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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미국 로스쿨에서의 1년 (1993-94)

Onepark 2024. 8. 27. 14:40

[주의] 아래 소개하는 미국 로스쿨 유학기는 본래 경희대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년 퇴직한지도 오래고 비록 30년 전의 기록일 망정 디지털 콘텐츠를 일원화한다는 취지에서 Tistory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므로 현 시점의 유학 정보로서는 부정확하고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필자는 1993년 8월부터 1년간 소속직장의

학술연수 케이스로 미국 텍사스 댈러스 소재

서던 메쏘디스트 대학교(SMU) 로스쿨에서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 아래의 이야기는 1994년

유학 당시 [신동아]의 논픽션 현상공모에 응모했던

手記이다. 최근 세계화, 사법개혁 논의와 더불어

미국 로스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터에

미국 로스쿨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나아가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떠한지 SMU와 댈러스를

중심으로 필자의 체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1994)

 

목     차

프롤로그
미국의 로스쿨 과정
댈러스의 SMU 로스쿨
학교의 퀄리티와 커리큘럼
어렵고 힘든 법 공부
기숙사 생활의 낭만
살아있는 기독교 정신
과부를 동정하는 재판관
카도조 판사의 명판결
티쳐 로여의 권위
소크라테스 문답법

셰브론 케이스의 의의
미국의 제조물책임 소송
현대 자동차 케이스
미국 법원의 견학
미국 헌법의 이슈
캠퍼스 성희롱 사건
로스쿨의 여학생
모의재판 방청소감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지위
국제거래법과 UR 협상
멕시코 견문기
아즈텍 제국의 멸망사
멕시코의 NAFTA 협상방법
NAFTA와 라비 바트라 교수
국제투자론의 재미
법률 데이터베이스의 위력
미국 통일상법의 의의
미국의 은행법과 증권법
메도우즈 미술관의 보물
휴즈-트리그 센터의 내력
법률소설, 법정영화의 인기
변호사는 쉽지 않은 전문직

어느 외국 변호사의 미국 귀화
학생의 교수 채점
시험과 아우트라인
LL.M. 졸업앨범
골프-신앙생활 비교론
미국은 장애자의 천국
다채로운 댈러스 지역문화
토플리스 바와 외설시비
한국 유학생의 개가
후배한테 주는 충고
에필로그

 

프롤로그

무슨 일을 하다가 그 문턱에서 좌절을 겪어본 사람은 언젠가는 그 일을 성취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원과정의 수료증만 손에 쥐었던 나는 언젠가 제대로 공부를 하여 학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해외유학을 심각히 고려하는 동안 줄곧 '대학을 졸업한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과연 영어로 하는 법 공부를 따라 할 수 있을까?' '서울에 부양할 가족이 있는데 미국에 가서 혼자 자취하며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문제가 머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작은아버지(朴基承)는 70 고령에 동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장인 어른(申庸雨)은 처자 있는 몸으로 도일하셔서 대학을 마치고 고등고시에 합격하신 사실이 나에게 은근한 도전이 되었다. 장인 어른은 종종 과거를 회상하시면서, '사촌 형님께 처자를 맡기고 갔는데 돌아와 보니 식구들 생활이 말이 아니더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나는 사정이 달랐다. 직장에서 실시하는 학술연수의 경우 본인의 유학경비는 물론 서울에 남은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는 급여가 지급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서울에서 나오는 돈을 송금 받기로 하고 가족을 동반하고 유학을 떠난다.
우리 직장에서는 매우 진취적인 해외학술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80년대 학술연수자의 태반이 복직을 미루었을 때에도 (일시 중단은 있었지만) 계속 실시되어 지금은 금융기관으로서는 가장 많은 고급 인력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젊은 행원들에게는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닐 수 없다. 연수비가 현지에서 생활하기에 빠듯하다 해도 그 총액은 그때까지의 예상 퇴직금과 맞먹거나 훨씬 웃도는 금액에 이른다. 학비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학비가 비싸더라도 여건이 좋은 사립대학을 선호하는 것이 연수비가 늘어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마음의 각오를 하고 나니 은행측의 승인을 받는 게 문제였다. 해외근무를 마치고 온지 2년밖에 안 되는데 또 외국에 공부를 하러 나간다? 어떻게 보면 몰염치한 행동이었으나 공부는 한 살이라도 젊어서 해야 한다는 원칙론 앞에 주저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학술연수 제한연령인 40세에 육박해 있었다. 연수담당자들의 호의적인 판단 아래 우리 은행으로서는 처음 실시하는 법학과정 공부를 열심히 하여 앞으로 은행업무발전에 이바지하겠노라 약속하는 것으로 경영진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의 로스쿨 과정

미국에서는 우리 나라와는 달리 법률과목을 대학원(로스쿨)에서 가르친다. 로스쿨에는 J.D., LL.M., S.J.D.등 몇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J.D.(미국의 '쥬리스 닥터'는 법학박사라기보다 우리 나라의 법학석사 내지 법무박사가 맞는다)는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사람이 로스쿨 학력테스트(LSAT)를 치르고 입학하는 3년 과정으로 미국법의 모든 것을 배우게 된다. 비교법 석사학위를 수여하는 LL.M.(L을 두개 겹쳐 쓰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법학은 교회법과 세속법을 연구하였기 때문이다)은 본국에서 영미법이 아닌 법과대학의 정규과정을 마친 외국 학생이 미국법을 1년간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미국 학생들도 단기간에 법학원론이나 세법, 국제비교법등을 공부하기 위해 이수하고 있다. S.J.D.(또는 J.S.D.)가 정식 박사과정이다. LL.M. 또는 J.D.과정을 마치고 지도교수의 지도 아래 전공분야의 수준높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 미국에서 로스쿨 교수가 되는 데는 J.D.학위만으로도 족하다.

내 경우 LL.M. 과정만 할 생각이었으므로 한국 학생에게 어렵다는 LSAT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LSAT는 경영학의 GMAT와 마찬가지로 법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양이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으로 논리분석과 독해 문제가 출제되는데 속독을 못하면 무척 당황하게 된다. 한국에서 법과대학을 나왔으면 LSAT를 치르고 J.D.과정에 들어가기보다는 우선 LL.M.과정을 하면서 미국법의 맥을 짚은 다음에 J.D.과정을 이수하는 게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하기가 한결 쉬워질 뿐더러 LL.M. 과정에서 이수한 J.D.학점을 일부 인정받을 수 있으면 학비도 절약되고 졸업시기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1년전 영어실력을 진단 받고자 TOEFL 시험을 보아두었으므로 인사부 승인을 받자마자 지망하는 로스쿨에 일제히 입학원서를 발송하였다. 경험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퍼스트와 미들 클래스의 여러 학교에 지원하였는데, 생활비와 치안문제를 고려하여 뉴욕, 필라델피아와 같은 대도시 학교는 일단 제외하였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미국 대학은 학생을 선발할 때 최종 출신학교의 교수 추천서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비록 20년전 클래스의 학생이었음에도 졸업 후에도 종종 찾아뵈었던 은사와 모교 학장님의 배려로 만학의 노력을 치하하는 내용이 담긴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원서제출 마감일에 맞춰 필요한 서류를 우송하고 난 후에는 어드미션(입학허가서)을 기다리는 게 일이다. 학교 회신을 받을 때마다 내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 것인가 하는 두근거림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일단 가부간에 회신을 해주므로 학교에서 온 우편물이 크고 두툼하냐 아니냐에 따라 뜯어보지 않고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댈러스에 있는 서던 메쏘디스트 대학(SMU)에서 제일 먼저 어드미션을 받았고, 1순위로 꼽았던 노쓰 캐롤라이나 소재의 학교나 동북부의 명문학교에서는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유감스럽게도..'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받았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지만 '1년만 지낼 건데 겨울추위가 없는 곳에서 공부하는 게 낫겠다' 싶어 댈러스의 SMU로 최종결정을 보았다. 결과적으로는 이 판단이 적중하였다. 1993년 말부터 미국 북쪽지방은 빙하기가 다시 도래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리고 추위가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댈러스에서는 1, 2월중에도 에어컨(?)이 가동되는 날이 종종 있었다. ▲

 

* 댈러스 소제 SMU(남감리교대학교) 본관과 University Park

댈러스의 SMU 로스쿨

SMU는 댈러스 도심에서 북쪽으로 9Km 떨어진 유니버시티 파크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댈러스에 고등교육기관을 세우기로 하고 1911년 댈러스 북쪽 교외에서 교사신축에 착수했을 때 그 일대는 허허벌판이었다. 초대 하이어 총장을 비롯한 설립자들의 매스터 플랜은 미국 서남부 지방에 스탠포드나 시카고 대학 못지 않은 사립대학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우선 댈러스 시민들이 헌금한 30만불로 토머스 제퍼슨이 세운 버지니아 대학본관 스타일의 '댈러스 홀'부터 건립하였으나 그 이상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공사진척이 곤란하였다.

내가 매일 아침 비숍 블루버드를 따라 댈러스 홀 앞까지 달린 후 다시 U 턴하여 도심의 스카이 라인을 바라보며 죠깅할 때면 타임 머신을 타고 있다는 상상을 해보곤 하였다. 중앙의 몰(워싱턴 국회의사당 앞과 같은 넓은 녹지공간)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는 건물들이 하루 아침에 세워진 게 아니라 장기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건설된 것을 볼 때 이런 금언을 머리에 떠올렸다.
"비전을 가져라.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는 말아라."
이 말은 내가 SMU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일관된 주제였다. 캠퍼스에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는 화이트오크(참나무)도 그러했다. 식수기념비에 의하면 이 나무들은 1930년대에 심어진 것들이었다. 처음엔 작은 묘목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람쥐와 마킹버드(우리 나라의 까치와 비슷한 새)가 노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되어 있는 것이다. 화이트오크 트리는 새 잎이 돋을 때 묵은 잎이 떨어지므로 사철 푸른 것이 보기에는 좋지만 정원관리인들에게는 낙엽을 치우는 게 큰 골칫거리였다.

