까지는 갬블링이나 컨퍼런스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LA 도심에서 프리웨이 10번과 15번을 타고 바스토우(Barstow)를 거쳐가는 코스는 비교적 단조롭지만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을 통과해야 하는 자못 지루한 여정이다. 베이커(Baker)에서 내륙 쪽으로 좀더 들어가면 데쓰벨리(Death Valley)가 나오고, 직진하여 네바다주로 접어들면(Primm) 상당히 큰 아웃렛 몰이 나타난다.

멀리서 바라다 본 라스베가스는 마치 사막 위의 신기루(mirage)와 같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사막 한 복판에 어찌하여 수많은 대형 카지노 호텔이 즐비하고 밤이면 휘황찬란한 야경이 펼쳐지는지, 그 많은 관광객들과 도박꾼들이 뭐 하러 몰려드는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라스베가스에 머물면서 호텔마다 벌어지는 각종 쇼와 진기한 볼거리를 보고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관광객이나 방문객들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것을 라스베가스에 와서 보고들을 수 있었다. 그 목적이 가족여행이든 컨퍼런스 참석이든 라스베가스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호텔마다 특징이 있는 쇼를 보여주는데, 벨라지오 호텔의 경우 바깥 호수의 분수 쇼와 함께 "O"쇼(프랑스어로 '물'[l'eau]이란 뜻)가 자랑이었다.
몇 주 전에 예약을 하고 제일 좋은 오케스트라 석에서 관람한 "O"쇼는 기대 이상이었다. 20m 높이에서 다이빙할 수 있을 정도의 수심이 있는 수조 안과 위에서 온갖 진기한 율동의 싱크로나이즈(synchronized swimming)와 수영, 곡예, 다이빙을 보여주었다.

김위찬-르네 마보안 교수는 [블루 오션 전략]에서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는 전통적인 서커스 공연과는 컨셉이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시르크 뒤 솔레유는 사자, 코끼리 같은 동물이나 조련사를 빼고 대신 곡예와 무용, 음악에 서로 연결된 스토리를 집어넣었으며, 타깃을 어린이가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세련된 라이브 뮤직과 조명을 추가하여 어른들에게 꿈과 환상, 고급문화와 서정성을 선사하였다고 말했다. 그리 함으로써 비싼 입장료를 받으면서도 경쟁이 없는 무한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르크 뒤 솔레유는 라스베가스의 여러 대형 카지노 호텔에서 동시에 KA(MGM), Mystere(Treasure Islands), Zumanity(New York-New York), Beatles Love/Revolution(Mirage) 등의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에 관한 한 서커스가 사양화되었다는 말은 틀려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인기있게 만들었을까?
나는 "O"쇼를 보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서커스가 아니라 뮤지컬을 보는 것 같게 만든 발상의 전환이었다. 소재는 서커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곡예와 공중그네, 불(fire)쇼 같은 것이었지만 여기에 물 속에서 할 수 있는 수영과 다이빙, 싱크로나이즈를 추가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곁들여 관객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한쪽 발코니에 서 있던 가수가 공연 도중에 배우들과 같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하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긴박감을 더하기도 했다.

둘째는 많은 시설투자를 하여 각종 기계장치가 돌아가면서 쉼없이 새로운 무대가 펼쳐지도록 꾸몄다.
"O"쇼의 경우 싱크로나이즈를 하다가 물 없는 무대로 바뀌고 이내 깊은 물 속으로 고공 다이빙을 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천정과 무대 위에서는 각종 장치와 조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예를 들어 배(Bateau)라는 순서에서는 공중에 돛 단 배가 미끄러지듯 나타난다. 배의 용골과 늑골에서는 8-9명의 서커스 단원이 온갖 묘기를 보이다가 마지막에는 차례로 점프하여 밑으로 떨어진다. 이 배를 움직이는 장치가 천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만 그 자체도 드라마 속의 순서로 보인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항해를 준비하고 출항에 나섰으나 거센 풍랑에 휩쓸려 배가 부서지고 모든 선원이 바다로 떨어지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었다.

셋째는 놀라운 입소문이었다. 우리도 라스베가스에 가서 "O"쇼나 KA를 꼭 보아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도 블루 오션 전략의 실제 사례를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객석에 물 냄새와 클로르칼키 냄새가 풍겼으나 이 같이 다채로운 공연은 고액의 입장료($99, $125, $150의 3종 +10% tax)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 태양의 서커스에 관한 추가 정보와 한국에서의 공연 사진을 보려면 태양의 서커스 Kooza(2018) 참조. ▲

 

동화 같은 성을 쌓고 주민들에게 돌려준 랜돌프 허스트

큰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광 개발로 큰 재산을 모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방학 때면 아버지의 드넓은 목장(ranch) 곳곳에 텐트를 치며 탐험하듯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십대 초반에는 역사교사를 한 모친과 함께 유럽의 여러 문화유적을 찾아다니는 호사를 누렸다(아이맥스 영화 허스트 전기 "Dream"의 장면). 여기까지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 유학하였던 미국 부유층 자제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허스트는 좀 독특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24만 에이커의 목장 언덕 위에 유럽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스페인 성당과 같은 집(castle)을 짓고 싶었다. 그는 꿈을 이룰 만한 재산이 있었고 꿈을 구체화해줄 수 있는 건축가(Julia Morgan)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안젤레스의 정확히 중간 지점인 캘리포니아 해변가 샌시먼(San Simeon)의 광대한 목장 언덕 위에 그의 캐슬(Hearst Castle)이 자리잡고 지금도 으리으리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생전에 언론왕국을 이루었고, 그가 가진 재산을 쏟아 부어 그가 꿈꾸었던 캐슬을 건설하였다. 1919년부터 1947년까지 건물을 지었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했다. 실제로 허스트가 자신만의 캐슬을 꾸미기 위해 들인 노력은 매우 변덕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부를 가졌기에 줄리아 모건으로 하여금 새로 바뀐 아이디어를 다시 설계하게 하고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돈이 있었으면 지었을 저택"이라고 하였을까. 우리가 전에 구경하였던 밴더빌트 맨션이나 뉴포트 맨션보다 디테일한 면에서 앞서는 것 같았다.
허스트 캐슬 앞에 있는 넵튠 풀장은 주변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나중에는 로마풍 열주를 세워 마치 고대 로마와 같은 분위기를 살렸다. 주정부 공무원인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영화 로케이션 제의가 많았지만 오직 로렌스 올리비에,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스파르타카스(Spartacus 1960년)의 한 장면(25초)에만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목장에는 사설 동물원을 만들어 마치 아프리카 사파리를 온 것처럼 얼룩말, 사슴, 기린 등을 방목했다.

허스트는 1920년 대통령의 꿈이 멀어지자 아들 다섯을 낳아준 부인을 멀리 뉴욕으로 내치고 34년 연하의 영화배우(Marion Davies)를 정부로 맞아 그의 캐슬에서 거의 매주 파티를 열고 지냈다. 그의 캐슬에는 캐리 그란트, 찰리 채플린과 같은 영화배우와, 캘빈 쿨리지 대통령, 윈스턴 처칠 같은 정치가들이 자주 초청을 받았는데, 주말에 누가 허스트 캐슬의 초대장을 받을지 화제가 될 정도였다. 1920-30년대 그의 행적은 매우 유별나 헐리우드의 오손 웰즈는 1941년 그를 모델로 한 [시민 케인](Citizen Kane)이란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해변 쪽 랜치에 1km가 넘는 활주로를 만들어 놓고 DC-3기로 손님을 나르거나 용무가 있으면 직접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다녔다. 그러나 허스트가 여러 차례 시도하였음에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그는 수많은 언론매체를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미국 대통령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또 나이가 들자 캐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도시로 떠났다.

그의 사후 그의 유족은 더 이상 캐슬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보고 캘리포니아의 여러 대학과 주 정부에 기부할 뜻을 밝혔다. 랜치의 일부 시설은 자손들이 계속 이용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다. 모두가 난색을 표한 가운데 새로 취임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이에 관심을 보여 그의 캐슬은 1957년 캘리포니아 주립공원(State Park: Historical Monument)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래서 허스트 캐슬을 보려면 인터넷 사이트(http://www.hearstcastle.com/) 또는 전화로 입장권을 예매(성인 $24, 허스트 캐슬에 관한 National Geographic 아이맥스 영화 관람료 포함)해야 하는데 취소할 겨를도 없이 늦게 도착하면 냉정히 입장을 거절하는 마치 관공서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허스트 캐슬은 여러 진품, 명품, 명화의 컬렉션이 진열되어 있는 2층, 3층이 볼 만하다고 하는데 바깥 정원과 1층만 둘러보기(Tour I)에도 바쁜 초행의 방문객으로서는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 허스트 캐슬에 관한 더 많은 사진을 보려면 좌측 [국제거래 견문기]의 허스트 캐슬 참조. ▲

 

통제불능의 헐리웃 연예인들과 천문학적인 재활치료비

아무래도 헐리웃을 끼고 있다 보니 LA에서는 연예인 관련 기사나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2007년 8월 중순 케이블 방송에서는 통제불능 상태의 연예인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켰고 어떻게 재활치료(rehab)를 받았는지 보도(Out of Control: 10 Celebrity Rehabs Exposed)하였다. 이런 것이 다 뉴스가 되나 싶기도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반대차선도 똑같이 밀리는 것처럼 스스로를 경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패리스 힐튼의 경우와 같이 별난 사람들이 별나게 사는 것도 보통사람들에게 흥미로운 화제거리가 될 수 있다.

2006년도 미스USA 타라 코너(Tara Conner)는 켄터키의 시골뜨기 아가씨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신데렐라가 되어 그만 일탈을 하고 만 케이스에 속한다. 그녀는 맨해탄 트럼프 타워에 살면서 말로만 듣던 유명 클럽에 줄을 서지 않고도 무상 출입할 수 있게 되자 거의 매일 클럽을 순례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급성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급기야 미스USA 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 왕관을 뺏길 위기에 처했다. 미스유니버스 사업권을 갖고 있는 도날드 트럼프가 그녀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기로 하여 그녀는 두 달여 재활시설(rehab)에 다녀온 뒤 정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와 [찰리 채플린]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로벗 도우니 2세(Robert Downey Jr.)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그는 약물중독으로 여러 차례 구속되었고 보호관찰(probation) 조건을 위반하는 바람에 실제 교도소에 들어가 3년간 복역을 하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팝가수였던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는 세간의 동정을 살만도 하다. 그녀는 두 아이를 낳은 후 남편과의 불화와 이혼으로 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psychological meltdown)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리를 박박 밀었을 때 한국 같았으면 절에 가서 수도승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멜 깁슨(Mel Gibson)이 거의 불치의 알콜중독자라는 것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레썰 웨펀]에서의 호탕한 성격으로 보아 '두주불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브레이브 하트], [패트리어트]의 주인공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을 제작 감독한 사람이 알콜의 노예라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맨처음 부인의 신청으로 AA(금주)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였고,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으나 그의 주사는 여전하다고 한다. 그는 종종 성차별적이고 반유대인적인 발언으로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가장 미국여자(American girl)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린제이 로한(Lidsay Lohan)은 거의 매일 밤 파티에 나가는데 술과 마약으로 경찰조사를 받은 일이 부지기수이다. 2007년 들어서만 해도 여러 차례 사고를 쳤다. 그녀는 아직 캘리포니아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는 21세 미만이다. 11살 때부터 연예계에 데뷔하여 항시 인기의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시도 때도 없이 파파라치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으니 머리가 돌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이날 TV 보도에서 이채를 띤 것은 LA 주변의 헐리웃 힐, 말리부 같은 경치 좋은 곳에서 한 달에 3-4만불씩 하는 재활요양소(rehabilitation facilities)가 성업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스파 같은 고급 호텔시설을 갖추어 놓고 헐리웃 스타나 부유층의 알콜, 약물 중독증을 치료한다는데 오랫동안 굳어진 중독증(addiction)을 몇 주간의 프로그램으로 고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연예인들이 이곳에 가는 이유는 지긋지긋한 파파라치에서 놓여날 수 있는 데다 퇴원을 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는 공식발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항상(24hours/7days)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연예인들로서는 장기간 잠수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날 TV 채널을 돌리니 공영방송에서는 유명한 심리상담가 웨인 다이어(Wayne Dyer) 박사가 중독증 치료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천 마일이나 되는 먼 길도 첫 걸음에서 시작한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아무리 심각한 중독증도 하루만, 한 시간만, 아니 일분만이라도 중단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면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헐리웃과 같은 곳에서 노자(Laotse)의 사상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칼하게 들렸다. ▲

 

'빅 브라더' 미국의 National ID Card 논란

10여년 만에 미국에 와서 살다보니 전과 달라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외국인으로서의 신분을 확실히 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점이다. 우선 비자신분이 확실해야 하며 유학생(F1)이나 방문교수(J1)로 입국한 경우 소속학교 담당자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 학교를 옮기는 경우에도 국토안보부(Dept of Homeland Security) 이민국에 신고가 접수되어야 하며 무심코 캐나다나 멕시코에 놀러갔다가는 재입국을 거부 당하는 사태마저 빚어질 수 있다.
또 하나는 관공서 출입 시에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의 제시를 요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등록국(DMV)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으려면 사회보장번호가 있어야 한다.

그 동안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주민카드를 만들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하는 것 때문에, 이를테면 조지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 같이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비판에 부딪혀 금새 움츠러들곤 하였다.
여기에는 성경적인 의미도 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각료회의 석상에서 전국민에게 인식표(identification tatoo)를 부여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때 레이건이 "오 맙소사, 그것은 짐승의 표(mark of the beast 요한계시록 13:16) 아니야?"하고 일갈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다고 한다(레이건 대통령의 국내정책보좌관을 지낸 마틴 앤더슨의 증언).

행정부의 입장에서는 국민 개인별로 고유의 식별번호(주민번호)를 부여하면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선 범죄자의 식별과 감시에 편리하고, 주민번호에 따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으면 주민 개인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 현황파악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를 매칭하면 행정상으로 필요한 DB를 새로 구축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의 주민카드는 주로 이민과 의료보험 때문에 그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1994년 텍사스의 바바라 조르단 의원은 사진을 붙인 취업증(work card)을 만들자고 제안하였으나, 의회에서 부결되었고 사회보장국(SSA)에서도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그와 같은 결과가 시행되고 있다. 예컨대 자동차운전면허증을 신청하거나 갱신할 때, 혼인신고를 할 때, 각종 자격증을 발급할 때 사회보장번호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전국적인 주민카드의 시행은 불법 체류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이 높다. 의료보험(health care)의 적절한 집행을 위하여 개인별로 보건카드(health ID number)를 만들자는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나 그 오남용에 대한 우려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러던 것이 2001년 9.11 사태를 겪으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적어도 항공기 탑승 시에는 신원확인을 거친 주민카드(fast-lane ID)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여전히 은행거래나 의료보험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2008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후보들 간에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예컨대 루돌프 쥴리아니 전 뉴욕시장의 경우 위조불가능한 주민카드(tamperproof ID)에 찬성한다고 말했으나 이는 이민자의 경우에 한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반면 텍사스 출신 공화당의 론 폴 의원은 REAL ID Act(2005년에 제정되었으나 아직 시행이 보류되고 있는, 운전면허증을 사실상 ID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법률)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미네소타 출신 공화당의 노름 콜맨 상원의원은 서류미비 이민자(undocumented immigrant)라고 의심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그의 신분증을 요구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을 편다. 현재 대부분의 주에서는 경찰관의 직무수행 시 범죄신고를 한 사람이나 범죄피해자에 대하여는 미국시민인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참고자료: Privacy Journal Monthly Vol.33 No.9, July 2007] ▲

 

미국 로스쿨의 졸업생 취업 대책

8월 20일 UCLA 로스쿨의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졸업생들이 떠난 자리에서 신입생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가운데 대형 로펌의 취업설명회 공고가 게시판에서 시선을 끈다. 로스쿨 현관에는 재학생 및 졸업생들의 미국 유수 로펌에의 취업현황이 '경마'를 하는 도표로 게시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정부기관이나 기업, 시민단체(NPO)로 가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아무래도 로펌에 취업하는 숫자가 제일 많다. 로펌에 들어가면 업무는 고되어도 대형 로펌 초임 변호사의 연봉은 최근 16만불을 넘어섰다. 지난 5-6년간 법률시장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왔으며, 최근 들어 로스쿨 졸업생의 90%가 졸업 후 6월 내에 취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2, 3학년 때 유수의 로펌이 학교에 찾아와 면담하는 회수가 많을수록 취업률이 올라가게 마련이다. 미국의 로스쿨들은 학교의 명성(예컨대 US News & World Report에서 매년 발표하는 학교 랭킹) 못지 않게 캠퍼스를 찾아와 인터뷰(OCI: on-campus interview)를 하는 로펌의 숫자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예컨대 뉴욕에 있는 포댐 로스쿨은 샴페인에 있는 일리노이 로스쿨과 US 뉴스의 순위는 25위로 같지만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일리노이 로스쿨의 2배가 넘는 150개 로펌이 찾아온다. 대형 로펌들이 제일 많이 찾는 로스쿨은 워싱턴에 있는 조지타운 로센터이다. 2007년 가을에도 280개 로펌이 OCI 취업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다.
대부분의 로펌은 20명을 면접하면 그 중에서 3-6명을 우선 선발하고, 나머지는 추후에 인터뷰(call-back interview)를 하게 된다. 그 결과 60% 정도가 여름에 로펌에서 인턴 변호사(summer associate)를 하게 되는데 그 중 90%가 정식으로 채용되고 있다. 그만큼 캠퍼스 취업면접기회가 많을수록 졸업생들의 취업율이 올라가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 전체 183개 로스쿨 중에서 조지타운과 같은 상위 25개 로스쿨이 100여개 로펌들의 OCI 기회를 독차지하고, 119개 학교는 30개도 안 되는 로펌이 찾아올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 25개 로스쿨은 21개가 US 뉴스의 랭킹 25위 안에 드는 명문교들이다. 대형 로펌의 채용담당자들이 캠퍼스를 찾아가 면접을 할 때 학교의 명성을 크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의 명성은 높아도 대형 로펌들이 잘 찾지 않는 로스쿨도 있다. 예컨대 예일은 워낙 학생 수가 적은 데다 외진 곳(뉴욕과 보스톤의 중간지점인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자리잡고 있어 OCI는 18위에 그쳐 있다. 반면 워싱턴 DC에 소재하고 학생 수도 많은 조지타운이나 하워드는 US 뉴스의 순위는 낮지만 많은 로펌들이 찾아온다. 그러니 대형 로펌들이 많이 찾는 25개 로스쿨 중 17개 학교가 워싱턴, 보스톤,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 LA,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 학교의 순위는 www.njplonline.com, www.vault.com/lawschool 에서 찾아볼 수 있음)

그렇다고 학교의 명성(prestige), 소재지(location), 학생수(size)가 유수 로펌의 선호도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재단의 학교인 디트로이트 머시(University of Detroit Mercy)는 특성화 전략에 입각한 커리큘럼과 마크 고든 학장(Dean Mark Gordon)의 지도력에 힘입어 대형 로펌들이 앞다퉈 채용하는 명문교(job-hunting powerhouse)로 탈바꿈하였다(Wall Street Journal 관련기사).
고든 학장은 2002년에 취임한 이후 3학년 과정에 로펌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학생들은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는 기업법무실무(simulated corporate transaction) 과목을 2개 이상 이수해야 하며, 실제로 로펌에서 벌어지는 소송, 노사문제, 부동산, 공정거래, 지재권 문제를 다루게 된다.
고든 학장은 유수 로펌에서 은퇴한 변호사들(이들은 또 Dean's Advisory Board를 구성)을 강사로 초빙하여 실제 상황과 똑 같이 수업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로스쿨에서 공부하는 것과 법조 실무에서 일어나는 것을 일치시킴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자연히 디트로이트 머시 로스쿨의 입학지원자수도 지난 3년간 30%나 급증했다고 한다.

그 나머지 학교들도 가만히 앉아서 로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는 않고 있다. 이를테면 취업알선기구를 통해 우수 학생들이 인턴십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이력서를 관계기관에 배포하거나, 무료 화상회의시설을 이용해 로펌 담당자가 학생들을 면담할 수 있게 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참고자료: Ursula Furi-Perry, "Do law firms LOVE your law school?", National Jurist, Sep. 2007, Vol.17, No.1, pp.30-36.) ▲

 

CNN 현장보도의 기린아 앤더슨 쿠퍼

2007년 4월 버지니아텍에서 총기 참사가 벌어졌을 때 세계의 언론이 현장에서 보도를 하는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끈 리포터가 있었다. 그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쉴 새 없이 사건 전말을 보도하고 있었는데, 젊어 보이지만 흰머리를 하고 고개가 약간 삐딱한 채 말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가 바로 CNN의 간판 프로 "360°"의 진행자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말리아 종족분쟁, 사라예보·보스니아 내전, 쓰나미가 덮친 스리랑카 해변, 이라크의 바그다드,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안즈 등 큰 사건 현장마다 쫓아다니며 전세계의 시청자들을 감동시킨 발로 뛰는 저널리스트(globe-trotting reporter, 1997년 ABC 방송의 다이아나 왕세자비의 장례식 현장보도로 에미상을 수상함)였다.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던 그의 회고록(Dispatches from the Edge, 2006) 첫머리에는 가슴 아픈 개인사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철도왕 밴더빌트 가의 상속녀이고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인 Gloria Vanderbilt)는 상류층 인사들과의 교제가 많았는데(모친의 두 번째 남편은 유명한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였음) 그가 11살 때 아버지가 심장 수술을 받다가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형마저 과도한 스트레스를 못 이겨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무엇으로도 보충할 수 없는 상실감의 극복이 그의 삶의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사람은 살아남고 어떤 사람은 죽는 현실(Why do some people thrive in situations that others can’t tolerate?)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내면의 고통을 외부 세계의 고통스러운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007년 8월 초 여름 휴가로 TV에서 잠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8월 말에는 카트리나 참사 2주년을 맞는 뉴올리언즈에서 쉴 새 없이 말을 하면서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는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 서재에 있는 큰 지구의를 돌리면서 세계에는 많은 나라와 인종이 살고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예일대에서 저널리즘이 아닌 정치학과 국제관계학을 전공하였는데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이야기꾼(storyteller)의 기질과 유머 감각으로 TV 저널리즘의 기린아가 되었다.

그러한 앤더슨 쿠퍼가 독서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경미한 난독증(mild dyslexia)이 있다는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가 TV 토크쇼에 나와 스스로 밝힌 사실이지만 예일대를 나오고 청산유수로 말을 하는 그에게도 남 모르는 고민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뉴스 보도를 하는 데스크에는 기사원고가 아니라 노트북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40세가 되었는데도 아직 미혼인 것은 그가 '게이'이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워낙 자유분방했던 모친에게 너무 데어 그런 것 같지만(그가 태어났을 때 작가인 그의 아버지와 네 번째 결혼을 한 모친은 마흔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돈 많고 인기 많은 사교계의 여왕이었음) 돈도 잘 벌고(CNN에서의 연봉이 4백만달러라고 함) 스마트하게 생긴 남자에 대한 선망과 시기심의 발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9월 4일 주목할 만한 인터뷰를 하였다. 그의 뉴욕 스튜디오에 디나 맥그리비(Dina McGreevey) 전 뉴저지 주지사 부인을 초청하여 그의 남편(Jim McGreevey)이 사임하던 날의 소감을 물어본 것이다. 아이다호의 크레이그(Larry Craig) 상원의원이 미네아폴리스 공항 화장실에서 동성애자 같은 행동을 한 게 문제가 되어 가족들을 둘러세우고 의원직 사퇴의사를 밝힌 직후였다.
앤더슨 쿠퍼의 성적 정체성(sexual orientation)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기분이 묘했을 것 같다. 그는 섹스 스캔들로 낙마한 미국 정치인의 사례로서 2004년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하고 사임한 짐 맥그리비스 전 뉴저지 주지사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런데 포르투갈 이민자인 왕년의 뉴저지주 퍼스트 레이디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악몽이 시작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그 자리에 나란히 서야 했던 배우자로서의 고통과 번뇌(pain and anxiety)를 참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빼어난 미모의 그녀는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신부가 되려는 별거 중인 짐 맥그리비스와 어린 딸의 양육권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는 중이다.
그의 모친 역시 어린 나이에 막대한 신탁재산의 관리와 양육권을 둘러싸고 외할머니와 고모할머니 사이에 벌어진 법정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을 잘 알기에 인터뷰를 하는 앤더슨 쿠퍼의 심정도 착잡했을 것 같다. ▲

 

헐리웃 볼에서의 핑크 마티니 공연 관람

LA에 살면서 꼭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여름철에 헐리웃 볼(Hollywood Bowl)에서 열리는 공연 관람이라고 한다. '보시기(bowl)'라는 말 그대로 헐리웃 언덕의 경사면에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공연장(amphitheater)이다.
헐리웃 볼에서는 주로 가벼운 분위기에서 들을 수 있는 클래식 공연이 많은데 종종 한국 가수들이 교포 위문공연을 갖기도 한다. 그 동안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아파트단지의 ESL 회화선생으로부터 여름 시즌 마지막 공연을 보러 가는 게 자기네 가족의 전통이라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티켓을 예약하였다.
여름 마지막 공연을 보름 앞둔 터라 거의 매진된 상태였는데 핑크 마티니(Pink Martini)라는 재즈 그룹의 연주를 인터넷을 통해 예매할 수 있었다. 헐리웃 볼은 멀찍이 차를 주차해 놓고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하므로 집에서 가까운 헐리웃 불르바드/하이랜드 애브뉴 환승주차장에 차를 세우기로 했다.