SMU 캠퍼스 북서쪽 코너에 자리잡고 있는 로스쿨은 3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스쿨은 본래 법과대학생 전용 기숙사(로여즈 인)까지 포함하여 4동(콰드랭글)이었는데 로여즈 인은 내부개조공사를 거쳐 1994년 가을부터 세미나실과 정치학과 건물로 사용될 예정이다. SMU는 전형적인 사립대학으로서 대학원생까지 합쳐봐야 총 학생수가 1만 명이 채 안되며, 로스쿨 학생수도 큰 학교의 1개 학년 정도인 8백 명 미만이다.
건물 전면에 '지혜, 진리, 정의, 용기'라는 법률가의 덕목이 새겨져 있는 스토리 홀은 행정동으로 2-3층에는 교수연구실이 있고, 맞은 편 플로렌스 홀에는 강의실과 세미나실, 모의법정이 들어 있다. SMU 캠퍼스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힐크레스트 애브뉴에 면한 언더우드 법률도서관에는 각종 법률도서자료가 비치되어 있는데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고 있다.
故 김택수(金澤壽) 의원을 비롯한 동문들이 출연하여 건립된 서울법대 도서관의 경우 최근의 장서는 별로 없고 학생들이 주로 고시준비 장소로 이용하는 데 비해 이 작은(미국 기준으로) 도서관에는 장서가 50만권에 달한다. 각종 판례집과 그 주석, 연방 및 각주의 법령, 의회 입법자료, 각 대학의 법률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 캐나다, 호주의 자료까지 비치되어 있어 무엇부터 찾아야 할 지 모를 정도이다. 또 3층에는 퍼스널 컴퓨터와 법률 데이터베이스 단말기가 수십 대 설치되어 있다.
법률 리서치를 할 때면 도서관 시스템이 거의 완벽함을 알게 된다. 예컨대 도서자료검색 단말기를 사용하여 주제 또는 저자별로 찾아보거나 아니면 데이터베이스 단말기에 몇 가지 주제어를 입력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자료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학교의 퀄리티와 커리큘럼

SMU 로스쿨은 물론 미국 변호사협회의 학력인정 학교이지만 학생들은 전국적인 랭킹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졸업후 취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학벌을 따지는 것은 미국이 훨씬 노골적인데 우리 나라와 다른 것은 학연이나 지연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동아리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SMU 로스쿨 교수진을 보아도 모교 출신보다는 이른바 명문학교 출신이 더 많다.
1994년 봄에도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지가 예년과 같이 미국 대학원의 순위를 발표하였다. 특이하게도 SMU 로스쿨과 비즈니스 스쿨이 법학과 경영학 부문에서 나란히 50위에 랭크된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의 명성과 학생 선발기준, 졸업후 취업률 등을 평가기준으로 하였다지만, 학생들이 30위쯤으로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처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 수년간 댈러스 일원의 불경기로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려웠던 것을 감안하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등록금을 많이 내는 사립대학으로서 주립대인 U.T. 오스틴에 비해 크게 뒤진다면 등록금을 환불해달라고 요구해야 할 게 아니냐는 농담이 오갔다.

반면 외국학생들이 공부하는 LL.M.과정에서는 1994년 4월 파이 총장과 로저스 학장이 타이완으로 가서 현지에서 李登輝 총통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코넬대 출신의 기술관료인데 대만에 있는 SMU 로스쿨 졸업생들의 주선으로 실현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아시아권에서는 SMU 로스쿨 출신의 영향력이 크고, 학교에서도 아시아 학생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사실 1993/94학년 LL.M. 과정에는 아시아나 항공에서 근무하다 온 文亨根씨와 1993년봄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온 姜世元군 등 한국 학생이 3명이었으며, 일본 학생 6명, 대만 학생 5명(여학생 3명 포함), 그밖에 태국, 인도네시아 학생을 합치면 아시아권 학생수가 거의 60%에 달하였다.

로스쿨의 커리큘럼은 헌법, 계약법, 불법행위법, 재산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기본과목은 물론 회사법, 은행법, 증권법, 세법, 에너지법등 전문분야의 법과목을 망라하고 있다. 정규과정의 학생들은 1학년때 리걸 리서치-라이팅, 로여링 등 변호사로서 필요한 실무지식과 테크닉을 가르치는 코스와 2,3학년때 법조 윤리과목을 필수로 수강해야 하며, 담당교수의 지도 아래 2편 이상의 수준급 연구논문을 작성, 제출해야 한다. LL.M. 학생들은 미국법 개론을 필수과목으로 듣고 계약법, 회사법, 국제거래법, 국제분쟁해결 등 자신에게 필요한 과목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J.D.과정이 90학점, LL.M.과정이 24학점이다. 1학점에 6백불(동북부의 사립학교는 이보다 훨씬 비싸다) 상당의 학비부담이 따르며 학점(시간)당 3-5시간의 강의준비가 필요하고 시험날짜가 겹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매 학기초 수강신청 때마다 어느 과목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여름강좌로 돌릴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학기중 11학점 수강하는 것과 13학점 수강하는 것은 학비, 예습 및 공부량, 시험준비 등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

 

* SMU Law International LL.M. 1993/94 Class. 앞 줄 맨왼쪽이 필자.

어렵고 힘든 법 공부

미국에서도 로스쿨은 가장 공부하기 힘든 학교로 정평이 있다. 미국 사람들도 내가 로스쿨 다닌다고 하면 '외국인으로서 공부하기 힘들겠다'는 걱정 겸 동정의 시선을 보내기 일쑤였다. 나로서는 LL.M.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부터 대학졸업후 20년만에 녹슨 머리로 법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게 엄청난 현실문제로 대두되었다.
우리 말로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될까말까 한데 용어가 생소한 미국법을 영어로 공부하고 강의를 들어야 하며 시험까지 보아야 하는 것이다. LL.M.과정의 학생들끼리는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있으나 처지가 비슷하므로 크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영어는 유럽이나 중남미에서 온 학생들은 큰 불편없이 구사하는 것 같았으나, 아시아권 학생들은 고생이 적지 않았다. 다행히 미국에 미리 와서 단기 어학연수라도 받은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로스쿨 강의는 학생들이 예습을 한 것으로 간주하고 진행하기 때문에 예습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읽기가 매우 중요한데 판례는 단어 하나하나 음미하듯이 읽어야 하므로 애당초 속독이 곤란하다. 과목에 따라 다르지만 1시간 강의를 듣기 위해서 미리 읽고 가야 할 분량(reading assignment)이 평균 10-20페이지에 달하므로 2시간 수업을 들으려면 밤늦게까지 책과 사전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판례요약만 읽고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로스쿨 강의 교재는 케이스북(판례집)과 트리티즈라고 부르는 교과서이며 우리 나라에서처럼 성문법전을 보조교재로 사용한다. 하드바운드로 장정된 기본교재가 50불 이상이고 보조교재도 20-30불씩 하기 때문에 학기초에는 책값만 수백 불에 달하게 된다.

나도 해외생활을 수년씩 하였고 나름대로 영어에 자신이 있었으나 법 공부를 하면서 가끔 절망감에 휩싸이곤 하였다. 말로써 시작하고 끝을 내는(?) 법공부에서 그 말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었다. 이 공부를 하고자 가족과 떨어져 태평양을 건너왔는데 어렵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주말 같은 때 속독연습 삼아 소설책을 여러 권 사서 읽었는데 부산물로 페이퍼백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그 다음 문제는 히어링이었다. 이것은 따로 노력을 할 수도 없고 자연히 귀가 뚫리기를 기다리는 외에 도리가 없었다. 잘 들리지 않는 대목은 예습한 것을 되살려 눈치껏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전에 못 듣고 지나쳤던 말도 캐치가 되니 스스로 신기할 정도였다. 아직도 적잖은 문제가 있지만 처음에 비해서는 많이 향상된 셈이었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 적성검사때 법과대학은 언어능력이 좋아야 갈 수 있다는 담임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

 

기숙사 생활의 낭만

SMU 기숙사에서 입주하던 날 머리에 떠올린 것은 내가 대학 1학년 교양영어 첫시간에 읽었던 '만일 프레시맨(대학 1학년생)이라면' 기숙사에서 살면서 …을 하겠다는 글이었다. 사립대학인 SMU 캠퍼스 건물들의 반은 마틴 홀, 호크 홀등의 이름이 붙은 기숙사들이다. 학부 1학년생은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며, 외국인 또는 외지 학생들도 기숙사를 많이 이용하고 있다. 내 경우에도 캠퍼스내에 거주하니 강의실, 도서관이 가깝고 치안상의 문제가 전혀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캠퍼스내 행사에 자주 참여할 수 있는 등 여러 모로 편리하였다.
대학원생의 기숙사는 남녀 혼용이다. 무작위 추첨으로 방이 배정되므로 남학생의 옆방에 여학생이 입주하기도 한다. 물론 2인이 함께 쓰는 방은 혼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숙사내의 풍기문란 사고는 별로 없었다. 기숙사 지하 세탁실에서 남에게 들킬까봐 마음 졸이며 섹스를 하는 게 스릴 만점이라는 신문기사도 그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독방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이성 친구를 자기 방에 초대할 경우 방음시설이 전혀 안되어 있으므로 서로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숙사내에 금방 소문이 나버리기 때문이다.

캠퍼스에는 '파이 카파 알파' '알파 치 오메가' 등 그리스 문자를 딴 프래터니티 또는 소로리티 하우스가 여럿 있다.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남학생 또는 여학생 클럽의 회원들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기숙사이다. (그 회원을 캠퍼스에서는 '그릭'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 사람이 아니라 프래터니티 또는 소로리티 멤버를 지칭하는 것이다. 미국 국회의원 4명중 3명이 이들 회원출신이라 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60년대 영화 '애니멀 하우스'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무질서한 것은 아니고,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끼리 함께 살며 공부도 함께 하고 우의를 다진다고 한다.
이들 팬 헬레닉 클럽은 이름 값을 하느라고 자선사업에도 열심인 것을 보았다. 언젠가는 학생회관내 감방에 이들 클럽 회장들이 갇혀 있다기에 무슨 영문인가 알아보았더니, 이네들 석방을 위한 보석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하고 클럽 회원들이 모금을 하고 있다면서 나한테도 손을 벌리는 것이었다. 전통 있는 클럽은 학기초에 '러쉬'라고 하는 행사를 벌여 신입회원을 모집하는데, 외국 학생의 눈에는 마치 비밀결사 회원을 모집하는 것처럼 보였다. ▲

 

살아있는 기독교 정신

SMU는 설립때부터 텍사스 감리교회의 지원을 받고 학교이름도 '남감리교' 대학이라고 붙였다. SMU 신학대학원은 우리 나라 감리교 신학도들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서로 분리되어 온 학문과 신앙을 합치게 하소서."
SMU의 메쏘디스트 정신을 함축하는 요한 웨슬리의 이 기도문은 로스쿨 강의동인 플로렌스 홀 1층 복도바닥에 새겨져 있다. 웨슬리의 말이 가장 크게 적용될 수 있는 학문 분야가 바로 법학인 것 같다. 법과 기독교 신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요한 웨슬리는 신약적인 사랑을 강조하였지만 바로 앞시대 인물인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아 질서와 정의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에 기독교 정신이 깃들어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금세기초까지 미국 법학도들이 교재로 삼았던 블랙스톤의 주석은 성경의 토대 위에 논리를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연방대법원의 수많은 판결도 뿌리깊은 기독교 정신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도덕적 상대주의, 실용주의, 개인주의가 우세하여 성경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 참신한 이론인 양 인기를 끌고 있는 게 사실이다.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정교분리의 헌법 위반으로 본 1962년 연방대법원 판례('엔젤 대 바이탈' 케이스)를 전환점으로 미국 사회에서는 건국초기의 청교도 정신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아는 것에 대항하여 인기를 끄는 이론을 깨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 복종케 하는(고린도 후서 10:5) 것이 '크리스쳔 로여'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의무적인 성경읽기나 예배참석은 폐지된지 오래 되었어도 캠퍼스 도처에서 웨슬리의 기도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게시판 광고를 통해 알 수 있었다. SMU의 특색을 살려 기독교식 화해.중재 과목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자는 논의도 있었다. 그리고 기독학생회(크리스쳔 리걸 소사이어티)에서는 매주 금요일 외부 목사님을 초빙하여 예배를 보고 화요일 정오에는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등 활발한 모임을 가졌다. 내가 J.D.과정의 미국 학생들과 처음 접촉을 가진 것도 기독학생회 모임에서였다. 모일 때마다 자기소개 순서를 가져 서로 이름을 익히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J.D. 1학년은 원엘(1L), 2학년은 투엘(2L) 하는 식인데 30대 초반의 레오 목사는 자기는 '노엘'(성탄)이라고 하여 우리를 웃기곤 하였다.