9월 14일(금)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헐리웃 거리부터 구경에 나섰다. 마침 주차장이 마침 중국극장(China Theater) 바로 옆이어서 구경거리가 많았다. 극장 앞 보도에는 유명한 배우들의 손바닥과 구두를 찍어놓은 기념패널이 즐비했고, 인기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분장을 하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었다. 정말 조니 뎁 비슷하게 생긴 캐러비언 베이의 '스패로우 선장'도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이날 공연은 흑인 지휘자 토마스 윌킨스(Thomas Wilkins)가 지휘하는 헐리웃 볼 오케스트라(LA교향악단을 야외공연에 적합하게 편성한 것)가 경쾌하게 카르멘 환상곡(Carmen Miranda Fantasy) 등 클래식 소품을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지휘자는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간단한 해설을 곁들였다.
헐리웃 볼의 앞쪽은 테이블까지 있어 웨이터가 음식 시중을 들고 있었고, 우리가 앉은 뒤쪽은 나무 벤치에 앉아 피크닉 박스에 채워 온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먹으면서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피자를 여러 판 들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그룹도 많았다. 헐리웃 볼은 음향도 썩 좋았지만, 무대 양옆으로는 대형 스크린이 두 개씩 무대를 보여주고 있어 뒤에서도 관람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드디어 오늘 공연의 주인공인 14인조 핑크 마티니(www.pinkmartini.com)가 등장했다. 이 그룹은 대표 겸 피아니스트인 토마스 로더데일(Thomas Lauderdale)이 하버드대학 동창인 차이나 포브스(China Forbes)를 보칼로 하고 관악과 현악, 타악을 적절히 배합하여 1994년에 창단한 밴드이다.
이들은 흘러간 빅밴드 뮤직을 영화음악으로 많이 편곡하여 세계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오늘의 레퍼토리는 옛날 보스톤의 코코넛 그로브에서 연주되었던 193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음악과 영화음악들이었다.

리드 보칼은 하버드대 학사 출신답게 구사하는 언어만 해도 영어는 물론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등 종횡무진이었다. 이들은 대표곡 "Hey, Eugene"도 열창하였는데, 처음에는 연인의 이름 "Eugene"을 "You're cheating"(거짓말이야)으로 잘못 알아들었음에도 뜻은 대강 통하는 듯 했다. 또 "Amado Mio"를 부를 때에는 옆자리의 동반자에게 속삭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중간에는 80, 90이 넘은 왕년의 명가수 할아버지(Henri Salvador)와 할머니(Carol Channing)가 나와 노익장을 과시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곡을 알 수 없었지만 노.장년층 관객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매우 흥겨워했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라벨의 볼레로(Volero) 연주에 맞춰 불꽃과 폭죽이 터지는 장면이었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스케일의 폭죽놀이는 아니었지만 효과음악처럼 음악에 맞춰 불꽃들이 계절이 바뀌는 밤하늘을 수놓았다.
오늘 공연은 밤 8시 반에 시작하여 10시 50분에 모두 끝났다(중간에 20분 인터미션). 우리가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헐리웃 불르바드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주차시간이 늘어난 탓에 주차요금으로 10불을 내야 했다(위쪽에 자리한 L석 티켓은 [$27+수수료]/인) ▲

 

캘리포니아에서 활기를 띠는 줄기세포 연구

9월 10일 UCLA 학교 주차장에 들어가는데 새로운 안내판이 보였다. 기부금 증정식 기자회견장에 오는 참석자들을 위한 주차안내 표지판이었다. 무슨 컨퍼런스나 음악회 같은 학교 행사는 이처럼 주차장 안내표시를 보고 아는 경우가 많다.

라디오에서는 슈워제네거 주지사와 비아라이고사 LA시장, 학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브로드 재단(Eli and Edythe Broad Foundation)에서 UCLA의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2천만달러(185억원)를 기부하는 증정식이 있을 거라는 뉴스를 전했다.

금번 기부금을 계기로 UCLA에서는 줄기세포생물의학연구소(Institute for Stem Cell Biology and Medicine)의 이름을 '브로드 재생의학 줄기세포연구센터'(Eli and Edythe Broad Center of Regenerative Medicine and Stem Cell Research)로 바꾸고, 기부금도 연구실험장비 도입과 우수 연구자 지원에 쓸 예정이라고 했다.
브로드 재단에서는 2006년 2월 남가주대(USC) 의과대학에 25백만달러를 기부한 바 있으니 대학간에 선의의 경쟁을 붙이는 것 같다. 브로드 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캘리포니아가 줄기세포 연구를 선도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이들 대학의 연구성과를 보아가며 향후에도 더 많은 기부를 할 의사를 밝혔다.

현재 미 연방정부는 생명침해의 소지가 있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자금지원을 규제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2004년 주민투표에서 찬성을 얻은 '71 제안사업'(Proposition 71, 일명 "California Stem Cell Research and Cures Act")의 일환으로 파킨슨씨병, 당뇨병 등의 치료를 위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총 30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할 예정이다.
지난 5월 캘리포니아 주대법원에서는 71 제안사업의 위헌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주정부가 공채를 발행하여 그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까지 주정부 대여금이나 기부금에 의존해온 대학들은 연구비를 타낼 수 있는 길이 더 넓어진 셈이다.

LA에 있는 유대계 세다-시나이병원(Cedars-Sinai Medical Center)에 갔을 때에도 곳곳에 기부자들의 명패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지난 5월에는 작년에 뇌종양으로 작고한 쟈니 코크란 변호사(Johnnie L. Cochran, Jr. 그 자신이 OJ 심슨 살인사건 변호에도 관여하였던, 미국 서부에서 제일 유명한 인신상해-의료사건전문 흑인변호사였다)를 기려 그 유가족이 뇌종양(brain tumor) 연구를 위해 5백만달러를 기부한 것을 가지고 병원 내에 코크란 뇌종양센터가 설립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핑크리본' 캠페인은 에스테 로더 화장품 회사가 시작한 유방암 퇴치(breast cancer awareness)를 위한 전세계적인 모금운동이다. 사실 미국 교수들은 공공재단은 물론 민간재단의 연구비(grants)를 끌어오는 일이 커다란 실적으로 꼽힌다.

미국의 돌아가는 사정과는 정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국가적 성원을 보내다가, 논문조작 사건을 계기로 그의 연구성과를 일체 부정해 버리고 정부연구비를 용도 외로 쓴 것을 가지고 몇 년씩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연구비 타 쓸 때 자칫하면 '국민의 혈세' 횡령범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연구성과가 중요한데도, 연구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고 그 돈을 가지고 회식비로 얼마나 썼냐, 소속 연구원에게 얼마 주었냐는 것부터 따지고 들기 때문이다.
우리 교수들도 일일이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고도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는, 일반기업이나 민간재단의 연구비 지원이 크게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UCLA에 거액의 기부를 한 재단 설립자의 이름(Broad)이 더욱 크고 넓게 느껴졌다. ▲

 

미국에서도 화제인 한국인의 교육열풍

LA에서 살면서 미국의 언론이나 주민들을 대해 보면 한국인은 여러 가지로 기록을 세우는[record making] 민족이다. 한국인들의 "빨리 빨리"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며[the opposite end in the spectrum might be African-Americans], 그 부지런함은 이곳 정치인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their diligence overwhelmed the Jewish immigrants].
지난 9월 13일 LA 한인타운을 방문한 민주당 클린턴 상원의원도 단기간에 60만불이 넘는 모금을 해준 한인 지지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현재 미국에 공부하러 온 학생은 조기유학생을 포함하여 10만명을 넘어섰고, 이들이 쓰는 돈은 한국에 대한 무역적자를 상당부분 해소하고 있다.

지난 4월 버지니아 공대의 조승희 사건은 조용한 줄만 알았던 한국인들이 화나면 무섭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the ferocity surprised the Asian gangs]. 사실 미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한국인으로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비롯해, 고홍주 예일대 로스쿨 학장, 강영우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 이희돈 WTCA 수석부회장, 손성원 LA한미은행장 등 셀 수 없이 많다[the most emerging ethnicity in the U.S.].

재미 언론인 이영아 씨가 취재한 "미국을 빛내는 한국인"만 해도 50명이 훌쩍 넘는다. UCLA에도 구강암의 세계적 권위자인 박노희 치과대학장, 여러 차례 우수교수 표창을 받은 로스쿨의 제리 강 교수 등 여러 분이 있다. 11월 6일 전기공학자인 스티브 강 교수는 2005년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으로서 10번째로 설립된 연구전문 대학인 머시드 분교(Univ. of California, Merced)의 총장(chancellor: 10개의 분교를 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은 전체로서 president가 있고 각 분교마다 chancellor가 있다)으로 취임하였다.

LA 타임스 10월 23일자 기사("Rethinking an emphasis on achievement" B2면)를 보면 한국인들의 지나친 교육열기는 자녀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종종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기사에 소개된 다음의 에피소드는 미국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지난 여름 캘리포니아 주립대 리버사이드 분교의 에드워드 장 교수는 LA 코리아타운에 있는 교육문화회관에서 30여 교포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리더십과 정체성"(leadership and identity)에 관한 강의를 한 후 "버지니아테크 총기난사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모두들 묵묵부답.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느냐"는 질문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장 교수는 미국에서 성장한 교포 학생들의 DNA에도 "어른들 말씀에 감히 토를 달지 않는" 한국식 유교전통이 남아 있다(Confucian upbringing)고 진단했다.

그 결과 삼강오륜식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나 향학열이 높은 것은 좋지만, 종종 부모-자식간에 갈등을 초래하고, 아이비 리그 학교에 못 들어가면 아예 공부를 못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는 것이다. 사실 LA 지역만 해도 고등학교 중퇴자가 태반(흑인과 히스패닉 청소년들의 학업포기는 사회문제가 될 정도이다)인데, 버클리대나 UCLA에 입학하려면 스트레이트 'A'를 받아야 하고, UC 리버사이드만 해도 상위 10% 안에 들어야 한다.
또 공부만 잘 해도 합격하는 것은 아니다. 버지니아테크의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이나 스탠포드대학 기숙사에서 수개월간 가짜학생 노릇을 한 어느 교포학생의 케이스는 한국이민 자녀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LA 타임스는 그래도 많은 한인 가정에서는 1.5세대, 2세대 자녀들이 미국식 환경에서 장성함에 따라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하여 의사, 변호사, 회계사 같은 부모가 원하는 '사'자 붙은 직업 대신 자녀들의 적성에 맞고 그들이 원하는 경찰관 같은 직업을 택하도록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미국 로스쿨 졸업생들, 희망 끝 고생 시작

9월 24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은 제1면(A1)에서 로스쿨 졸업생들의 형편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A law degree isn't necessarily a license to print money these days)고 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일부 졸업생의 경우 로스쿨에 다니면서 빌려쓴 대출금이 10만불을 넘어섰으나, 취업이 날로 어려워져 의료보험도 없이 시간당 20-30불을 받고 일하는 계약 변호사(contract attorney with no benefit)도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 원인은 1980년대까지 급성장세를 보였던 법률시장이 1988년 이후 20년 동안에는 GDP 성장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장을 보여 전반적으로 변호사들의 일거리가 줄어든 반면 로스쿨은 196개로 늘어나고 매년 4만3천여 명의 JD취득자가 배출됨으로써 수급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도시 대형 로펌의 잘 나가는 변호사들의 수입은 크게 늘었지만, 75%에 이르는 대다수의 변호사들은 인플레를 감안한 실질소득이 줄어들었다. 졸업생의 14%가 진출하는 정부기관이나 공익단체의 경우에는 그 소득증가율이 미국 평균가계의 소득증가율의 절반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누구나 선망하던 고소득 직종이던 변호사가 90대 이후에는 다른 직업에 비해 수입이 별로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졸업 후 고소득을 예상하고 일단 학자금대출(student loan)을 받아 썼으나 수입이 기대에 못 미치는 바람에 심지어 월급의 60-70%를 빚 갚는 데 쓰고 허덕허덕 하는 변호사도 많다고 한다.

로스쿨 졸업생의 55-58%가 진출하는 개업변호사(private practice)의 경우 경기를 많이 탄다. 호황 때는 부동산 기타 자산거래 건수가, 불경기 때는 파산사건의 수임이 많아진다. 그런데 최근 들어 주마다 인신상해(personal injury) 사건, 의료사고(medical malpractice)의 집단소송, 타주 원고에 의한 소송을 규제하고, 증시의 활황으로 증권관련 집단소송이 격감함에 따라 일거리가 크게 줄었다.
오직 대기업을 상대하고 국제거래와 금융거래를 취급하는 대형 로펌들만 형편이 좋아졌을 뿐이다. 대형 로펌에서는 학생대출을 많이 쓴 우수 졸업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금년 들어 초임변호사의 연봉(starting salary)을 16만불로 올렸다.

상황이 이렇게 부익부 빈익빈(rich getting richer, poor getting poorer)으로 흐르자 로스쿨에서는 일부 고소득 졸업생을 기준으로 한 평균연봉을 PR할 게 아니라 시급제 변호사까지 포함한 실태를 파악해 학생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자성론이 일고 있다. 학생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불러일으켜 막연한 기대감에 학자금대출을 얻어 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현재 그렇게 하는 로스쿨은 거의 없다.
최근 들어 로스쿨 졸업생들이 평균 8-9만불에 이르는 빚더미(debtor's prison)에 올라앉은 것은 학교측이 등록금을 엄청나게 올렸기 때문이다. 로스쿨의 등록금 인상폭은 지난 20년간 물가상승률의 3배를 넘어섰다.

이제 2009년 3월에 오픈할 한국의 법학전문대학원도 다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많은 학생들이 커다란 기대를 걸고 비싼 등록금을 납부하고 로스쿨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3년 후에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따더라도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첫 월급을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하물며 시험에 낙방하고 고학력에 걸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현실이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절반의 책임은 학교와 교수가 나누어 져야 할 터인데 이를 어쩐다? 국내에서 변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법적 다툼이 크게 늘어나도록 부추기거나, 뉴질랜드처럼 변호사를 해외로 수출하는 길이라도 찾아야 할 것인가. ▲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LA 지역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보좌관과 유럽개발은행(EBRD) 총재를 역임한 자크 아탈리는 그의 새 저서 [미래의 물결]에서 로스안젤레스는 앞으로도 태평양 연안의 거점도시로서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뉴욕이 갖지 못했던 실리콘 벨리와 항공산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헐리우드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끄는 인재들과 뛰어난 아티스트들이 모여 있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곳에서 발명된 인터넷과 휴대폰은 새로운 노마드(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지적 유목민) 시대를 열었다.

LA에서 1년 가까이 살아보니 LA를 중심으로 한 남가주 지역(Greater Los Angeles)은 매우 활력이 넘치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도 농작물 재배에 유리한 데다 저임의 노동력이 풍부하여 오래 전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일찍부터 항공산업, 영화산업이 발전하였고, 소득수준이 높은 도시 지역을 기반으로 다양한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또 큰 항구를 끼고 있어 태평양 연안국가인 일본, 한국, 중국, 인도와의 교역에서도 새로운 업종이 발생하고 있다.

LA 타임스는 10월 23일자 특집 "Made in LA"에서 LA 지역에서 활기를 띠고 있는 여러 제조업종을 A에서 Z까지 소개했다. 중국 등 해외수입품의 저가공세에 시달려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첨단기술을 적용한 고가화 전략과 다양한 수요에 부응하는 맞춤생산으로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LA 카운티에는 종업원 250인 이하의 중소기업이 제조업체의 3분의 2에 달하는데, 이들 기업이 대부분 활기차게 운영되고 있어 미국 어느 곳보다도 고용기회가 많고(462,300개의 일자리) 숙련된 노동력이어서 임금수준도 평균치보다 14%나 높다고 전했다.
다만, 택지개발 등의 영향으로 타 지역보다 새로운 공장부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데다, 기업에 대한 규제가 많고 에너지 가격이 높은 것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 Manufacturing A to Z
Automobile wheels(자동차 바퀴), Boxes(포장용 카드보드 상자), Coffins(목재 및 금속 관), Denims(청바지용 데님), Electric guitars(고급 전기기타), Floor coverings(카펫 등 바닥재), Guard booths(방탄 경비초소),
Hot dogs(핫도그용 식자재), Integrated circuits(반도체, 전자제품), Jewelry(주얼리 등 장신구), Kibble(애완동물 사료), Lights(LED 등 조명기구), Mannequins(디스플레이 마네킹), Novena candles(제례용, 장식용 초),
Optical equipment(전자식 의안, bionic eye), Plates(접시 등 식기류), Queen-size mattresses(침대용 매트리스), Ramen(라면), Soap(고급비누), Transmission cables(하이테크 케이블), Umbrellas(야외용 파티오 양산),
Vitamins(비타민, 식이용품), Weights(피트니스용 바벨), X-ray apparatus(X레이 기기), Yogurt(핑크베리, 레드망고 등의 요거트), Zamboni(스케이트장 얼음표면 정빙기) ▲

 

변모하는 미국 사회의 인종구성

LA에 몇 달 살다 보니 미국 사회의 이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미국 사회의 인종구성과 분포였다. 내가 사는 Park La Brea 아파트단지는 2층짜리 가든하우스와 12층 타워형 아파트로 구성된 모두 4,222세대가 사는 미국에서도 보기 드문 큰 아파트 단지(2차 대전 당시 제대군인들의 주거안정 대책으로 건설되어 1945년에 완공되었음)이다.
렌트비가 만만치 않기에 주민들은 연금으로 렌트비를 커버할 수 있는(렌트비 연 인상률이 5%로 제한돼 있어 오래 살수록 싸짐) 백인 노인이 많고, 미국에 새로 자리를 잡는 아시아와 유럽계 이민자들이 많다. 우리가 사는 고층아파트는 1/3이 한국 이름을 가진 입주자들이다. 그러나 흑인(African-American)이나 히스패닉(Latino)은 아주 극소수이다. 말하자면 렌트비가 입주자들의 인종구성을 결정지은 셈이다.

그러나 큰 길(3rd Street)을 건너 팬퍼시픽 공원에 가보면 늘 멕시코인들이 한 편에서는 축구를 하고 피크닉 에리어에서는 가족 단위로 몰려와 바비큐를 해먹으며 놀고 있다. 집이 비좁으니 시간이 나면 공원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주변의 주택단지에는 유태인들이 많이 산다. 곳곳에 유대회당(synagogue)과 유대음식을 파는 상점(대표적인 것이 주로 유기농 청정식품을 취급하는 Trader Zoe와 Erewhon)들이 많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970년대 초 백인 인구는 전체 인구 중 88%였고 라틴계와 아시아계는 합해서 1.4%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는 백인 인구는 80%대로 줄어들고, 라틴계와 아시아계는 10% 가까이 늘어났다.
1995년에 이르러 백인은 73%, 라틴계 11%, 아시아계가 4%를 차지했고, 몇 년 전부터 라틴계 인구가 14%를 넘어 흑인인구를 추월했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에는 백인 53%, 라틴계 24%, 흑인 15%, 그리고 아시아계 9%가 될 것이라고 한다(김봉중,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소나무, 2001).

이미 라틴계 인구의 증가는 미국의 정치나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가장 큰 쟁점 중의 하나가 영어 외에 스페인어도 공용어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통령 입후보자들은 라틴계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이름부터 스페인어로 읽어야 하는 라틴계 정치인들과의 친분과 유대를 과시하고 다닌다.
또 국토안보부(DHS: Dept of Homeland Security)에서는 불법체류자(undocumented immigrant)를 단속하기 위해 애쓰지만 고용주들은 저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이 없으면 사업을 못한다며 각종 소송과 청원을 통해 그 시행을 늦추려 애쓰고 있다.

당초 불체자들에게도 운전면허증을 발급하기로 했던 뉴욕 주지사(Eliot Spitzer)는 이민사회의 찬사를 받고, 이 때문에 많은 캘리포니아의 불체자들이 대거 뉴욕으로 몰려갈 채비를 했었다. 그러나 뉴욕주에서도 REAL ID법*의 시행을 강행하려는 DHS와 반이민자 그룹의 압력에 못 이겨 2008년 말부터 체류신분에 따른 여러 종류의 운전면허증(multi-tier driver license)을 발급하기로 했다. 이는 주로 멕시코와 아시아계인 불체자들이 설 땅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REAL ID Act :
2005년에 제정된 이 법률(정식 명칭은 Emergency Supplemental Appropriations Act for Defense, the Global War on Terror, and Tsunami Relief, 2005)은 9.11 사태가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쉽게 취득한 불법체류자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운전면허증과 같은 신분증의 발급 시 출생증명서(외국인은 여권),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 등의 서류를 제출하게 하고 있다.
2007년 3월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이민자단체와 중소기업인들의 반대, 그밖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연기되고 있다. DHS는 각 주와 협상을 벌여 구체적인 시행을 서두르고 있는데, 이 법에 따라 연방정부기관은 2009년 12월 31일 이후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운전면허증 등의 신분증을 받지 못하게 된다.

한국도 조만간 비자면제국이 되면 많은 관광객들이 미국에 몰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체류기간을 넘겨 계속 미국에 눌러 앉을 사람들에게는 미국은 '기회의 땅'이 아니라 '배척하고 착취하는 나라'가 될 공산이 큰 것이다. ▲

 

유태인과 닮은 듯 닮지 않은 한국인

LA에서 여러 달 지내면서 이해의 폭을 상당히 넓힌 것이 유태인들이다.
필자의 전공분야인 프라이버시권(right to privacy)을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홀로 있을 권리'(right to let alone)라고 최초로 정의한 루이스 브렌다이스(Louis Brandeis)가 나중에 윌슨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관이 된 최초의 유태인이었고, 또 필자를 UCLA로 초청해준 린 로푸키 교수도 유태인, 아파트 단지 내 ESL 회화교실의 자원봉사 교사인 지타 할머니, 린 아주머니 역시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회화교실 시간에 유태인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고 12월 달에 하누카(Hanukkah 성전정화기념 빛의 축일: 2007.12.4-11)를 8일간 지킨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한국인과 유태인은 신기할 정도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도 '동양의 유태인'이라는 말을 곧잘 한다.
실제로 한민족이 이스라엘의 사라진 한 지파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 예컨대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유기천 박사는 그의 영문 저서 [World Revolution, 1997]에서 한국인과 유태인은 29가지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최종고 교수, [Law and Justice in Korea, 2005, p.367). 유 박사는 인류학적으로 접근하였으나, 최근에는 문화고고학적으로 이를 입증하려는 실증적인 노력도 행하여졌다. 소설가 김성일 장로 등의 창조사학회 탐사팀은 1997년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이후에 착지한 아라랏산에서 바이칼 호수-하얼빈-심양까지 셈족이 이동한 경로를 추적하여 [한민족기원 대탐사-셈족의 루트를 따라서]라는 보고서를 출간한 바 있다. 탐사 결과 고대의 민종이동 루트가 인종과 언어, 토기와 생활도구 등 문화와 풍습 면에서 많은 연관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1970-80년대에 미국에 이민온 한국 교포들은 오래 전부터 유태인들이 취급하던 세탁소, 편의점, 선물가게 등을 많이 인수했다. 언어가 활달하지 않아도 부지런하기만 하면 이민자들이 어지간히 꾸려갈 수 있는 직종들이다.
유태인들이 부모 세대는 힘든 일을 하면서 자녀들은 영재교육을 시켜 상류 전문직인 의사, 변호사, 교수, 기자, 금융가 등의 직업으로 대부분 전환시켰다. 우리 동포들도 2세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시피 하는 것은 닮았지만 아직은 거기에서 그친다(박재선 지음, 해누리 펴냄, 제2의 가나안 유태인의 미국, 278-289쪽).

한국인과 유태인은 모두 평균적으로 머리가 좋고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 광적인 열의를 갖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유태인은 미국 내 총인구가 백만 명 규모이던 시절부터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는 교민수가 2백만명, 유학생이 10만명에 달하는 데도 유태인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유태인들은 정치적 유력자들에게 아낌없이 헌금을 하고 조력을 다해 고위직에 많은 유태인들을 심어놓았다.