레오 목사 설교의 주제는 현실의 생활에 있어 기독교 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게 많았다. 예비 로여들 앞에서 법률용어를 구사하는 비유가 많았는데, '별거하려는 부부 앞에 기막힌 화해의 제안이 나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스스로 화목제가 되셨다고 설명하였다. 또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는 그 해결책에 매달리기보다는 먼 훗날 자신의 장례식때 그 일을 돌아본다고 상상해보면 문제해결이 쉬어진다는 말씀도 있었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러브레터인데 이것을 읽지 않고 선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도와 헌신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하였듯이 이웃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돌보아주는 것이라 하였다. ▲

 

과부를 동정하는 재판관

케이스북을 읽다 보면 기독교 정신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판례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런 판례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든가 '과부와 고아를 동정하라'는 기독교 행동원리가 배경에 깔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약법 시간에 배운 '커크시 대 커크시' 케이스는 다소 의외였다. 1845년 앨라바마주 대법원이 하급심 판결을 뒤집은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을 어렵게 양육하는 형수를 측은히 여기고 시동생이 '가재를 정리하고 오시면 살집과 농사지을 땅을 드리겠노라'는 편지를 보냈다. 과부는 시동생의 말만 믿고 60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왔다. 시동생은 처음 2년간은 좋은 집과 농토를 제공하였으나 그후에 마음이 바뀌어 형수와 조카를 자기 땅에서 몰아냈다. 그러자 과부가 시동생을 약속위반이라고 제소하였는데 고지식한 법관들은 일방적인 혜택을 베푸는 것으로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법원칙에 충실하여 불쌍한 과부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결론은 기독교인의 양심상 받아들이기 괴로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법학자들이 궁리를 거듭하여 '비록 일방적인 약속일지라도 상대방이 이를 신뢰하였으면 약속을 한 사람은 거래의 핵심요소인 약인(consideration)이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근대화된 계약법 이론을 탄생시켰다.
1898년 네브라스카주 대법원은 '리케츠' 케이스에서 손녀딸에게 일을 그만두면 생활비를 대주겠다는 할아버지 말에 직장을 그만 둔 원고가 아무런 반대급부가 없었을지라도 피고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수입을 포기한 이상 피고는 약인이 없으므로 계약불성립이라는 주장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커크시 사건이 50년만 늦게 제소되었어도 법원은 당연히 불쌍한 과부 편을 들었을 것이다.

회사법 케이스 중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64년 일리노이즈주 대법원은 '갤러' 케이스에서 '동업자간에 작성된 주주간 합의서에 다소 위법이 있더라도 회사의 채권자나 다른 주주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그 목적이 창업자 미망인의 생활대책을 세우는 것이라면 합의서의 유효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판결문에서는 주주가 몇 명 안 되는 이른바 폐쇄적인 회사에서 소수주주의 권익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매우 장황한 논리를 전개하였지만 재판부는 처음부터 시동생한테 배반당하고 생활대책이 막연해진 불쌍한 과부를 동정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이와 같이 구체적 사실관계에 접한 법관이 직관적으로 시비판단을 하고 이에 맞춰 법이론을 구성한다는 학설을 '리걸 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빈부의 갈등, 공해문제 등에 있어 구체적으로 타당성 있는 법을 선언하는 것이 법관의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되었다. ▲

 

카도조 판사의 명판결

강의시간에 교수가 예로 드는 명판결이란 참신한 법이론으로 선례를 깨고 새로운 상황에 맞게 일반 정의관념에 부합하는 결론을 끌어낸 것들이다. 이런 판례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는 일이 많았다. 미국의 법학도들은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서 홈즈, 카도조와 같은 위대한 선배지성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자신도 그와 같은 법률의견을 쓰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리라 여겨졌다.
많은 판례들을 찾아 읽게 되면서 특히 카도조 판사의 판결문에 대하여는 정말 주의를 기울여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설득력있는 장려한 문체도 일품이었지만 종전의 법이론이나 판례를 정면으로 뒤엎지 않으면서 급변하는 사회정세에 맞게 새로운 법이론을 도출하는 그의 지성에 존경심을 금할 수 없었다.

스페인계 유대인의 후손인 벤자민 카도조는 1932년 후버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뉴딜 시대에 중요한 판결을 많이 남겼다.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카도조는 91세의 고령으로 사임한 홈즈 대법관의 후임으로서 그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었기에 그의 대법관 임명은 전국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케이스북에 수록된 그의 명판결은 18년 동안 재직하였던 뉴욕주 대법관, 대법원장 시절에 내린 것이 많다.
그가 사용한 '리즈너블 맨'(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미국법에 있어 중요한 기본명제이다. 1916년 카도조 판사는 '맥퍼슨 대 뷰익 자동차' 사건에서 불법행위의 전제조건인 '위험한 물건'의 개념을 종전보다 확장하였는데, 그때 막 보급되기 시작한 자동차처럼 물건의 성질상 부주의하게 만들어지면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 (리즈너블 맨의 입장에서) 확실하고 그 결과를 예견할 수 있었다면 위험한 물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사건에서 자동차회사는 고객이 아닌 딜러에게 차를 팔았지만 딜러의 고객이 차를 사용하도록 맞아들였고 자동차 바퀴의 결함에 따른 사고의 위험을 상당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계약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카도조 판사는 '사법절차의 본질'과 같은 수많은 강의와 저서를 남기고 그가 졸업한 컬럼비아 대학을 비롯하여 여러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는데, 경건한 유대교 신자로서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

 

티쳐 로여의 권위

카도조 판사가 대학에서 즐겨 강의를 하였듯이 미국에서 존경받는 직업중의 하나가 '티쳐 로여'이다. 판사, 변호사도 '어정트 프로페서'라 하여 로스쿨 강의를 맡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 패컬티 중에서도 권위가 있는 교수는 직함에 후원기관의 이름이 길다랗게 붙는다. 바로 석좌교수이다. SMU 로스쿨에서 회사법과 증권법을 가르치는 스타인버그 교수는 속사포식 강의로 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UCLA,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연방 고등법원과 증권거래위를 거쳐 대학강단에 선 분이다. 그는 8권의 저서와 백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국제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그의 공식직함은 '루퍼트 앤 릴리안 래드포드' 교수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1994년 3월 서울 법대 宋相現 교수가 뉴욕대학 로스쿨의 석좌교수로 선정되었다 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연구실적이 뛰어난 교수한테는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스칼라쉽이 제공되는 것이다.

국제거래법을 재미있게 가르친 피터 윈십 교수는 하버드와 예일, 런던 대학등 세계에서도 제일 이름난 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그도 '제임스 클레오 톰슨' 교수이다. 윈십 교수는 학기초에 학생들을 일일이 호명하여 '어디 출신이고 이 과목을 선택한 동기가 무엇이며, 자기를 어떻게 기억해주면 좋겠나' 하는 것을 학생들 앞에서 발표케 하였다.

1994년 3월 예일에서 국제인권법을 가르치는 해롤드 홍주高 교수가 SMU에 와서 '미국의 외교정책과 인권문제'라는 주제로 초청강연을 가졌다. 예일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한국인 학자가 주류에 속하는 법과목의 강의를 맡지 못한다는 게 현실의 벽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미국내에서 아시아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으므로 宋相現 교수가 한국법을 해외에 소개함으로써 미국 대학의 석좌교수가 되었듯이 미국의 학생들도 아시아 법을 거의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

 

소크라테스 문답법

외국학생이 미국 로스쿨에서 겪게되는 혼란과 당황스러움의 첫째 요인은 소크라테스 문답법이라고 하는 교수방식이다. 대부분의 교수가 소크라테스 문답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는데, 교수는 학생들에게 그날의 이슈에 관한 질문을 던져 학생이 중요한 요점을 답변하도록 유도한다.
연전에 하버드 로스쿨 이야기를 다룬 TV 영화 '페이퍼 체이스'에서도 실감나게 그려져 있지만, 교수한테 호명되는 자기 이름이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가 없다.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교수의 어떠한 질문에도 답변할 수 있을 만큼 예습을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좌석순(학기초 첫 시간에 앉는 자리가 고정좌석이 된다)이나 알파벳순으로 지명하는 교수의 시간에는 자기차례를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할 수 있다. 수업참여도가 성적에 반영되는 만큼 적극적인 학생은 다른 학생의 답변이 막히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곤 한다. 미국 학생이야 자기네 말로 하니까 책만 미리 읽어온다면야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그러나 외국 학생,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온 학생들은 교수가 미리 읽어오라고 내준 과제(리딩 어사인먼트)를 읽고 이해는 하지만 교수의 질문을 받다보면 말하는 것이 전혀 딴판이 될 수 있다. 나 역시 언제 교수의 지명을 받을지 모르므로 이러한 불안을 씻기 위해 그만큼 예습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해한 대로 답변할 내용은 머리에 떠오르는데 정확한 법률용어가 생각이 않나 더듬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처음 몇 달간 나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 모세의 말문을 틔워주신 것처럼 저도 영어가 술술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나면서 보니까 사건개요를 설명하고 판결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것이 로스쿨 1학년때 지겹도록 연습하는 '케이스 브리프'이다)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교수가 그날 강의의 요점이 학생 입에서 나오도록 유도질문을 하니까 발표자는 요령있게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 몇 달 동안 '가만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하며 조용히 있었던 나도 강의시간에 발표를 할 자신을 얻고 그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

 

* SMU 로스쿨 졸업앨범 필자의 프로필

셰브론 케이스의 의의

내가 용기를 내어 브리프한 판례는 '셰브론' 케이스였다. 환경보호단체가 대표적인 공기오염물질 배출업체인 셰브론을 상대로 제소한 사건을 1984년 연방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심판한 케이스였다. 호주 출신의 맥긴리 교수는 이 판결에 언급된 법해석 기준이 이후 하급심 판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오늘의 시간을 즐겁게(?) 해줄 희생양을 찾았다.
이 순간이 학생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럽다. 교수를 마주 바라볼 수도, 시선을 피할 수도 없는 묘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오직 누군가가 나서서 다른 학생을 편안하게 해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어찌하다 교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맥긴리 교수는 '오늘은 코리언 학생이 발표를 해보지' 하며 나를 지명하였다.

"사건 개요부터 설명해 보시오."
"일부 주가 환경청(EPA)이 정한 대기오염도 기준을 지키지 못하자 의회는 1977년 공기정화(클린 에어)법을 제정하여 각주가 대기중 공해물질의 배출허용기준을 새로 정하도록 했습니다. 환경보호단체는 EPA의 기준이 미흡하다고 보고 대표적인 공해배출업소인 셰브론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지요?"
"이슈는 EPA가 정한 기준이 그 공장 전체에서 배출되는 공해물질의 총량만 넘지 않도록 기존 공장의 일부 시설만 개체하는 것으로 족한가, 1977년법에 규정된 '움직이지 않는 오염원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공장 전체를 하나의 버블 안에 있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타당한가 하는 게 이슈였지요. 법률해석에 있어 법원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첫째, 법률에 명시적인 규정이 있으면 입법자의 의사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법률에 규정이 없거나 있더라도 모호할 경우에는 행정기관의 해석이 그 법률의 해석상 과연 허용되는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행정부에는 법률에 내포된 갭을 메꾸기 위한 정책결정과 규정제정의 권한이 있지 않나요?"
"첫째, 의회가 상세한 규정을 행정부에 위임한 경우에는 그러한 위임입법이 자의적이거나 법률과 저촉되지 않는 한 결정적입니다. 둘째, 의회가 위임한 것이 명시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법원이 독자적인 해석을 내리기보다는 행정부의 해석이 합리적인가 하는 것을 검토하게 됩니다."
"그래서 연방대법원은 어떤 결론을 내렸지요?"
"의회의 입법연혁을 살펴볼 때 버블이 무엇인지 규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므로 EPA의 해석이 합리적인 정책대안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당초 EPA는 공기오염물질 배출원을 공장 전체 및 개개의 시설 이중으로 보았으나, 1981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행정규제완화 차원에서 일부 시설에서 오염물질의 배출이 증가하더라도 공장 전체적으로는 배출량이 감소하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즉 공장 전체에 버블이 씌워져 있다고 보았지요. 이에 대해 환경보호단체에서는 입법취지상 개별적인 시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티븐스 대법관은 공기오염을 방지할 것이냐,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냐 하는 정책결정은 법관의 임무가 아니라고 했지요. 규제의 내용이 복잡하고 기술적이기 때문에 의회도 행정부에 위임을 한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행정부에서 판단할 사항이며, 법원은 행정부의 법률해석에 무리는 없는가만 따지면 된다고 말했지요."

셰브론 케이스는 미국법의 이정표를 세운 중요한 연방대법원 판결이다. 일례로 80년대 후반 미국의 은행들이 보험·증권업무를 취급하고자 했을 때 보험·증권업계에서는 은행법 위반임을 내세워 이를 금지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때 법원은 셰브론 케이스를 원용하여 연방중앙은행(FRB), 통화감독청(OCC)의 법률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편 버블 이론은 공해방지시설을 갖춰 오염물질 배출량을 줄인 공장이 자기네 여유분을 '클린 에어권'이라 하여 무형자산으로 다른 공장에 팔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

 

미국의 제조물책임 소송

메리의 아버지 필립은 메리의 18세 생일을 기념하여 GM 스포츠 카를 사주었다. 광고에 의하면 시속 150마일까지 낼 수 있는 신형 스포츠 카였다. 메리의 생일 파티가 끝날 무렵 메리의 남자 친구 존이 맥주를 두어 캔 마신 기분에 메리의 차를 테스트 드라이브해본다고 메리를 옆자리에 태우고 하이웨이로 들어섰다. 존은 아직 미성년자라 제한된 운전면허를 갖고 있다. 존은 하이웨이 커브 구간에서 시속 120마일로 달리다가 옆차를 들이받아 그 차를 운전하던 탐이 중상을 입었다. 탐이 당신에게 소송을 의뢰했는데 당신은 누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는가?

맥긴리 교수는 자기 나라에서 법공부는 마쳤지만 영미법은 잘 모르는 LL.M.과정의 학생들에게 미국의 법현실을 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위와 같은 가상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를 '하이포'라고 하는데 미국의 로스쿨에서는 강의시간 중에 수많은 하이포 예제를 다루게 된다. 여러 학생들이 손을 들고 자기의 의견을 발표했는데, 이에 대한 교수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 존: 그에게 과실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는 손해를 배상할 자력이 없다. 미국에서 미성년자의 부모는 자녀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이 없다.
▷ 필립: 그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술을 마신 손님이 운전(미국에서는 각주마다 알콜, 약물에 의한 취중운전(DWI)을 중범죄로 취급하고 있다)하다 사고를 냈지만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 고속도로 관리국: 커브 구간의 설계에 미스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존은 55마일의 속도제한을 지키지 않았다.
▷ GM: 탐은 GM 스포츠 카를 구매한 고객이 아니다. 그리고 시속 150마일까지 낼 수 있다고 광고는 하였지만 아무리 스포츠 카라 해도 일반 고속도로에서 120마일로 달리는 것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는가?

맥긴리 교수가 내준 하이포의 이슈는 많은 학생들이 짐작한 대로 제조물책임(미국에서는 'Products Liability'라 하여 아주 흔한 소송사건이다)에 관한 것이었다. 교수는 우리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7주에 걸쳐 19세기 이래 제조물책임에 관한 대표적인 영미법 케이스를 읽고 분석하게 하였다. 영미법은 법원의 판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권위있는 선례를 원용하거나 이를 차별화함으로써 사회변천에 따라 법이 발전되는 모습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표적인 판례 20여개를 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제조물책임에 관한 미국 판례의 추이를 대강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현대 자동차 케이스

제조물책임을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교수가 소개해주는 자료를 따로 찾아 읽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관한 참고자료를 읽어가는 동안 처음에는 총, 약품과 같이 위험한 성질의 물건을 부주의하게 다루어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에만 제조물책임을 인정하던 것이 위험을 예견할 수 있거나 원고와 피고간에 당사자관계가 없어도 책임을 지우는 방향으로 책임범위가 확장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랄프 네이더에 의하여 소비자보호운동이 한창 고조된 60년대초에는 피고에게 과실이 없어도 손해를 배상케 하는 엄격책임(strict liability)의 법리가 등장하였음을 알았다.

제조물책임은 과실로 인한 책임, 보증위반에 따른 책임, 불법행위법상의 엄격책임 등 세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불법행위법상의 엄격책임이란 제조판매업자에게 과실이 없어도 일정요건에 해당하면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 취지는 제조업자 입장에서 위험을 분산하기 용이하고, 보증책임에 비해 당사자관계, 면책조항 등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출소기한이 길고 제조판매업자로 하여금 보다 안전한 제품을 만들게 촉구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물건에 제조 또는 설계상의 결함으로 사고가 난 경우에 그치지 않고 적절한 경고를 하지 않아 사용자가 상해를 입은 경우에도 인정된다. 또 물건 자체에는 결함이 없어도 사용설명서에 오류가 있거나 적절한 경고가 누락되어 사용중 위험을 야기한 경우에도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본다.

도서관에서 판례를 조사하는 도중 현대 엑셀 자동차가 좌석벨트의 안전설계에 결함이 있거나 사용에 따른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다 하여 엄청난 손해배상을 해준 몇 건의 사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제가 된 88년 모델이 미국에서 26만대 이상 팔려 외국산 소형자동차로서 기록을 세웠다 해도 그 이익금이 대부분 보험회사로 간다면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미국에 와서 몰고 다니는 90년식 엑셀에 안전벨트가 어깨와 허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에 연유함을 알았다.
80년대 중반부터 법원이 더 이상 소비자 편을 들지 않고 기업의 사정도 고려해주는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제조물책임 소송으로 기업이 하루아침에 문닫을 수도 있으므로 국내기업이 미국시장을 개척할 때 위험이 예견되는 제품은 책임보험에 가입하는 등 만반의 대비가 있어야 한다. 현대 자동차가 미국에서 당한 게 너무 억울하고, 또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파월 장병들이 텍사스에서 그 제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참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판례법의 최신경향을 소개하는 자료를 국내에 발표하였다. 오늘날 무역거래는 총칼없는 전쟁인데 적을 알아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

 

미국 법원의 견학

미국의 사법제도가 우리 나라와 가장 다른 점은 배심제도라 할 것이다. 학교측 주선으로 댈러스 시내의 주법원과 연방법원을 차례로 견학할 기회를 가졌는데, 한 법정에서는 마침 제조물책임 소송의 배심원 선정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배심원후보 수십명이 참석하여 당사자측 변호인으로부터 제조물책임에 대하여 아는지, 피고회사 제품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 질문을 받고 있었다. 피고회사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사람을 기피(쥬리 챌린지)하기 위한 절차라고 했다.
배심제도는 형사(6개월 이상의 징역·금고에 해당하는 범죄) 또는 민사사건에서 미국의 보통시민들로 하여금 같은 시민의 유죄, 무죄 또는 책임의 유무를 판단하게 하는 (1심에서 판사는 재판의 진행만 담당한다) 가장 민주적인 재판절차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배심제도를 설명해준 댈러스 지법의 존 마샬 판사에 의하면 수많은 인종으로 구성된 미국사회에서 편견없는 배심원 12명을 선정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흔히 유권자명부나 운전면허자 명부에서 무작위로 뽑고 있는데 아직 선거권이 없는 외국 이민자 또는 자동차가 없는 도시생활자, 일용근로자는 배심원이 될 수 없으므로, 예컨대 동양인 형사피고인이 그의 문화적 배경을 모르는 서양인 배심원들로부터 공정한 평결을 받을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설명이었다.
그 결과 배심원 선정을 마치고 보면 인종, 성별에 있어 불편부당성이 의심받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백인 경찰이 흑인 운전자를 폭행하여 결국 LA 폭동을 유발한 '로드니 킹' 재판 때에도 처음에 백인 일색의 배심이 경찰피고의 무죄를 평결하는 바람에 사태가 확대되었다. 그래서 배심원 중에 적어도 3명은 피고인과 같은 인종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인종 쿼터제)마저 나오고 있다 한다. 1986년 인종기준으로 배심을 구성하는 것이 헌법의 평등보호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한 연방대법원이 1994년 4월에는 이 논리를 성별로 확장하여 자녀양육 소송에서 여성 일색으로 배심을 구성한 것 역시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같은 로여라 해도 구체적인 케이스에서 법을 선언하는 판사는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된다. 텍사스에서는 대법원까지 판사를 선거로 뽑고 있으므로 판사가 되려면 사회적인 명망과 인기를 누려야 한다. 종신직인 연방법원의 판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는 까닭에 그 권위가 훨씬 두드러지는 것 같다. 통계에 의하면 1993년 현재 미 연방법원의 법관 수는 대법원 9명, 고등법원 179명, 지방법원 648명등 도합 836명이다. SMU 로스쿨에도 교과서에 그의 판례 여러 편이 수록된, 제 5지구 연방고등법원의 패트릭 히긴보쌈 판사가 거의 매 학기 출강하고 있다. 그는 1975년 37세에 포드 대통령에 의해 연방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었으며 1982년 레이건 대통령때 북텍사스 지역을 관할하는 연방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기독학생회 모임때 연방 지방법원의 조 켄달 판사의 신앙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일요일 아침에 기독교인이 되기는 쉽다. 그러나 다른 때에도 위선적인 얼간이 소리를 듣지 않는, 기독교적 양심을 가진 법률가가 되기란 쉽지 않다'고 고백하였다. 두 번째로 최연소 연방판사인 그는 로스쿨을 졸업한 후 경찰관, 검사를 거쳐 판사가 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상원 법사위의 인준을 거칠 때 딱 한 가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인종차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야 물론 나쁘죠."  ▲

 

미국 헌법의 이슈

헌법 시간에 반드시 배우게 되어 있는 1973년의 '로우 대 웨이드' 사건은 낙태문제와 관련하여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는 핫 이슈이다. 병원에서 근무했던 관계로 의학지식이 많은 해리 블랙먼 판사가 작성한 연방대법원 판결문은 임신 3분기설을 취했다. 즉 임신 제1 삼분기중에는 국가는 임신부의 낙태를 일체 간섭할 수 없고 임신부와 의사의 판단에 맡겨야 하며, 제2 삼분기 중에는 낙태 자체는 금지할 수 없으나 임신부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낙태절차를 규율할 수 있으며, 마지막 태아가 살아 출생할 가능성이 있는 기간에는 태아의 생명보전을 위해 낙태 자체를 금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은 미국의 전통적인 윤리관에 비추어 폭탄적인 내용을 담은 관계로 2년후의 연방대법원 판결('케이시' 사건)에서는 5 대 4의 다수의견으로 유지되기는 했지만 3분기설이 폐지되는 등 상당부분 수정되었다. 일례로 임신부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 한 주정부로 하여금 낙태선택권을 제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지금도 낙태 찬성론자와 금지론자들은 사사건건 충돌을 벌이며 서로 폭력마저 불사하고 있다.