다른 점도 상당히 많다.
한국인은 유난히 부동산에 집착하는 반면 오랜 디아스포라를 겪었던 유태인은 지식의 축적, 귀금속이나 돈 거래에 능하다.
한국인이 남과의 경쟁에 이겨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반면 유태인들은 각자가 처한 사회에서 최대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 개발에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다.
유태인은 논리적이고 이지적인 데 반해 한국인은 기분이나 감성이 앞서는 것이 다르며, 한국인들은 공동체,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이나 자선, 기부에 몹시 인색하다.
유태인들은 남이 하는 일에 덩달아 따라하는 일이 없이 각자 독창성 있는 일 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유태인들도 이제는 대부분 미국화되어 유태인의 전통을 이어 온 여성들조차도 본인은 전통교육을 받았음에도 자녀들이 이방인(특히 유색인)과 결혼하는 것도 묵인한다고 한다. 하물며 종교도 유대교를 고수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고 하였다. ▲

 

'잊게 해야 한다'는 프라이버시 특강

11월 15일 하버드대 행정대학원(Kennedy School)의 빅터 마이어-쇤버거(Viktor Mayer-Schoenberger) 교수가 UCLA에 와서 특강을 했다.
정보통신 및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나도 행사를 주관한 CENS(임베디드 네트워크 센터)의 Reading Group에 참여하고 있고, 강의주제에도 관심이 있어서 시간을 내어 참석하였다.

강의란 저렇게도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전면의 스크린에는 핵심 개념만 차례로 비추면서 독일식 정확한 발음으로 책을 읽듯이 강의를 했다.
원고를 보고 낭독한다는 게 아니고 그대로 받아 적으면 논문이 될 것 같았다는 의미이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스태시 쉬나이더라는 젊은 여자가 공립학교 교사가 될 수 없었던 사례를 들며 강의를 시작했다.
그녀가 대학 시절의 어느 행사에서 해적 모자를 쓰고 술을 마시는 장면의 사진이 MyFaceBook 사이트에 올려져 있었는데 교육구청에서 그러한 모습은 교사로서 적합하지 않다며 임용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잊어버리게(forgetting) 마련이지만 정보통신망(global networks)은 영구히 기억(remembering)하기 때문에 종종 이런 일이 빚어진다. 구글(Google)의 강력한 검색엔진은 몇 년 전의 사실도, 사진도 그대로 찾아서 보여주므로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의 엄청난 저장능력(storage)과 검색기능(retrieval), 그리고 어디서나 접속해서 열람(global access)할 수 있는 특성에서 연유하는데, 사람들이 이것에 얽매이게 되면 앞서 말한 부작용(privacy/sanity)이 생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존중하여 기술적으로 규제하거나,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 목적을 명백히 하여 목적외 이용을 금하는(purpose limitation) 방안이 실시되었다.
2차 대전 때 화란 정부가 1930년대에 복지행정 목적으로 주민들의 종교까지 조사해 놓은 것이 고스란히 나치 독일의 손에 들어가 화란의 유태인들은 숨을 곳도 없이 홀로코스트의 제물이 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쇤버거 박사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부는 애당초 국민들의 세세한 신상정보를 알 필요가 없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매우 간단한 방법을 제안했다.
컴퓨터망에 저장되는 모든 정보의 유효기간(expiry date)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예컨대 인터넷 검색정보나 디지털 사진의 유효기간의 디폴트값을 초단기로 정해놓고 필요한 경우에만 이를 연장하도록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한 유해한 정보로부터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강연 요지였다.

여러 참석자들이 잇달아 질문을 하였는데, 독일과 영국, 미국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한 그는 답변에 막힘이 없었다.
나는 기록매체(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 등)에 따라 자연적으로 유효기간이 정해지던 것이 "영구보존이 가능한 신기술의 등장으로 새로운 고민이 생겼구나", "이것을 공공정책으로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는구나"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 ▲

 

법학교수와 '학문의 자유' 논란

2007년 가을 LA를 중심으로 미국 법학계를 소란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2009년 개교 예정인 캘리포니아 주립대 어바인 분교(UC Irvine)의 로스쿨 학장으로 듀크대학교의 저명한 헌법학자인 어윈 케머린스키(Erwin Chemerinsky) 교수가 9월 초에 임명되었는데 1주일만에 취소가 된 것이다.

표면상의 이유는 학교 행정상의 착오라고 했지만, UC 어바인이 인사를 뒤집은 것은 신임학장이 너무 진보적인 견해를 취하여 주립대학으로서 정치적 입지가 곤란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케머린스키 교수는 사형수의 연방법원 재심을 불허하기로 한 곤잘레스 법무장관의 방침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는 등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a lightning rod for conservatives)이 컸던 것이다.
이에 UC 어바인 교수들이 학문의 자유(academic freedom)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집단적으로 반기를 들고, 전국의 법학교수들도 보수-진보 성향에 관계없이 UC 어바인 측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 중의 대표적인 학자가 UCLA의 제리 강 교수였다.
강 교수는 학장직은 테뉴어를 받은 교수가 가는 승진 보직인데 특정 정치적 입장을 취하면 학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강 교수는 그의 통신법 시간에 설명한 미 연방대법원의 도서관협회 판결[United States v. American Library Association, Inc., 539 U.S. 194 (2003)]을 소개하였다.

이 사건은 도서관에 재정지원을 하면서(LSTA) 인터넷상의 음란물을 차단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요구한 아동인터넷보호법(CIPA) 조항의 위헌성을 다룬 연방대법원 판결이다.
전국도서관협회는 이 조항이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건(unconditional condition)을 붙인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당시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설시한 다수의견은 공공도서관에 설치된 인터넷이 공공의 장소(public forum)도 아니며, 의회가 청소년들이 음란물에 접속할 수 없도록 이들 도서관에 돈을 주어가며 차단 프로그램을 설치하라는 것일 뿐, 이것을 설치하기 싫으면 정부 돈을 안 받아도 되고 필요하면 이 프로그램을 무력화할 수도 있으므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도록 유도한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제리 강 교수는 Pico 판결을 예로 들어 도서관이 어떠한 고려 하에 도서를 구입하는 것과 장서의 일부를 퇴출하는 것은 헌법상의 판단이 다르다면서(intermediate scrutiny v. strict scrutiny) UC 어바인이 케머린스키 교수를 학장으로 선임한 것과 그 임명을 취소한 것은 타이밍 상으로 질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공박했다.
즉 여러 후보자 중에서 케머린스키 교수를 선임한 것은 공공도서관이 책을 구입하는 것처럼 별 문제가 없지만, 그의 임명을 취소한 것은 도서관 장서를 퇴출하는 것처럼 헌법상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UC 어바인은 케머린스키 교수의 학장 임명을 취소한 지 1주일만에 그를 학장에 재임명하고 케머린스키 교수가 다시 이를 수락함으로써 사상 유례가 없는 학장 임명-취소-재임명-재수락의 인사절차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모든 법학자들이 들고 일어선 덕분에 법학교수가 학술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보다 확고하게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모 대학 총장이 어느 후보의 선대위에 참여하였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고 선거 캠페인에서 발을 뺀 적이 있다. 교수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사심(私心) 없이 학술활동에 관한 것이어야 '학문의 자유' 이름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법학교수들의 지뢰밭 - e메일과 블로그

UCLA 로스쿨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강단에 서서 강의를 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하였다. 그것은 한국에도 미국식 로스쿨이 도입이 되고 나도 영어로 강의를 하기로 학교에 신청을 하였기에 더욱 실감이 났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내가 "강의를 할 때에는 이러 저러한 것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학생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관찰하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오는 학생, 시간 중에 e메일 박스를 열어보거나 카드게임을 하는 학생,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는 학생, 심지어는 교과서도, 노트북 컴퓨터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학생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외모와 피부색, 이름에서 인종적 구별이 가능하고 그들의 수업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교수의 입장에서 철저히 자기절제를 하지 아니하면 자칫 차별적인 발언을 하기 쉽다.
실제로 시카고에 있는 존 마샬 로스쿨의 어느 교수는 "유대인 학생들이 흑인 학생들보다 공부를 잘하고 변호사 시험 합격률도 높은데 이는 종교적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냐"고 말했다가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그 교수는 수업이 끝난 후에 별다른 의도 없이 말한 것을 가지고 징계를 한 것은 부당하다며 학교를 상대로 1백만불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
UCLA 로스쿨의 리처드 샌더 교수도 흑인 학생들의 변호사시험 합격률이 저조한 것과 대학의 소수인종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분석하겠다고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시험위원회에 응시자들에 관한 통계자료를 요구하였다가 거절만 당하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위스콘신대 로스쿨의 캐플란 교수 역시 인종차별적인 언급이 문제가 되어 곤욕을 치렀다. 그는 형법시간 중에 중국, 북베트남, 라오스 일대에 사는 "몽족(苗族의 일파로 'Hmong'으로 표기)은 싸울 줄밖에 모르고, 라오스의 압제를 피해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주한 후에도 아시안 갱이나 범죄자가 되었다"는 설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한 중국 학생이 이것을 블로그에 올려놓는 바람에 캐플란 교수는 졸지에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그는 강간죄의 피고인이 이질적인 문화에 속한 경우 그의 문화적 관행이나 태도가 다르다는 변명(defense)을 많이 한다는 사례로 설명을 한 것인데(비슷한 케이스로 오래 전에 어느 교포가 어린아이의 고추가 귀엽다고 만졌다가 아동 성추행법으로 몰렸었다. 그 때 한국에서는 할아버지.할머니가 어린아이의 성기를 일쑤로 만진다고 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가까스로 중형을 면할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해당 언급만 블로그와 e메일을 통해 매스콤에 확대 보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사건은 위스콘신대 로스쿨 교수들이 캐를란 교수를 적극 옹호하고, 존 와일리 총장도 "인터넷 시대에 단편적인 발언(isolated remarks)이 국제적인 시비거리가 된 것은 유감이며, 문화적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이 좀더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일단 봉합이 되었다. 와일리 총장은 캐플란 교수의 표현의 자유나 강의기법 선택에 관한 학문의 자유를 제한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법을 잘 아는 법학교수이기 때문에 더더욱 인종차별적·성차별적 발언은 공석·사석을 막론하고 금기시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교수가 사석에서 한 말일지라도 어느 학생에 의해선가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인터넷 블로그나 e메일, 심지어는 UCC를 통하여 전세계에 전파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새로 문을 여는 로스쿨은 일반교양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고 비싼 등록금을 받고 전문가(professionals)를 양성하는 학교인 만큼 교수의 개인적인 훈화나 자칫 빗나갈 수 있는 사담(私談)은 절대 금물이고 철두철미 해당 과목의 가르칠 것만 가르치고 끝내는 수업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거침없이 빚을 지는 미국의 법대생들

지난 9월 하순 월 스트리트 저널이 미국 로스쿨에 경종을 울린 데 이어, 로스쿨 학생들을 독자층으로 하는 내셔널 쥬리스트 11월호에서도 커버스토리로 "감춰진 부채위기"(The hidden Debt Crisis)라는 특집을 다루었다.
이 잡지는 뉴욕 맨해튼 소재 뉴욕 로스쿨의 경우 학비가 3만8,600불인데 대도시의 비싼 생활비 덕분에 학생들이 졸업할 때에는 8만불 이상 빚을 지게 된다고 보도했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 받는 연봉이 대략 5만2,500불에서 12만5,000불 수준이므로 이를 감안하여 학자금 대출을 받고 상환계획을 세우도록 지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금년에 대형 로펌에 취업한 초임변호사의 연봉이 16만불을 넘어섰다는 뉴스도 있었지만 고액 연봉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또 이렇게 받는다 해도 각종 세금으로 50%를 떼고 필요한 생활비를 공제하면 월 1000불씩 빚을 갚기에도 빠듯한 실정이다. 하물며 보수가 박한 정부기관이나 공익단체에 취업하는 경우에는 더욱 힘들어진다.
내셔널 쥬리스트 지는 주립대 로스쿨 졸업생의 경우 2001-2002학년에 평균 4만6,499불의 부채가 있었으나 2005-2006학년에는 평균 5만4,509불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사립대의 경우는 같은 기간 평균 부채액이 7만8,763불에서 8만3,181불로 증가했다.

가장 우수한 집단이라고 하는 로스쿨 학생들이 왜 이처럼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는가?
첫째는 로스쿨의 학비가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주립대의 경우 1985년에 2,006불이던 등록금(그 주의 주민인 경우)이 지금은 1만3,145불로 올랐고(주민이 아니면 4,724불에서 2만2,987불로 증가), 사립대의 경우에는 같은 기간에 7,526불에서 2만8,900불로 껑충 뛰었다.

둘째, 로스쿨을 졸업하면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하에 학생도, 대출기관도 학자금 대출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통계에 의하면 2006년 졸업생 가운데 오직 14%만이 13만5천∼14만5천불의 소득을 올리고, 42%는 5만5천불 미만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무원이 되는 경우에는 연봉이 평균 4만8천불, 공익단체는 평균 4만불에 불과하다.
더욱이 변호사가 된 다음에 주당 70시간을 일해야 하는 데 지친 나머지 쉬운 일자리로 전직이라도 하면 수입이 줄어들고 학자금 상환은 더욱 어렵게 된다.

셋째, 로스쿨에 들어갈 때에는 집안의 재정지원도 거의 끊어지고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의 씀씀이도 옛날보다 커졌다. 반면 학교의 장학금, 학비 면제 혜택은 그 수혜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내셔널 쥬리스트 지는 알게 모르게 학자금 융자를 받는 법대생들이 크게 늘어났지만 상환계획은 갈수록 불투명해져 전국적으로 위기 수준에 도달해 있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뉴욕 로스쿨을 비롯한 일부 학교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학비를 어떻게 조달하고 학자금을 융자받는 경우 그 상환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1학점 짜리 코스(financial literacy program)를 운영하고 있다.
학교 당국도 이러한 실상을 알고 학생들에게 구체적인 사정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출을 받아 자동차나 집을 사는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 자동차나 집을 포기하면 되지만 학자금은 평생 일을 해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문을 열게 될 로스쿨도 의학전문대학원 수준으로 학비가 책정될 것이라 한다. 만일 직장인들이 직장을 그만 두고 3년간 로스쿨을 다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준비기간은 논외로 하고 4천만∼5천만원에 달하는 학비와 수백만원의 책값, 그 이상 가는 생활비를 조달해야 하는데 이 문제를 손쉽게 학자금 융자로 해결하려 든다면 졸업 후의 사정은 위에서 말한 미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스쿨에 뜻을 둔 사람들은 지금부터 변호사가 되어 누리게 될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로스쿨 진학은 유능한 전문변호사가 되기 위한 훌륭한 투자이긴 하지만, 그 못지 않은 위험부담과 희생이 수반되는 것임을 각오해야 할 것 같다. ▲

 

LA의 또 다른 명물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LA에 살면서 꼭 가보아야 할 곳 중의 하나가 다운타운에 있는 월트디즈니 콘서트 홀이다. 그 일대가 LA 시빅 센터이고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편에는 LA 카운티 법원청사가 있으므로 민·형사 소송사건이 아니더라도 주정차·교통법규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사람들도 이곳에 자주 오게 된다.

LA 교향악단과 합창단의 본거지이기도 한 이 콘서트 홀은 1987년 월트 디즈니의 미망인인 릴리안 디즈니 여사가 기부한 5천만 달러로 신축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기존 음악당인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Dorothy Chandler Pavilion) 옆에 2,265석의 오디토리엄이 15년만인 2003년 10월 준공되었을 때에는 인플레 등의 영향으로 총공사비가 몇 배로 치솟아 274백만달러에 달하였다고 한다. 디즈니 유족들과 월트 디즈니사에서 추가로 6천만달러 가까이 출연하여 오늘날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은 LA 남쪽 교외 애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 못지 않은 LA의 명소가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이 건물은 외양이 매우 아방가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예산절감을 위해 당초 석조로 마감하려던 것을 투박한 스텐레스 스킨으로 처리하여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처음 신축되었을 때에는 이 건물의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과 복사열로 주변 건물들의 시야를 가리고 냉방비가 급증하는 등 민원이 야기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5년 봄 건축가의 승인을 받아 문제가 된 구역의 금속 표면을 사포질(sand scraping)하고 무광택 처리를 하여 빛의 반사를 막았다고 한다.

콘서트 홀의 건물 구조도 특이하지만 LA 필은 미국에서도 손꼽는 교향악단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을 공연을 기다렸다가 한 달 전에 예약을 하고 추수감사절 휴일이 막바지에 이른 11월 24일 낮 공연을 보러 갔다.
'관점의 전환'이라고 할까 일반적으로 앉아보기 어려운 오케스트라 뒤편에 있는 오버뷰 석을 골랐다. 디즈니 콘서트 홀의 자랑거리인 무대 전면의 파이프오르간은 볼 수 없었지만, 뒤쪽 천정에 난 창으로 바깥 하늘을 볼 수 있었다. ▲

 

여성지휘자의 LA 필이 연주한 교향곡 신세계

11월 24일 하오 디즈니 콘서트 홀 설립자의 방(Founder's Room)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갔다. 밖은 옥상정원이어서 아직 점심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샌드위치를 먹기도 하고 관객들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입장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시 45분 오케스트라 뒤의 오버뷰 석으로 입장하였다.

오늘의 공연 중에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이라는 익숙한 레퍼토리가 있다는 것만 보고 골랐으나, 막상 프로그램을 받아보니 지휘자가 여성(Joana Carneiro)이었다. 바로 오케스트라 뒤의 좌석이기에 지휘자의 표정은 물론 지휘봉과 손끝의 미묘한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었다. 카르네이로 지휘자는 아주 우아하게 주빈 메타처럼 큰 팔놀림으로, 때로는 번쉬타인처럼 입으로 노래를 하듯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다.
첫 번째 곡은 사무엘 바버의 곡(Samuel Barber, First Essay for Orchestra, Op.12), 두 번째 곡은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첼로 이중 협주곡(Johannes Brahms, Double Concerto in A minor, Op.102)이었다.
중간 휴식시간 후의 세 번째 곡인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Antonin Dvorak, Symphony No.9 in E minor, Op.95, "From the New World")가 이 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여성 지휘자는 악보를 올려놓는 테이블을 치우고 마치 펜싱하듯이 지휘봉을 힘차게 휘둘렀다.
제1 악장(Adagio; Allegro molto)은 우리가 가 보았던 그랜드캐년과 옐로스톤을 다시 보는 듯 미국의 산과 계곡,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제2 악장(Largo)에서는 지휘의 패턴도 달라졌다.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꿈속의 고향(Goin' Home)"의 멜로디를 지휘할 때에는 한없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작곡자의 심정을 묘사하였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드보르작의 마음이 미국 체류 9개월째인 나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제3 악장(Molto vivace)에서는 칭칭이(triangle)와 심발즈까지 동원하고 미국의 어느 도시의 크고 작은 건설현장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제4 악장(Allegro con fuoco)에서는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미국의 산업과 큰 공장 내부에서 기계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피날레에서는 모든 관현타악기가 어우러져서 미국의 발전을 소리높이 외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오케스트라 뒤의 오버뷰 석에 앉아서 조명을 받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물론 저 앞쪽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청중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드보르작의 고향인 보헤미아의 애조를 띤 선율이었지만, 오늘의 여성 지휘자는 우리로 하여금 미국의 다이나믹한 풍광을 음악을 통해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쉽고 감동적인 조엘 오스틴 목사의 설교

어느 신자가 도대체 세상에 되는 일이 없다며 절망한 나머지 교회 목사를 찾아갔다. 목사가 종이를 주면서 왼편에는 감사할 거리를, 오른편에는 문젯거리를 쓰도록 했다. 신자는 왼편에는 아무것도 쓸 게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자 목사는 "부인이 돌아가셨다면서요? 집이 불탔다고요? 직장에서 해고되셨다니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리둥절해진 신자는 이내 목사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는 왼편에 건강한 아내, 아름다운 집, 번듯한 직장, 이렇게 한참 써 내려갔다.
그가 상담실을 나섰을 때 상황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넘쳐 있었다.
출처: Joel Osteen, Become a Better You(잘되는 나)에서 간추림

휴스턴 레이크우드 교회의 조엘 오스틴 목사의 설교는 TV를 통해, 설교집을 통해 미국은 물론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미국에 와서 TV를 통해 그의 설교를 들었을 때 우선 콜로세움(Coliseum) 같은 큰 예배당에 놀랐고 그 다음은 쉬운 말로 이어가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았다. 레이크우드 교회는 1만6천석의 체육관(arena) 구조이고, 다른 곳에서 열리는 오스틴 목사의 대중집회 역시 워낙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큰 경기장을 빌려야 한다.

최근에는 그가 새로 펴낸 책 [Become a Better You]으로 미국 논픽션 출판사상 기록적인 인세를 받게 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또 놀랐다. 그 동안 오스틴 목사의 책을 출판해 온 워너 페이쓰를 제치고 사이먼&슈스터사의 자회사가 출판을 하게 되었는데 선인세로 2백만불을 지급하고 향후 5-10년간에 걸쳐 출판사의 판매수익의 50%를 지급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출판관계자는 초판으로 3백만부가 발행되었으니 오스틴 목사는 새 책에서 적어도 1천만불은 벌게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조엘 오스틴 목사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그가 199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교회 강단을 물려받은 뒤로 1만명이던 신자가 3만5천명으로 늘어 미국 최대의 교회를 이끌고 있다. 휴스턴의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과 열의도 대단하다. 새 책을 가지고 미국과 유럽 투어를 하고 있는데 세계 각지로부터 방문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의 설교 메시지는 쉬운 나머지 솜사탕 같은 가벼운 신학(Theology Lite)으로 흐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메시지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기복중심의 복음(Prosperity Gospel)을 너무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가 정식으로 신학수업을 받지 않은 것이나, 공동목회를 하고 있는 빅토리아 오스틴 사모가 종종 구설수에 오르는 것도 흠이 되고 있다. 200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콜로라도 스키장으로 가족여행을 떠날 때 빅토리아 목사가 비행기 1등석에서 소란을 피워 연방항공청(FAA)으로부터 벌금 3천불을 부과받고 해당 승무원한테는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도 중에도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고, 자기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었겠지만, 레이크우드 교회 당회는 갑자기 소천한 존 오스틴 목사의 네째아들 조엘이 신학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교회 방송사업에만 종사하였을 뿐인데도 그에게 큰 교회의 강단을 맡겼고, 그는 열성적으로 교회와 신자들을 섬겼다. 현재 이 교회는 어느 교파에도 속해 있지 않다.

인종을 불문하고 조엘 오스틴 목사의 설교를 열광하며 듣는 사람들을 보면 시대가 요청하는 메시지를 발굴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그의 능력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로스쿨 영어강의에 대비해야 하는 나 역시 조엘 오스틴 목사의 간명한 설교처럼 강의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방송설교를 열심히 시청하고 있다. ▲

 

UCLA 로스쿨 제리 강 교수와의 대화

12월에 접어들면서 UCLA 캠퍼스는 기말시험 모드에 돌입하였다. 로스쿨 학장은 전과 다름없이 커피와 간식을 차려놓고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격려하였다. 학생들은 강의실이고, 휴게실이고, 앉을 곳만 있으면 책을 펼쳐 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난 일부 학생들은 성급하게도 "헌책 삽니다"라는 부스에 책을 팔고(구내서점이나 Amazon.com에서는 used book을 할인가격으로 판매함) 크리스마스 휴가비를 장만했다.

가을 학기에 통신법정책을 수강한 터라 패컬티 어드바이저인 제리 강(Jerry Kang) 교수와 12월 10일 교수회관(Faculty Center)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강 교수는 지난 6월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여러 대학에서 특강을 한 바 있기에 한국의 로스쿨 진척상황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강 교수의 전공분야는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어 앞으로는 자주 서울법대와 모 법무법인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경칭은 생략)

 

* 한국의 로스쿨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 7월 초에 법이 통과되어 11월 말 전국 97개 법과대학 중에서 41개 학교가 법학전문대학원 신청을 하였다. 정부 산하의 법학교육위원회로부터 내년 초에 예비인가를 받은 학교들을 중심으로 준비를 하여 내년 여름 본인가를 받게 되면 학생을 선발하고 2009년 3월에는 정식으로 개원하게 된다.

* 로스쿨 총정원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는데, 변호사 시험은 얼마나 합격시킬 것으로 보는가?
- 로스쿨 총정원이 당초 정부계획에 의하면 1500명이었으나, 학교, 시민단체, 국회의 요구로 2000명으로 늘어났다. 당초 변호사단체에서는 1500명도 많다고 반대하였으나 법학교수회와 시민단체에서는 적어도 3000명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로스쿨 적성검사(LEET) 등 많은 것이 시행령 등으로 확정되어야 하며, 최종 변호사시험 합격률이 몇 %나 될지는 그 때 가봐야 알 수 있다. 적어도 일본보다는 사정이 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로스쿨이 되면 법학교수들의 이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는가?
- 그렇다. 지금까지는 교수의 이동이 드물었으나 이제 "민족의 대이동"(great movement of German tribes)이 시작되었다. 서울법대에서도 지난 8월 아주 이례적으로 타 대학 교수 8명 포함, 유수 로펌의 변호사, 검사, 변호사 15명을 채용했다.
로스쿨 본인가를 받을 때까지는 강의적합성(teaching requirements)을 갖춘 교수들의 스카웃 바람과 빈번한 이동이 예상된다.