1994년 4월 은퇴를 발표한 85세의 블랙먼 대법관은 두 달 전에도 사형제도가 더 이상 합헌일 수 없다는 선언을 한 바 있다. 그는 대법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줄곧 사형제도가 합헌이라는 입장에 서왔으나 은퇴를 앞두고 '사형을 공정하고 일관되게 실시한다는 것은 결국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음을 후배 판사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였다. 이때 스칼리아 대법관은 반대로 '사형은 헌법상 허용될 뿐만 아니라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처벌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발표하였다.
이같은 대법관들의 격론은 14년전 어느 술집에서 사람을 죽이고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한 텍사스 사형수의 재심신청에서 비롯되었다. 최근 TV 영화를 리바이벌한 '도망자'에 많은 관객들이 호응을 한 것도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소박한 정의관념 때문일 것이다. 블랙먼 판사도 이러한 관점에서 사형이 용납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범죄율이 상승하면서 범죄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세 번 이상 중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종신형이라는 이른바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입법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헌법 이념과 관련된 이슈는 대법관들의 진보 또는 보수성향을 분석해보면 그 결과를 대강 예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헌법학자들은 90년대 초 브레넌 판사와 마샬 판사가 떠난 뒤로 연방대법원에서는 진보주의적인 의견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고, 진보적 중도입장을 취한 블랙먼 판사까지 은퇴하면 대법원은 중도적인 스티븐스 판사를 빼놓고는 보수 일색으로 바뀌게 됨을 우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보와 보수의견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사상적인 숨통이 트여 큰 이슈가 제기되었을 때 활발한 의론이 개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1940년대에서 60년대 초까지 정치인 출신인 후고 블랙 대법관과 교수 출신인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이 연방대법원의 양 진영에서 서로 대립을 벌이며 언론의 자유와 민권 신장에 기여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헌법학 교수 출신인 클린턴 대통령 자신이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블랙먼 대법관의 후임자를 고를 때 많은 고심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

 

캠퍼스 성희롱 사건

우리 나라에서도 3천만원 배상사건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섹슈얼 허래스먼트'(성희롱 내지 성적 괴롭힘)가 캠퍼스에서 자주 문제가 된다. 이는 상대방이 원치 않는 성적인 유혹, 접촉, 성적인 호의의 요구, 성적인 의미를 가진 구두 또는 육체적 행위이다. 한 마디로 상대방이 전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의미가 담긴 행동을 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다.
섹슈얼 허래스먼트는 1964년 민권법에서 성차별의 일종으로 처음 규정된 이래 직장 상사나 학교 선생과 같이 고용조건, 성적등을 무기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많이 적용되어 왔다. 1993년 11월 연방대법원은 '해리스' 사건에서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은 '심리적 피해를 증명할 필요없이 보통 상식을 가진 사람이 괴로움, 불쾌함을 당한 것으로 족하다'는 전원일치의 판결을 내렸다. 1991년 상원의 대법관인준 청문회에서 창피를 당했던 클라렌스 토마스 대법관도 이에 찬동하였다.

캠퍼스에서의 성희롱 사건은 대부분 교수가 학점을 잘 주겠다고 유혹하거나 아니면 나쁘게 주겠다고 위협하면서 여학생에게 추근대거나 육체적 접촉을 시도한 사례들이다. 텍사스는 주민들의 보수성향 때문에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엘파소 소재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1982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화학과의 L 교수로부터 성적 희롱을 당했다는 한 여학생의 편지가 대학신문에 게재되었다. 다른 3명의 여학생도 같은 사례를 신고해오자 학교 당국은 L 교수에게 사직을 권고하였는데 그가 불응하자 징계위원회를 열어 파면하였다. L 교수는 파면처분이 부당하다고 법원에 제소하였다. 징계위원회가 피해자측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듣고 가해자로 몰린 사람에게 증인을 반대신문할 기회를 주지 않아 헌법의 적법절차를 위배했다는 게 이유였다.
섹슈얼 허래스먼트는 사건의 성격상 가해자와 피해자 외에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어렵고, 단지 진한 농담을 한 것만으로도 법에 저촉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섹슈얼 허래스먼트의 가해자에게 엄청난 배상의무를 지움으로써 사건의 재발을 막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특히 1991년에 개정된 민권법은 피해자가 판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배심원에게 호소하여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자칭 피해자가 법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연기를 능란하게 할 경우에는 아무리 점잖은 신사라 해도 제대로 해명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기 십상이다.
1993년 겨울 SMU 캠퍼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경쇠약증세를 가진 여학생이 신학대학원 교수로부터 정기적인 카운셀링을 받았는데 상담도중에 성희롱을 당했다고 해당교수와 학교측을 제소한 것이다. 제소한 여학생에게 신경증 증세가 있고 담당교수가 워낙 인품이 훌륭한 분이기에 법원에서는 이 사건을 기각하였지만 캠퍼스 안팎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미친 개에게 물리지 말라. 치료약도 없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을 다룬 연극이 1994년 봄 대학가에서 상연되었다. 3월말 막을 올린 '올레아나'는 뉴욕과 시카고 공연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퓰리쳐 수상작가 대빗 마멧의 작품이었다.
제1막에서 중년의 교수는 그의 연구실에 들어온 여학생이 안중에도 없다. 그의 관심은 학군 좋은 동네에 집을 구하는 것과 정교수직(테뉴어)을 받는 일이다. 마침 그의 아내가 집을 계약하러 가 있었고, 그의 테뉴어를 심사하는 교수회의가 열리려는 참이었다. 여학생은 교재나 강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호소하지만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성적은 걱정말라고 한다. 무엇을 대가로 암시하는 것인가?
제2막에서 여학생이 다시 찾아오는데 교수는 여전히 좌충우돌이고 그녀는 교수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확실히 전달한다. 여학생은 아마 로스쿨 다니는 남자 친구로부터 몇 가지 법이론을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언행 중에서 꼬투리가 잡힌 교수는 말수가 줄어든 대신 완력을 행사하려 든다. 제3막에서 교수는 완전히 수세로 몰린다. 여학생의 섹슈얼 허래스먼트 고발로 그의 테뉴어는 기각되고 학교에서도 쫒겨날 판이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놓았다고 생각한 그가 여학생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진짜 폭력을 행사하려는 찰나 막이 내린다. ▲

 

로스쿨의 여학생

아무리 섹슈얼 허래스먼트가 무섭다 해도 가까이서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아닌 한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SMU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상당한 비율의 여학생들이 늘씬한 미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겨울만 빼놓고는 기본 옷차림이 핫팬츠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SMU 여학생들 중에 미인이 많은 것은 예술대학이 있어 예능 전공자가 많은 탓도 있지만 본래 텍사스에 미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앵글로-게르만-라틴 피가 아름답게(?) 섞인 탓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플레이보이지의 모델이 SMU에 입학하였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또 1994년 3월초 대학신문은 1995년도 미스 텍사스 선발대회에 SMU 여대생이 5명이나 출전한다고 보도하였다.

미국의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SMU 로스쿨의 여학생 비율은 평균 45%가 넘는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0%가 채 되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4-5년이 못되어 40%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1988년에는 신입생의 51%가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인구비율로 따져도 다닐 만한 여학생은 모두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셈이다. 법조 직업이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이제 여자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는 통념이 보편화되었다. 예일 로스쿨을 나온 퍼스트 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이 앞으로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길 것임에 틀림없다.
여학생 수가 늘어나니까 로스쿨에도 '공부 잘 하는 여학생은 예쁘지 않다'는 통념을 깰 정도의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학생들이 많다. 미국에서는 학력과 재산과 용모가 거의 비례한다고나 할까, 내가 들은 계약법 시간에도 킴 노박을 닮은 금발의 백인 여학생이 있어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여학생들은 평소 반바지에 티샤쓰 차림으로 룩색을 메고 다니다가도 취업 인터뷰를 할 때에는 정장을 하고 나오는데 장차 연봉 6-7만불 이상 받을 여자 변호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

 

모의재판 방청소감

1994년 4월의 첫 월요일 무트 코트(모의재판) 결승전이 로스쿨 강당에서 열렸다. 금년도 결선에 오른 두 팀이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그중 한 여학생은 계약법 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는 미스티 벤츄라였다. 여학생이 로스쿨 학생의 거의 반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여성 로여가 미국 법률문화의 발달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우려하는 소리도 있지만 오늘날 이것은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
로스쿨 1학년생이 참가하는 모의재판에는 '마크 트라이얼'과 '무트 코트'(필수)가 있는데, 전자는 사실심에서의 증거조사, 후자는 상고심에서의 법률논쟁이 중심이 된다. 그 동안 여러 달에 걸쳐 토너먼트를 벌여온 학생들 중 마지막 두 팀이 현역 판사들 앞에서 경연을 벌이게 되었다. 재판의 진행과 심사는 텍사스주 대법원 판사 및 연방법원 판사 다섯 분이 맡아 함으로써 모의재판의 권위와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1994년도 SMU 모의재판의 케이스는 다분히 동정심을 유발하는 사안이었다. 유료 양로원에 약간 노망기가 있는 모친을 맡겼다가 사고로 모친을 여읜 중년부인이 양로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한 사건으로, 양로원에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근거와 징벌적 손해배상(불법행위의 가해자가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게끔 징벌적인 엄청난 금액을 피해자에게 배상시키는 것)의 허용 여부가 주된 이슈였다.
'메이 잇 플리즈 더 코트'로 서두를 장식하는 학생 변호사의 법률주장에 재판장을 비롯한 판사들이 간간히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한데 '예스, 아너'로 시작하는 여학생들의 답변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한다 해도 내가 만일 저 자리에서 재판장이 던지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절망감 같은 게 엄습해 왔다.

판사나 변호사의 경력 중에서 모의재판 출전은 매우 중요한 항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예컨대 1993년 8월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된 긴즈버그 대법관은 하버드와 콜럼비아 로스쿨 재학시 여학생이 희소한 때였음에도 법률잡지 편집과 무트 코트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학교성적도 매우 우수하였지만 그녀를 받아주는 대법관이나 뉴욕의 법률사무소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대학강단에 선 전력을 갖고 있다.
긴즈버그는 워싱턴 연방고등법원에 있을 때 대항항공 격추사건을 다루어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그때의 쟁점은 바르샤바 협정의 효력범위 문제였는데 우습게도 항공권에 인쇄된 활자의 크기가 문제가 되었다. 몬트리올 의정서에서는 항공사의 책임한계를 7만 5천불로 정하고 이를 항공권에 10 포인트 활자로 고지하게 하였는데 대한항공은 8 포인트 활자로 인쇄하여 곤욕을 치른 것이다. 이때 워싱턴 고등법원은 항공권에 흠은 있지만 대한항공은 7만 5천불 책임제한조항을 원용할 수 있다는 1심 판결을 그대로 인정하고 항소를 기각하였다. ▲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지위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거의 해소된 것처럼 흑인에 대한 호칭도 많이 바뀌었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니그로' 라는 말이 예사로 쓰였으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 민권운동을 개시한 이후 과거 노예시대를 연상케 하는 이 말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흑인을 따로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굳이 한다면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인이라는 '아프리칸-아메리칸'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래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차별은 사회 지배계층의 의식 속에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 로스쿨에서도 1993년 가을 이에 대한 계몽을 위해 '월드 오브 다이버시티'라고 하는 세미나를 가졌다. 참석이 의무화되어 있지 않아 참가자는 별로 많지 않았으나 나로서는 미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의식의 단면을 엿보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비디오를 보여주는데 나이와 학력이 비슷한 흑인과 백인 청년이 20분 간격을 두고 같은 코스로 직장을 구하러, 방을 얻으러, 차를 사러 다니는 모습을 몰래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었다. 백인 청년이 갔을 때에는 모두들 친절하고 호의적인데 비하여, 똑같은 상대방이 흑인 청년에 대해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거나, 필요 이상으로 꼬치꼬치 캐묻거나 값을 올려 부르는 게 다반사였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편견이 그처럼 뿌리깊은 줄 미처 몰랐었다.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어보길래 나 역시 미국사회의 '마이너리티'(소수민족) 입장에서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놀랍다. 이 나라에서 차별을 받으며 살지 않게 된 게 다행스럽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언제나 해소될 것인가? 이게 남아 있는 한 증오와 반목이 미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러나 '흑인이 그처럼 대우받는 것이 상식화된 데에는 백인들의 편견 이전에 흑인들이 자초한 점도 없지 않다. 모두 함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같은 깃을 가진 새는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처럼 어느 사회에나 편견은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당위론도 있었다.

마침 그무렵 공부한 수표법 케이스 중에 1975년 휴스턴에서 일어났던 '노쓰쇼 뱅크 대 팔머' 사건이 있었다. 어느 고객의 275불짜리 수표에 이서된 서명이 위조로 밝혀진 후 은행측이 이 고객의 구좌에서 275불을 공제하고 나머지 정당하게 발행된 수표에 대해서도 부당하게 지급거절을 함으로써 고객이 곤욕을 치른 사건으로 은행의 책임범위를 따지는 재판이었다. 텍사스 민사 고등법원은 은행측이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없이 부주의하게 악의적으로 지급거절한 사실을 지적하고 1심의 배심이 평결한 실제 손해배상 2,000불, 징벌적 손해배상 3,500불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은행측이 흑인이라는 편견을 갖고 손님에게 고답적으로 행동한 점이 20배의 손해배상을 한 근거가 된 것이다. 흑인들의 발언권이 높아진 지금은 훨씬 더 많이 물어줘야 할 것이다.
SMU 캠퍼스에서는 마이너리티 학생의 비율이 15%로 미국 평균치보다 낮기 때문에 오히려 대접을 받는 면도 없지 않다. 1993/94학년도 학부 학생회장은 심리학을 전공하는 흑인 학생이었다.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는 다이버시티의 정신이 더 많이 요구되고 있다. 새로운 WTO(세계무역기구) 체제하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거래할 때 국경은 거의 사라지게 되며 서로 선입관을 버리고 민족과 문화적 배경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믿고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

 

국제거래법과 UR 협상

LL.M.과 J.D. 학생이 반반씩 섞인 윈십 교수의 국제거래법 시간에는 폴솜 교수 공저의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였다. 학생들 각자가 국제거래 전문변호사가 되어 고객이 문의해온 문제를 놓고 책에 소개된 자료를 참고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었다.
윈십 교수는 다이버시티(?) 정신에 따라 J.D.와 LL.M.학생들을 골고루 4-5명씩 11개 그룹으로 나누고 그날 지적 당한 그룹의 멤버가 책임지고 질문에 답변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자연히 서로 그룹 스터디를 하거나 아니면 순번제로 스폭스맨(우먼)을 정하여 답변을 전담시켰다. 대부분 고학년 J.D. 학생이 답변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실제 변호사처럼 관련자료를 심도있게 조사·분석하여 발표하는 품이 제법이었다. 하긴 J.D. 1학년 과정만 제대로 마치면 반 변호사가 되는 셈이었다. 왜냐하면 그네들은 1학년때 '리걸 리서치'(판례.법령 조사) '리걸 라이팅'(각종 법률문서 작성) '로여링'(고객상담, 협상, 증인조사)을 배우면서 법률가로서 트레이닝을 받기 때문이다.

교과서 안에 제시된 문제가 국제무역거래와 신용장, GATT, 미국의 무역거래법, 기술이전과 상표·프랜차이즈 계약, 개도국에서의 외국인투자, 구상무역, 국제분쟁의 해결등 국제거래와 관련된 제반 현실문제였으므로 매시간 흥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예컨대 신용장에 의한 무역거래에서 수출업자가 사기를 친 게 확실할 때 수입상이 당신을 찾아와 법률대책을 문의한다면 무슨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럴 때에는 미국 법원에 찾아가 긴급한 사정이 있음을 소명하고 신용장을 개설한 미국은행에 대한 신용장대금의 지급을 금지하는 명령(injunction)을 구해야 한다. 이때 법원은 신청인이 회복불능의 손해를 입을 수 있는 긴급한 상황에 본안 승소판결을 거의 확실하게 받을 수 있고, 그 어려움을 구제해야 할 사정이 신청인 쪽에 있으며 그러한 결정이 공서양속에 합치될 때라야 비로소 인정션을 명하게 된다. 이를 어기면 법원모독죄로 인신구속 등 더 엄한 처벌을 받는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례중심으로 공부를 하니 1993년말 우리 나라 군수본부가 신용장사기 사건에 휘말린 사건이나 1994년초 우리 나라 인조 다이아몬드 메이커가 미국법원으로부터 특허법 위반으로 제조금지 명령(인정션)을 받은 사건이 실감나게 이해되었다.

또 멕시코에 기술이전 투자를 계획하는 미국기업의 대표가 당신을 찾아와 법률상담을 요청하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선 고객이 원하는 투자조건을 알아보고 멕시코의 기술이전에 관한 법을 구해다가 고객이 멕시코 파트너에게 요구할 수 있는 사항과 요구할 수 없는 사항(멕시코 당국의 등록거부 사유)을 설명한 다음 라이선스 계약서 초안을 제시해야 한다. 윈십 교수는 큰 로펌의 권위있는 파트너가 되어 신참 변호사가 작성해온 계약서안의 잘잘못을 지적해주는 식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GATT를 공부할 때에는 우리 나라가 UR 협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양보해야 할 것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각국의 이해관계나 협상력에 따라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는 국제회의의 역학관계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와 사정이 비슷한 국가그룹에 속하여 공동전선을 펴지 않고 우리 나라만의 고유한 사정을 가지고 수많은 상대국을 설득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겠는가?
UR 협상과정에서 우리 나라 농수산부장관이 두 사람이나 해임된 쌀 시장 개방문제만 하더라도 국제적인 대세가 개방 쪽이라면 이를 양보해주는 대가로 다른 반대급부를 얻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윈십 교수도 협상 테이블에서 얻을 것과 양보할 것을 판단할 때 법률가는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끝가지 냉정하고 타산적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1994년 1월 1일 NAFTA가 정식 발효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와 같은 아시아계 몽고족이 살았던 땅, 콜럼버스 내도후 식민침략을 당했던 멕시코가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협상을 통해 그 활로를 개척해나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비쳐졌다. ▲

 

멕시코 견문기

SMU 로스쿨은 그 지리적 이점을 살려 NAFTA(멕시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1994년 1월 NAFTA 세미나에 참석한 후 연구논문을 쓰기 전에 현장감을 맛볼 겸 멕시코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스프링 브레이크(3월의 봄방학)가 마침 좋은 기회였다.
본래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에는 멕시코계 주민(이들을 '치카노'라 한다)이 많이 살고 댈러스에는 스페인어 TV 채널도 2개나 된다. 그럼에도 나의 멕시코에 대한 지식은 1968년에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이지만 미국 영향권 하에 있고 정치현실이나 공해, 국민생활 면에서 아직 후진성을 벗지 못한 나라라는 정도였다.

멕시코시티에 처음 도착했을 때 거리가 사람과 차들로 붐비는 것이 서울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댈러스보다 훨씬 적도 쪽에 위치해 있음에도 해발 2200m의 고산지대에 있어 기온은 선선한 편이었다. 시내 곳곳에 세워진 각종 기념상과 대로변의 인물 조각상은 미국이나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시내 관광에 나서 멕시코인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과달루페 성당부터 찾아가 보았다. 어느 인디안 젊은이가 성모 마리아가 현현한 것을 목격하고 나서 그곳에 성당을 세웠다는데 (중앙제단 뒤에는 선인장 섬유질로 짠 판초 위에 갈색의 마리아 모습이 새겨진 기적의 '후안 디에고의 외투'가 걸려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피부가 갈색인 점이 특이하였다. 멕시코 시민들이 즐겨 찾는 이곳은 바로 스페인 식민문화와 인디안 토착문화의 접점 역할을 해온 성스러운 장소였다. 식민당국으로서는 토착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한편 인디안들의 볼 때 자기네와 같은 갈색 피부에, 같은 말(인디안 토착어)을 하는 동정녀 마리아가 병을 고쳐주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전통적인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다.
마리아가 현현한 성소에는 멕시코시티에서는 아주 귀한 물이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념조각상의 마리아는 인디안 추장의 깃털처럼 후광이 뻗쳐 있는데 갈색의 마리아 앞에는 스페인 신부가 서 있고 그 뒤에는 귀족과 백인 시민이 마리아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아랫도리만 가린 인디오는 그가 맨처음 마리아를 뵈었음에도 뒤에서 머리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멕시코의 사회구조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각이었다. 식민시대의 멕시코에는 네 가지 계급이 있었다고 한다. 최상층에는 '페닌술라레'라 하여 스페인에서 파견된 왕족과 신부들이 멕시코의 정치·종교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밑의 '크리오요'는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이지만 멕시코에 이주한지 오래되어 정치권에서 배제된 채 경제를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다음은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소티소'들로 이들은 교육이나 출세에 제한을 받고 크리오요에 고용되어 일했으며, 최하층은 소작농을 하거나 막노동을 제공하는 토착 인디안들이었다.
멕시코인들이 19세기초 유럽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크리오요의 페닌술라레에 대한 반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지배계층은 전부 백인들로서 이들은 세습한 부를 배경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젊은 나이에 정부요직에 등용되고 있다. 그러나 메소티소는 여전히 정치, 경제를 독점하고 있는 백인들 밑에서 일하거나 자유업에 종사하고 있고, 인디안들은 도시나 농촌에서 절대 빈곤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1994년 신년 벽두에 멕시코 남부 치아파 주에서 일어난 '사파티스타' 반란은 그 주축이 인디안 농민들로서 이들이 토지개혁과 정치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멕시코가 당면한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