* 로스쿨 도입에 대하여 학생들은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 우리 아들도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진로를 정해야 할지 나로서도 조언해주기 어려웠다. 대한민국 성인남자로서 반드시 마쳐야 할 군 복무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군 복무기간은 짧아지고 있지만, 공부를 하는 남학생들로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허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권위원회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양심적인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대체복무를 허용하도록 정부에 권고했다.

* 로스쿨은 어떻게 운영될 예정인가?
- 로스쿨 정원의 30% 이상 비법학 전공자들에게 개방하고, 학비가 지금보다 크게 오르는 만큼 상당수의 학생들이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교 당 정원은 150명이 상한(cap)인데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12명이어야 하므로 학교별로 패컬티 숫자에 따라 정원을 다르게 신청하였다.

* 전통적인 한국 법학교육은 미국 로스쿨의 강의기법과 다른데 로스쿨에서는 어떻게 하리라고 보는가?
- 당분간은 절대다수의 교수가 익숙한 전통적인 강의방법으로 행해질 것이다. 그러나 미국식 로스쿨의 장점을 살려 소크라테스 문답식 교육이 많이 행해질 것으로 본다.

미국의 로스쿨에 대하여는 학생들이 더 많이 안다. "펠리칸 브리프"(Pelican Brief), "금발이 너무 해"(Legally Blonde) 같은 영화뿐만 아니라 미국의 LL.M., JD 과정을 마친 한국 학생들이 미국 로스쿨 지망생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의 책을 썼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압력에 따라 미국 로스쿨식 강의가 불가피할 터인데 나는 실력파 강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통신법 강의를 들으면서 나도 마인드맵(MindManager)를 써서 강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마인드맵은 사용이 쉽지는 않지만 파워포인트와는 달리 쌍방향 PT가 가능하다. 그런데 외국어 강좌를 개설한다면 꼭 영어로만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외국어로 할 가능성은 없는가?
- 경희대에도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잘 하시는 교수님이 계셔서 독일어 강좌를 개설할 예정이지만 학생들이 얼마나 수강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법률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큰 시장이 형성되고 있어 조만간 중국어 강좌는 개설될 것으로 본다. 한국의 로스쿨에서도 외국 학생들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외국어 강좌는 점차 다양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중국의 경우 중국 법학계가 한국 법학을 전통적인 사회주의 법체계를 선진 법체계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징검다리로 이용할 가능성이 많아 중국 법과대학과의 협력관계도 유망하리라 본다.

 

* [My Question] 가을 학기에 UCLA의 LL.M. 과정에 새로 들어온 한국 학생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예년 같으면 정부 공무원이나 변호사, 은행원들이 꽤 왔을 터인데, 매년 한국 학생은 몇 명이나 뽑는가?
- 정해진 쿼터는 없으며 우수한 학생은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TOEFL 성적만 가지고는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한다. 그러니 영어를 잘하고 법학의 소양이 있는 믿을 만한 학생이 있으면 적극 추천해주기 바란다

끝으로 나는 BBK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엘리카 김이 UCLA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이고 LA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였으므로 잘 아는지 질문하였다.
그러나 제리 강 교수는 한국에서 벌어진 BBK 사건의 경위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엘리카 김 변호사와 한 번 방송 좌담을 같이 한 적이 있으나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

 

미국은 소비자들의 천국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본격적인 연말 쇼핑시즌이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1월의 넷째 목요일 22일인데 그 다음날은 'Black Friday'라 해서 1년 중 가장 파격적인 할인매출을 하는 날이다. 뉴욕의 백화점 본사 앞에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펼쳤던 메이시 백화점은 블랙 프라이데이 아침 6시에 개장한다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Black Monday', 'Black Friday'라 하면 주가의 낙폭이 커서 큰 손해를 본 날을 뜻하지만, 소매업자들에게는 일년 중 판매부진을 씻고 재고를 처분하여 재무상태를 흑자로 돌릴 수 있는 날을 의미한다고 한다. 금년에 가장 주목을 받았던 매출상품은 대형 HD TV(LCD, PDP)와 모니터들이었다. 샤프, 파나소닉 등 외산 가전제품이 '반의 반' 값으로 세일을 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금요일 아침부터 매장 앞에 줄을 섰다.

언론에서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소비심리가 얼어붙어 금년 연말 매출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현실로 나타났다.
신문에서는 연일 대형 금융기관들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손실이 예상보다 크고 수천 명씩 구조조정을 단행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실 LA 지역만 해도 작년까지 좋았던 주택경기가 금년 들어 크게 침체되었고, 코리아 타운에서도 메이저 백화점에 가기 전에 우선 동포들 가게부터 들러달라고 호소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돈 있는 사람이 소비생활을 하기에 좋은 나라이다.
돈이 없어도 세일 기간을 이용하거나 염가(99센트) 매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우선 자기가 원하는 상품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고, 맘에 안 들면 15일 이내에 반품시킬 수 있다. 영수증만 있으면 아무 말 않고 교환해주거나 리펀드(또는 credit) 해준다. 또 원하는 물건이 매장에 없으면 '레인 체크'를 요구하여 세일 기간이 지난 후에도 할인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좀더 발품을 팔면 아웃렛몰(자동차로 1-2시간 걸리는 도시 외곽에 설치된 대형 상설 할인매장)에 가서 좀 더 싸게 살 수도 있다.

필자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세일을 하는 팜스프링 부근 카바존에 있는 데저트 힐 아웃렛(Desert Hills Outlets)에 다녀왔다. 우리 사는 아파트에서 꼭 100마일(161km) 거리에 있으니 왕복 3-4시간은 잡아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여주에 있는 첼시 아웃렛과 같은 Chelsea Property와 같은 그룹에 속해 있어 건물 외양이나 입점업체의 배치도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명품으로 알려진 휴고 보스(Hugo Boss)의 신사복 정장이 400불 대에서 팔리고 있었으니 정말 '반의 반' 값(sales tax 7.75%)이라 할 수 있다. 아르마니(Giorgio Armani)나 제냐(Zegna) 같은 유명 브랜드도 세일 가격이 적용되어 1천불 내외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필자가 찾아간 날은 월요일이기도 했지만 '연말 대세일'이라고 하기에는 주차장이나 매장이나 크게 붐빌 정도는 아니었다.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 까닭인가. 혹은 월말의 After Chrismas clearance sale을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마케팅 컨설팅 전문기관인 브레인리저브의 팝콘 보고서[페이스 팝콘 외, 클릭! 이브 속으로(EVEolution), 21세기북스, 189쪽]에서 지적한 대로 시간에 쫓기고 나이가 많아지는 베이비부머 소비자들이 이제는 1-2시간씩 차를 몰고 나와 쇼핑을 하지 않는다는 예측을 현장에서 미리 확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

 

부동산대출 부실로 한인교포 은행들 고전

미국 금융계를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신용도가 떨어지는 주택담보대출) 대출 부실은 한인교포 은행들(Korean community banks)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지난 11월 초 메릴린치 최초의 흑인 CEO 스탠리 오닐이 부실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처럼 미국에서 가장 큰 교포은행인 한미은행의 손성원 행장이 12월 27일 전격 사퇴를 발표하였다. 웰스 파고 은행의 조사담당 수석부행장을 역임하는 등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으로 알려진 손성원 행장이었기에 임기를 3년 이상 남겨놓고 사임하는 것은 한미은행의 부실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 LA지역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한인교포 은행은 모두 10개인데, 그 중 'Big 4'는 한미은행, 나라은행, 윌셔은행, 중앙은행이다. 네 은행은 모두 NASDAQ에 상장되어 있으며, 한미은행의 총자산이 40억달러로 제일 많고, 세 은행은 20억불대에 올라 있다.
이들 커뮤니티 뱅크들은 캘리포니아주의 부동산경기가 좋을 때 대출을 많이 늘려 자산규모는 크게 증가하였으나 현지 경기가 나빠지면서 부실이 심화되어, 최근 들어 주가가 급락하였다. 특히 한미은행의 경우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보고된, 2007년 상반기에 1월 이상 원리금이 연체된 대출자산만 해도 38백만달러에 달했다.

지금도 LA 코리아 타운의 이곳저곳에서는 한인 개발업자들이 신축 또는 개보수하는 상업용 건물의 공사현장이 많이 눈에 띈다.
한인은행들도 미 서부지역의 부동산 경기가 활황을 보이고 한국에서 투자자금이 몰려들 것을 예상하고 대형 건설 프로젝트에 대출을 많이 해주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수년간 지속된 저금리 시대에 시장 선점을 위해 은행들이 공격적으로 대출경쟁을 벌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외형확대에 치중하다 보니 잠재적 부실대출이 늘었고 부동산경기의 침체, 금리하락에 따른 단기 수지 악화로 수익전망이 나빠져 내후년에나 한인은행들의 실적이 호전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교포은행이 대출심사를 강화할 것이 뻔한데 이렇게 되면 코리아 타운의 각종 비즈니스가 자금부족으로 고전하게 되고 가뜩이나 어려운 타운 경기가 더욱 위축되리라는 점이다.
반대로 경영개선을 위해 은행들이 서비스 경쟁에 나서게 되면 반가운 점도 있다. VIP 고객을 겨냥한 상품이나 은행에 가지 않고도 예금을 할 수 있는 remote deposit 프로그램, drive-in ATM 서비스 등이 확대되고 토요일이나 저녁시간에도 영업시간을 연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 삼아 뉴욕, 뉴저지 등 교포들이 밀집해 있는 동부지역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거나, 은행간 M&A가 활기를 띨 것으로도 예상된다.
실제로 LA의 커먼웰스 비즈니스 은행은 하나은행의 지분참여를 받아들였다. 하나금융지주는 12월 21일 미국 LA 소재 교포은행인 커먼웰스 비즈니스은행에 대해 한국 금융감독위원회의 자회사 편입 승인을 받았음을 서울증권선물거래소에 공시했다. 하나금융지주는 미국 감독당국의 승인을 받으면 이 은행의 지분 37.5%를 보유한 최대주주가 된다.

한미은행 손성원 행장의 경우 워낙 유명한 경제학자이기에 미국의 대학 강단에 서거나, 한국의 금융업계에서 영입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언론을 통해 옳은 소리만 하던 그였기에 은행부실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모습은 매우 궁색해 보였다. ▲

 

미국의 대선주자 롬니 전 주지사는 진짜 '경제대통령' 후보

2008년 들어 처음으로 1월 3일에 실시된 아이오와주 당원대회(caucus)에서 민주당 오바마 상원의원, 공화당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가 각각 1위를 차지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아이오와 주에서 제일 먼저 경선이 시행되는 데다 아이오와 주민들의 정치적 식견이 높아 여기서 승리하는 후보는 각 당의 선두주자로서 각광을 받고 선거자금을 많이 모을 수 있기에 그 만큼 백악관에 입성할 공산이 커진다.

대선 레이스에서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시종 우세를 보였으나, 보수성향이 강한 농촌지역 아이오와 주에서 오프라 윈프리를 앞세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바람을 잠재우지 못했다. 민주당이나 공화당 내부는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 변화(change)를 갈망하는 소리가 드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의 관심은 공화당의 후보인 미트 롬니(Mitt Romney)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모르몬교도라는 것과 남침례교 목사인 마이크 허커비(Mike Huckabee) 전 주지사와의 사이에 언쟁이 있었다는 데 쏠렸다.
대선 토론에서 롬니 후보는 자신을 이단이라고 말한 허커비 후보를 비판했고 허커비는 즉각 사과했다. 허커비는 주류 기독교목사로서 말일성도 예수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LDS)에서 예수나 사탄(루시퍼)이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을 들어,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라고 믿는 것은 이단(cul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모르몬(LDS) 교도들은 성경 외에 교주인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Jr.)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모르몬경(Book of Mormon)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만 삼위일체설(Doctrine of Trinity)을 따르지 않기에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탄은 타락한 아들이며, 교인들도 급은 낮아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 것이다.

주류 기독교의 관점에서 모르몬교는 같은 성경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색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많은 모르몬 교도들이 오해를 받았던 일부다처제(polygamy) 풍습은 일찍이 1890년에 폐지되었고, 지금 둘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은 파문 사유가 된다. 그러나 교회에 어떠한 형태의 십자가도 세우지 않고 예배는 드리지만 따로 목회자가 없으며, 권투선수 팬츠같은 성전속옷(temple garments)을 입고 죽은 사람에게도 세례를 베푼다. 영계를 떠도는 죽은 혼백에게도 모르몬교를 받아들일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르몬 교회가 살아있는 선지자로 추앙받는 교회 회장(President)과 두 사람의 고문(counselors) 그리고 열두 사도(apostles) 등 엄격한 계층제를 통해 운영되는 것이나 남녀차별, 흑백차별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도 이상하게 비쳐진다.