 

아즈텍 제국의 멸망사

치아파 반군이 내건 구호중에 콜럼버스 이전의 전통문화를 회복하겠다는 것이 들어있다. 멕시코의 지배계층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음에도 멕시코의 보통사람들은 차풀떼펙 공원 안의 인류학 박물관에 전시된 콜럼버스 이전의 인디안 문명과 그 유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국외자인 나로서도 인류학 박물관을 방문하고 떼오띠와칸 피라밋, 툴라의 유적등을 돌아본 후에는 멕시코 중앙계곡에서 펼쳐졌던 장엄한 인류의 드라마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스페인 콩퀴스타도들이 발달된 총포 화약무기를 가지고 멕시코 원주민들을 무력정복하였지만 그들의 문명은 결코 얕볼 수 없는 위치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멕시코시티 북쪽 약 50Km 지점에 있는 떼오띠와칸은 BC2세기부터 AD7세기까지 존재한 신정국가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AD350-650년에 걸쳐 번영의 절정에 달한 도시문명(이미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20만 명 이상의 주민(당시 이만한 규모의 유럽 도시는 로마뿐이었다)이 어느 날 갑자기 20여기의 거대한 피라밋만 남겨놓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웃 부족의 침입, 내부의 반란, 식량·식수의 부족으로 인한 집단이주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민족이었기에 그들의 흥망성쇠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994년 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인 '천국의 예언'에 의하면 이들 마야족은 집단적으로 영의 세계(?)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5백년후 아즈텍 인디안이 그 폐허를 발견하고 '이곳에서는 신들이 살았을 것이다'고 믿고 해와 달을 주제로 한 신화의 무대로 삼았다.
그것보다도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티의 옛 이름)의 멸망사는 더욱 처절하였다. 1200년경 멕시코 중앙 계곡에 도착한 아즈텍족은 호수 위의 한 섬에서 신이 계시한 땅('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 있는 [오늘날 멕시코 국기 안의 문장] 곳에 도시를 세우면 세상을 다스리는 왕국이 될 것이다')을 발견하고 1345년 그 선인장이 서있던 자리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아즈텍인들은 호수 위의 섬을 중심으로 호수를 매립해 나가는 한편 이웃 부족을 정복하여 공물을 거두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

1519년 11월 스페인 코르테스의 원정대가 처음 찾아왔을 때 아즈텍 조정에서는 항전론과 화친론이 팽팽히 맞섰다고 한다. 그러나 거대한 혜성의 출현을 목격한 목테수마 황제는 이상한 짐승(그 때 멕시코에는 말이 없었다)을 타고 온 하얀 피부에 수염을 기른 코르테스 일행이 지식의 신(켓살코아틀)이라 믿고 이들을 열렬히 환영키로 하였다. 노련한 전투 지휘자인 목테수마는 수백 명에 불과한 코르테스 일행을 처치한다 해도 머지 않아 그 몇 배되는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그러나 숫적으로 열세인 스페인 군대가 황제를 인질로 붙잡은 뒤 아즈텍 조정에서는 항전론이 우세하여 1521년 7월 1일 스페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심야에 도시를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르테스는 무력정복을 결심하고 아즈텍에 반감을 품은 인디안 부족들을 규합하여 배를 건조하고 대포를 동원하여 테노치티틀란을 포위공격하였다. 그때 코르테스는 도냐 마리나라고 하는 인디안 공주가 통역으로 수행하였는데, 코르테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여자 덕분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정보수집과 판단에 있어 아즈텍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1521년 8월 13일 아즈텍 전사들은 스페인 군대와 함께 건너온 천연두의 창궐, 식수.식량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용감히 싸웠지만 아즈텍 제국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던 아즈텍 신전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한가운데 태양이 새겨져 있는 직경 12피트의 '솔라 칼렌다 스톤'도 신전벽에 걸려 있다가 지하에 파묻혔다. 이것은 2백년후에야 발견되어 지금 인류학 박물관 안에서 그 용자를 자랑하고 있다.
그 결과 아즈텍 문명이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도 공사를 하다 옛날 유적을 발견하고 발굴작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소칼로 광장 한 구석에서도 유적발굴 현장이 공개되고 있었다. 아즈텍 지도자들이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고 외교술을 발휘할 줄 알았더라면 그 제국이, 그 문명이 그처럼 비참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면서, 19세기 말 한반도 주변상황과 비교가 되었다. ▲

 

멕시코의 NAFTA 협상방법

멕시코 정부가 미국과 NAFTA 협상을 벌이면서 취한 접근방법은 과거 아즈텍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었다. 즉 미국의 요구대로 멕시코 시장을 개방하되 멕시코의 핵심산업은 헌법규정을 이유로 (집권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개정할 수 있음에도) 절대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NAFTA에는 여러 가지 멕시코 특례 조항이 들어있다. 예컨대 석유산업은 국영기업인 PEMEX(멕시코 석유공사)의 독점체제를 인정받았으며, 금융산업에 있어서도 미국과 캐나다 은행의 진출을 허용하되 최근에 민영화된 멕시코 은행들이 경쟁에서 열세에 몰리지 않도록 시장점유율에 제한을 가하였다.

멕시코는 이미 1989년부터 외국인투자를 상당폭 자유화하여 금융산업의 경우 은행, 증권회사는 30%까지, 보험은 49%까지 외국인의 출자를 허용한 바 있다. 그러나 NAFTA에서는 미국과 캐나다의 금융기관이 100%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되 이들의 시장점유율이 2004년까지는 8%에서 15%를 넘지 못하도록 못박았다. 과도기중 개별 외국은행은 시장점유율이 1.5%를 넘지 못하지만 2004년 전체 시장점유율이 폐지되더라도 개별 기관의 시장점유율은 4% 이내로 묶어 놓았다. 대형 미국은행이 우세한 자금력과 금융 노하우를 가지고 멕시코 금융시장을 지배할 수 없게끔 제도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반면 NAFTA에서는 상호간에 최혜국대우(MFN)를 의무화하여 멕시코 은행들도 멕시코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남부지방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멕시코인들이 본국의 가족, 친지들에게 열심히 송금하는 습성을 감안할 때멕시코 은행들로서는 상당한 리테일 비즈니스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

 

NAFTA와 라비 바트라 교수

SMU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베스트셀러 '1990년 대공황'을 쓴 라비 바트라 교수도 있다. 1993년말 중요 현안문제로 대두되었던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1994년 봄 표면화된 미-일 무역갈등 때 바트라 교수는 캠퍼스 토론회의 논객으로 등장하였다.
1973년 약관에 SMU의 정교수 자리를 차지한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는 언제 들어도 논리가 단순명쾌하다. 다만 복잡한 경제현실을 너무 단순한 논리로 진단을 하고 처방을 내리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소수설을 면치 못하는 것 같다. 예컨대 자유무역주의에 대해서도 그는 매우 회의적이다. 정치 슬로건으로서는 매력적이지만 역사적 현실을 놓고 보면 부작용이 더 많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의 경우 1900년까지만 해도 관세율이 50%에 달했는데 윌슨 대통령때 10%대로 낮춰졌고 대공황 기간중 다시 40%로 오르긴 했지만 지금은 평균 5%라고 소개하면서 역대 미국 행정부가 관세율을 인하할 때에는 반드시 소득세율을 올렸음을 상기시켰다. 그 결과 미국의 국내수요가 감소하게 되는데 그때 마침 세계적인 불황으로 해외수요가 줄어들게 되면 미국의 불경기는 고통스럽게 장기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바트라 교수는 관세율을 올리고 소득세율을 낮춰야만 미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원리에 반하는 북미 자유무역협정은 미국 경제에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NAFTA 논쟁때 그는 시종일관 로스 페로와 같이 반대진영에 섰다.
바트라 교수는 미국과 일본의 무역갈등에 있어서는 일본 쪽의 원인부터 찾았다. 1973년 닉슨의 금태환정지 선언 이후 국제통화가 변동환율제로 이행하면서 일본 기업은 적극적인 해외시장 공략에 나서는 한편 코스트 절감과 임금인상 억제책을 폈다. 그 결과 일본 기업은 타국의 경쟁상대에 비해 생산성 향상과 임금상승의 격차가 두드러졌고 이는 일본 상품의 경쟁우위를 가져와 오늘날 일본이 엄청난 무역흑자를 보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미국의 당면문제는 실업률이 아니라 임시고용직, 저임금직이 크게 증가하고 실질임금이 낮아짐으로써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떨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미국이 자유무역을 실현한다고 관세율을 낮추는 것은 국내 소비자들의 희생 위에 일본같은 나라의 수출기업들만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라고 공박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새로운 GATT 체제가 출범함으로써 미국은 향후 5년간 139억불의 관세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미 행정부와 의회는 이러한 세원감소를 무엇으로 보충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다. ▲

 

국제투자론의 재미

SMU에서 가장 법 과목 같지 않음에도 학생들을 가장 법률가로서 훈련시키는 코스가 있다. 1994년 봄학기에 수강한 코펠리-캘리(K-K) 교수의 개도국 국제투자-무역론 강의였다. K-K 교수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가 도미니카에 트럭 공장을 세우는 프로젝트를 내걸고 학생들을 미국 기업, 도미니카 정부당국, 현지합작 파트너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그룹이 프로젝트 추진을 위하여 무엇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 것인지 스스로 토의하여 결정토록 일임하였다.
모두들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지 난감해 하였으나 K-K 교수로부터 몇 가지 코치를 받으면서 역시 예비 변호사들답게 근사하게 일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속한 미국 기업에서는 각자 전문분야를 살려 기업조직, 생산, 금융, 인사, 대정부 관계 등 부문별로 계획을 세우고 그룹내 토의를 거쳐 프로젝트를 확정지어 나갔다. 나는 금융부문을 맡았는데 유력한 투자자를 물색하는 것과 연평균 30% 이상 평가절하되는 도미니카의 환 리스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과제였다. 전자는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투자공사(IFC)를 유치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후자는 도미니카 중앙은행과 협상을 벌여 옵쇼어 거래와 유사한 외화예금 계정을 설치함으로써 환 리스크를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금융에 관한 사전지식이 없는 다른 학생들에게 옵쇼어 거래를 이해시키는 데 애를 먹고 '까다로운 협상상대'라는 말을 들었다.
도미니카 정부를 맡은 상대팀에서도 외국인투자를 심사·승인하는 정부부처를 구성하고 외국인투자법령을 마련하였다. 용케 도미니카 주재 미 대사관이 작성한 현지 투자환경 정보를 입수하여 가상이 아닌 실제상황처럼 진행하는 것이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미국 투자자와 도미니카 정부당국간에 투자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대한 K-K 교수의 코멘트를 듣는 것으로 첫번째 프로젝트를 끝냈다. 자기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미국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이 이런 식으로 협상능력을 배양함을 알게 되었다.