그러나 옐로스톤, 아치스 국립공원 등 서부여행을 하면서 모르몬 교도들이 많이 거주하는 유타주를 다닐 때면 절로 안심이 되고,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타주에는 모르몬 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어느 곳이나 깨끗하고 질서가 잡혀 있으며 주민들도 한결같이 친절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술도 팔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르몬 교도들은 매 2년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수입의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고 있는지, 정직하고 순결(chaste)하며 술.담배.커피를 금하고 있는지 심사를 받고 성전(temple)에 들어갈 자격(temple recommend)을 얻기 때문이다.
남자 교인들은 19세가 되면 장로(elder)로서 2년간 해외선교를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흰 와이셔츠에 검정 바지의 단정한 차림을 한 미국 젊은이들은 모두 모르몬 선교사들이다. 그리고 나서 대학에 진학을 하는데,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브리검영 대학은 미국에서 학비가 제일 싼 명문학교로 소문이 나 있다. 모르몬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롬니 후보는 단지 모르몬 교도라는 이유로 폄하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는 프랑스에서 2년 반 선교사역을 마치고 브리검영 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대 로스쿨과 경영대학원을 다녔다.
우등으로 JD/MBA 복수학위를 취득한 다음 보스턴에 있는 컨설팅회사 베인&컴퍼니에 들어가 금융사업부문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43세에는 CEO를 맡아 도산위기의 회사를 재건하였는가 하면, 1998년부터는 2002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서 9.11 테러 사건으로 엄청난 보안경비(security cost)가 추가 지출되었음에도 성공적으로 흑자 올림픽을 치뤄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2002년 그가 놀라운 사업수완을 보였던 보스턴에서 주지사로 당선되어 재임기간 중 '교육개혁'을 이룩하였고 세금을 더 거두지 않고도 매사추세츠 주의 재정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모르몬교의 교구장(stake president)을 역임하였고 십일조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롬니 후보 자신도 2억불이 넘는 자산가로 알려져 있다.
경영 컨설턴트로서 수익을 많이 올린 기업 CEO를 지냈고 적자 투성이의 2002 동계올림픽과 주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은(turnaround) 롬니야 말로 '경제대통령'의 충분한 자격이 있어 보인다. ▲

 

헐리웃을 뒤덮은 작가조합의 스트라이크

지금 미국에서는 미국 작가 길드(Writers Guild of America)의 스트라이크가 10주째 계속되고 있다.
11월 5일 Thanksgiving 훨씬 전에 시작되었으니, 올 들어 작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방송, 연예 프로가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미국의 방송연예사업을 보면 일종의 먹이사슬이 구축되어 있는데, 최상위에는 방송사와 기업형 제작자(따라서 작가조합의 협상 상대는 Alliance of Motion Picture and Television Producers: AMPTP), 그 다음에 시청자.관객과 접하는 배우, 탤런트(성우 포함), 가수들이 있고 그 다음에 작가들(writers)이 있다. 그리고 PD 등의 스탭과 엔지니어, 그리고 맨 아래에는 단순노무 제공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작가들이 비교적 존중받고 있는 풍토에서 그들의 불만을 품는 이유는 자기네들이 애써 만든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 방송사, 제작자가 광고수입을 포함한 엄청난 수익을 올림에도 자기네들한테는 옛날부터 내려온 배분공식에 의해 쥐꼬리만큼만 나눠준다는 것이다.

배우 출신인 슈와즈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중재에 나섰지만 이 문제가 캘리포니아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협상은 이내 결렬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정보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DVD,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여 새로운 수익원이 창출되고 있으므로 자기네들도 한 몫 챙겨야겠다는 작가들의 전략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런데 뉴 미디어의 등장에 따른 새로운 수입원이 얼마나 되고 이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있게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그의 타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미국 서부 여행 때 만난 한국인 애니메이션 감독(Jeff Beck)은 이제 대본도 바닥나 텍사스를 무대로 12년 이상 롱런해 온 "힐 가문의 왕(King of the Hill)"이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모두 손해를 보고 있으니 작가조합도 더 이상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여파로, 우리도 먼 발치에서나마 구경하려고 했던, 1월 12일 LA 비벌리 힐튼호텔에서 열린 Golden Globe Award 시상식에는 작가들의 파업에 동조하는 배우들이 전원 불참하였고, 2월 하순의 Academy Award 시상식도 개최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한다.
LA에서 사는 즐거움이라면 유명 연예인들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므로 1월 7일에는 UCLA 앞 웨스트우드의 Fox Theater에서 열린 영화 "27 Dresses"의 프레미어 식장을 찾아갔다.
카메라맨이나 기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길 건너편에서 배우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일부 열성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의 브로마이드를 흔들며 거의 비명에 가깝게 이름을 외쳐 포토라인으로 향하던 배우를 자기 앞으로 오게 만들기도 했다. ▲

 

미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미국 체류 1년을 마감하기에 앞서 어느 곳을 가봐야 할지("Must-See" Places)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현재 LA에서 살고 있으니 서부지역은 되도록 많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옐로스톤 국립공원, 요세미티 국립공원, 그랜드캐년(자이언캐년, 브라이스캐년), 모뉴먼트 밸리, 아치스 국립공원, 록키산맥(덴버)
- 샌프란시스코, 샌디에고(티화나), 시애틀

동부지역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많다.
- 뉴욕(맨해튼), 워싱턴 DC
- 나이아가라 폭포

서부 지역은 2006년(Yosemite-San Francisco-Pebble Beach)과 2007년(Yellowstone Park, Sedona, Monument Valley-Arches National Park)에 여러 곳을 다녔으니 마지막으로 LA 삼호관광의 페키지 투어로 동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뉴욕과 워싱턴DC 그리고 서부의 그랜드캐년에 필적할 만한 대자연의 위용,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싶었다.

미국은 땅덩이가 큰 나라여서 LA에서 동쪽 끝 뉴욕으로 가는 데만 비행기로 5시간이나 걸린다. 시차가 3시간이므로 아침 9시 20분에 출발한 비행기가 뉴저지의 뉴왁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5시 40분, 즉 하루의 일과를 끝낼 시간이었다.
그래서 첫날은 바로 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워싱턴 DC 관광 길에 나섰다. 워싱턴 DC에서 볼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 국회의사당 - 백악관 - 워싱턴 모뉴먼트(obelisk) - 제퍼슨 기념관 - 링컨 기념관 - 한국전 참전비 - 스미소니언 박물관 - 내셔널 갤러리 등

동부지역에서도 나이아가라 폭포는 마침 날씨가 개어 캐나다 쪽으로 가서 헬리콥터도 타고 스카이론 타워에도 올라가는 등 다채롭게 구경했다.
뉴욕 맨해튼도 허드슨강 건너편 뉴저지의 팰리사이즈('절벽'이란 뜻)에 있는 해밀턴 공원에서 밤의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구경하고 직접 타임스퀘어와 록펠러센터, 피프쓰 애브뉴(5th Avenue)를 걸어다녔다. 그 이튿날 아침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도 올라가 보고 자유의 여신상 앞으로 유람선을 타고 가서 구경했다.
뉴욕에서 3년간 살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둘러보는 뉴욕의 거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아메리칸 항공사의 기내잡지 [Miles Are Forever]에서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Less is More"라는 페이지를 통해 영시에도 일본의 하이쿠(俳句)와 비슷한 정형시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이 시의 형식은 정확히 3행 17음절(3 lines 17 syllables)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Time equals my life.

     Productivity is key.

     Use seconds wisely. - Stephen Johnson

 

나도 마음 속으로부터 소감이 없을 수 없었다.

     America is big. 

     Time flies; Many things remain

     To be found next.

 

     Monument Valley provides Gorgeous view 
     My breadth was taken away. 

 

     Niagara Falls show  Awesome spectacles 
     My eyes become rainbows. 

 

     Big Apple City Attracts all the people 
     Like powerful magnet. ▲

 

미국의 대통령 경선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는 물론 전세계의 이목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에게 쏠려 있는 것 같다.
공화당 진영에서도 여러 후보가 나왔지만 2월 5일의 '수퍼 화요일'이 끝나자 미트 롬니 전 주지사가 경선을 포기하였고, 일찌감치 매케인 상원의원으로 결정되는 모양새다.

민주당의 경우 오프라 윈프리가 처음부터 첫 여성대통령 후보인 힐러리보다 같은 흑인인 오바마를 지지한 것은 그렇다 쳐도, 미국 정계의 거물인 케네디 상원의원과 그 일가족이 오바마 지지를 선언한 것은 다소 뜻밖이었다.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내 주변 사람들 중에도 오바마 지지자가 많았다. UCLA 로스쿨의 린 로푸키 교수 역시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말했고, 제리 강 교수는 그가 오바마를 지지하는 이유를 신문에 기고(한국일보 기사)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1990년 하버드 교정에서 오바마를 처음으로 보았다면서 그는 흑인 최초로 하버드 로저널의 회장을 맡아 경이로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직책을 맡으려면 머리도 좋고 성적도 물론 좋아야 하지만, 보수와 진보, 중도파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식견과 뛰어난 리더십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후 오바마는 명문 시카고대 로스쿨의 헌법학 교수를 역임하였기에 권력분립, 적법절차, 법의 공평한 적용과 같은 헌법적 가치에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제리 강 교수는 오바마가 하버드 출신의 대학교수라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야 말로 미국의 인종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고 공언했다.
흑인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언젠가 한국 또는 아시아의 누군가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귀국한 다음에 들은 뉴스에 의하면 수퍼 화요일에서 오바마는 힐러리보다 많은 13개 주에서 승리를 하였으나, 힐러리가 대의원 수가 제일 많은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장악하였으므로 경선 결과는 여전히 예측불허라고 보도했다. ▲

 

에필로그

마침내 신학기를 앞두고 LA에서의 연구년(Sabbatical year)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
1월 중 LA에서는 비가 자주 내리고 찬 바람 부는 날이 많았는데 로 라이브러리 앞의 자목련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벌써 봄이 온 것이다.
UCLA 로스쿨 도서관 캐럴에서 철수하면서 가지고 간 한국의 법학 교과서와 나의 저서, 학술지 몇 권을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한국계 학생들도 적지 않은 만큼 한국 법학에 관한 장서가 좀더 보강되어 한국 법학이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아파트에 들여놓았던 TV와 침대, 가구, 부엌살림 등 세간을 처분하는 일이 제법 만만치 않았다. 한국 교포들이 많이 보는 MissyUSA와 Radio Korea의 게시판에 Moving Sale 광고를 냈다.
또한 PLB 아파트 보증금으로 예치해 놓은 두 달치 렌트비를 한 푼이라도 깎이지 않기 위해 시설물 검사(moving-out inspection) 지적사항이 없도록 주방과 화장실을 '삐까뻔쩍' 광이 날 정도로 소제하였다. 냉장고 안과 가스 레인지는 진즉 깨끗이 닦아놓고 지낼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2월 5일 LAX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LA에서의 1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간 것 같았다. 전반부 봄학기에는 어학연수 차 함께 온 둘째아이와 함께 학교에 다니느라 바빴고, 후반부에는 경희대의 로스쿨 준비 관계로 나까지 덩달아 바쁘게 지냈던 것이다.
2007년 상반기에 UCLA 로스쿨 로푸키 교수의 도움으로 여러 편의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였으며, 가을학기에 제리 강 교수의 강의를 청강할 때에는 로스쿨 개원 시 적용할 영어교수법의 요체를 배울 수 있었다.

적잖은 돈이 들긴 했지만 귀국을 앞두고 아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녔던 여행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와 같이 연구년 중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아들과 함께 지내며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로스쿨 영어강의에서 커리어 상의 활로를 발견하게 된 것, 그리고 LA와 서울에서의 휴먼 네트워크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13시간만에 도착한 서울의 모습은 1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누구는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자기가 없는 동안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실망스러웠다고 하지만, 내가 존재함으로써 미국에서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지금부터 새로운 의미를 쌓아가는 일이 매우 보람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서울은 전과 다름없네 / 나 없이도, 하지만 내가 있음으로 해서 / 더욱 뜻 깊어지네.

   All things are usual / Without me, but with me / Getting more senses. ▲

 

(2008. 2. 7. 설날 아침에 UCLA.미국 견문기를 마침)

 

미국 SMU 로스쿨에서의 1년 (199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