K-K 교수는 국제무역론 강의를 하면서 '오늘날의 국제무역환경 속에서 리카도의 비교우위설이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주제를 주고 토론을 유도하였다. 학생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는 가운데 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수업참여도가 바로 학점에 직결되므로) 한국의 예를 들어가며 경제적 판단만으로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한국에는 세계에 자랑거리인 공장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포항제철이고 다른 하나는 삼성 반도체 공장이다. 이들 공장을 세울 때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반대가 거셌다. 포철을 건설할 때 한국은 제철공장을 만드는 것보다 이를 수입해 쓰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적 결단을 내려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포철은 최첨단의 생산시설과 근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싼 값으로 양질의 강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제철공장을 세우고 보니 확고한 비교우위를 장악한 셈이 되었다." ▲

 

* SMU 로스쿨의 Underwood Law Library

법률 데이터베이스의 위력

로스쿨에도 '뉴 테크날러지'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다. 강의실마다 설치된 오버헤드 프로젝터나 스크린 등 시청각시설은 이제 구식에 속한다. 강의실마다 학교의 중앙컴퓨터에 연결하여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고 상당수의 학생은 노트북 P/C를 들고 다니며 노트정리를 한다. 논문작성도 물론 워드 프로세서로 하는데 도서관에 수십 대가 있으므로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한편 도서관의 장서는 전부 컴퓨터에 등록되어 있으므로 서가를 돌아다닐 필요 없이 단말기를 통해 주제 또는 저자별로 자료를 찾아보고 도서의 내용과 대출여부를 즉석 확인할 수 있다. 도서관에 없는 자료는 인터네트 등 전자 메일을 통해 입수할 수 있다.
로스쿨에서는 미국의 양대 법률 데이터베이스 공급회사인 렉시스와 웨스트로가 학기초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 사용법에 대한 특강을 실시하고 있다. 이들 두 회사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판례와 법령을 컴퓨터에 수록하기 시작하여 가입자들에게 온라인으로 풀텍스트 다큐먼트를 제공하고 있다. 로스쿨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개인카드와 집에서 연결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까지 나눠준다. 왜냐하면 학생 때부터 일단 데이터베이스 이용에 습관을 들이면 나중에 개업한 후에도 이것 없이는 일을 못할 줄 알기 때문이다. 3년간 공짜로 쓰게 하고 30년 이상 비싼 사용료를 물리려는 장사속셈이다.

1994년 4월 우리 나라 외환은행 사건에서 문제된 금융기관의 '이익의 충돌'에 관하여 미국의 판례나 법령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우선 렉시스나 웨스트로를 켠 다음 이용자 개인번호를 집어넣고 '뱅킹' 라이브러리를 열어 '법원' 또는 '기관'의 파일을 고른다. 주요 로스쿨에서 발행하는 학술지는 '로리뷰'의 라이브러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데이터베이스에 들어 있는 방대한 자료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료를 검색하기 위해 적절한 주제어를 조합하여 키보드로 쳐 넣어야 한다.
주제어를 이익, 충돌 둘만 넣으면 자료가 천 가지도 넘으니 좀더 범위를 좁히라는 메시지가 나온다. 그러므로 '이익-충돌, 은행-고객, 시기는 90년 이후' 이런 식으로 한정해가면서 검색자료의 수를 50개 이내의 범위로 줄여야 한다. 그리고 자료내용을 전부 훑어보거나 발췌해 보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프린터로 뽑는다. 미국에서는 은행이 증권업무를 취급할 때 이익의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은행부문과 증권부문 사이에 업무차단벽(파이어월)을 설치해야 하는데 이에 관한 연방대법원 판례가 여러 건 있고, 은행법에도 이익충돌방지에 관한 규정이 있음을 알 게 될 것이다.

데이터베이스의 검색원리는 '불리안' 집합이론이다. 사용자가 합집합과 교집합의 원리를 생각하면서 주제어를 AND와 OR로 엮어 넣으면 컴퓨터는 방대한 저장자료 중에서 지시받은 주제어 집합의 빈도수가 많은 순서에 따라 최근 것부터 불러낸다. 데이터는 판례, 법령은 물론 법률논문과 각종 신문·잡지기사까지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교수와 상급생들은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찾는 요령이 부족하면 엉뚱한 자료만 뒤지기 십상이고 아무래도 시간에 쫒기면서 스크린을 제대로 읽기 어려우므로 렉시스/웨스트로로는 원하는 자료의 80%만 찾아도 성공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큰 로펌이 아니고서는 마음대로 렉시스/웨스트로를 쓰기 어려울 터이므로 책으로 법령, 판례집을 찾는 요령부터 습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 통일상법전의 의의

로스쿨에서 몇 시간 강의를 듣다보면 유수한 법학자와 법조인들이 거의 모든 법분야에 걸쳐 '무엇이 법이고 어떻게 발전해야 할 것인지' 연구하여 이를 조문화한 '리스테이트먼트'를 만들고 각주에 통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유니폼 로'의 제정을 추진해 왔음을 알게 된다.
미국은 본래 불문법 국가였지만 연방국가로서 법을 체계적이고 통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이와 같이 법학자, 법조인들이 판례를 조문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벌여 왔다. 통일주법위원 전국회의(NCCUSL)와 미국법조협회(ALI)가 1942년부터 착수하여 지금은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통일상법(UCC)이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UCC는 1951년 처음 공표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는데 미국의 모든 주에서 이를 채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상거래에 관하여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규범이 시행되고 있다. 즉 매매, 임대차, 어음·수표거래, 은행예금 및 추심, 거액 전신송금(와이어 트랜스퍼), 신용장, 창고증권 및 운송증권, 투자증권, 담보부 거래(매출채권 및 동산담보증권의 매매 포함)등은 어느 주에서나 거의 똑같은 규정이 적용되고 있다. 그동안 연혁적인 이유로 프랑스 민법을 사용해오던 루이지애나주에서도 1993년 민법전을 UCC에 맞춰 개정(매매 편은 1995년 1월 1일자로 발효 예정)하였다.
우리 기업들도 UCC가 전혀 생소하지 않다. 국제거래 준거법을 뉴욕 주법으로 할 때 UCC가 적용되는 것은 물론 미국 은행이 관련된 신용장거래에 있어서도 신용장 통일규칙에 규정이 없으면 으레 미국 UCC가 원용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각국이 국제적으로 통일법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 그 기준 역할을 하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 대부분의 주에서 UCC를 그곳 실정에 맞게 도입함으로써 UCC의 국제적 권위를 더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국제거래를 하자면 UCC에 대한 지식이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UR 협상의 타결로 합리성과 실용성을 무기로 한 미국법이 국제 상거래를 지배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

 

미국의 은행법과 증권법

댈러스는 미국 남서부 지역의 금융센터로 댈러스 연방은행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석유산업의 퇴조와 부동산경기의 침체로 텍사스 일원의 은행, 저축대출조합(S&L)이 대거 부실화되면서 미국 최대의 금융 문제지역으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부실금융기관 구제·정리법(FIRREA)에 따라 그 뒷 처리를 맡은 정리신탁공사가 활발하게 사업을 벌여 왔고, 뱅크 원, 네이션즈 뱅크와 같은 타주의 큰 은행들이 텍사스 은행의 인수에 나섰으며 살아남은 은행들도 '안전하고 건전한 경영원칙'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만큼 은행이나 감독기관이 건전경영에 매우 민감하다.
한편 미국의 증권법은 법률, 규정의 가짓수도 많지만 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세히 규정되어 있다. 대공황을 겪은 나라로서 증권시장이 일반투자자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게끔 사기꾼, 모리배가 발을 붙이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에서의 스캔달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증권거래위원회의 법률전문가들은 규정을 개정하여 이를 방지하고자 애쓰고 있다.
이 때문에 로스쿨 교재 중에 해마다 수정증보판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은행법과 증권법일 것이다. 그만큼 감독기관의 규제내용이 치밀하게 조문화되어 있는 데다 그 개정을 요하는 이슈가 끊임없이 대두되는 까닭이다.

지금은 리스크 방지수단으로 이용되어온 스왑, 옵션 등의 금융 파생상품에 감독당국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들 금융상품에 투기바람이 불면서 실제로 일부 기업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자 이러한 상품을 개발, 보유하고 있는 은행, 증권회사의 안전경영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골몰해 있다. 만일 어느 한 은행이 파생상품의 거래에서 회복불능의 손해를 본다면? (마치 체르노빌 원전사고 '멜트 다운'과 같은 파국을 몰고 올 것이다) 은행.증권 감독당국은 또다시 납세자의 부담이 따르는 S&L 정리와 같은 금융산업구제는 되풀이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금명간 새로운 감독규정을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1994년 3월 미국의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곤두박질 치던 날 오후 증권법을 가르치는 잰비 변호사가 예고없이 휴강을 하였다. 우리 학생들은 주가폭락으로 손해를 본 어느 고객과 상담중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각자 모처럼 느긋한 오후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댈러스 지역의 경기후퇴와 자신의 취업을 우려하는 학생도 있었다. 댈러스는 과거 석유경기가 좋았을 때에는 크게 흥청거렸다 한다. SMU 캠퍼스의 메도우즈 뮤지엄도 이러한 오일 붐 산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메도우즈 미술관의 보물

SMU 캠퍼스에서 학생들보다 외부 인사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끄는 장소가 메도우즈 뮤지엄이다. 이 미술관은 텍사스의 석유갑부인 알거 메도우즈가 사별한 부인을 기념하여 1962년 그의 소장품을 학교에 기증하고 건축비까지 내놓아 건립되었다. 메도우즈 미술관은 스페인 밖에서 가장 값진 스페인 화가의 작품을 소장,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메도우즈가 스페인에서 석유개발사업을 벌이는 동안 그의 재력과 안목에 부응하는 콜렉션을 결심하고 미술품을 사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메도우즈 재단을 설립하여 각종 자선, 복지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메도우즈 콜렉션은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미술관은 예술대학과 붙어 있는데 자칫 지나쳐버리기 쉽다. 나는 몇 차례 특별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동안 특별히 좋아하는 그림을 만나게 되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초상화와 뻬리에 산체스의 극사실 풍경화 '강 풍경', 그리고 2층에 전시된 무리요의 작품 몇 점이었다. 17세기 스페인의 대화가 무리요가 그린 '십자가에 달린 예수', '성녀 후스타와 루피나'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관심을 가진 작품은 1층 현관입구에 높이 걸려 있는 '양무리 앞에 얼룩 막대기를 세워놓는 야곱'이었다.
이 그림의 오른쪽 큰 바위 밑에는 목자들이 얼룩무늬 양들을 멀리 떼어놓기 위해 몰고 가는데, 왼쪽 허름한 오두막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는 흰 양 무리가 물을 먹고 있고 중앙의 나무 밑에서는 야곱이 얼룩무늬 나게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를 양떼 앞에 늘어놓고 있다. 이 그림은 시냇물에 담긴 야곱의 발이 굴절되어 보일 정도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대목 이야기는 성경 창세기 30장에 나온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 밑에서 14년을 일한 뒤 고향에 돌아가겠다면서 그동안의 봉사에 대한 보수를 요구한다. 라반은 야곱더러 품삯을 정하라고 했지만 외삼촌의 인색함을 잘 아는지라 야곱은 기묘한 제안을 한다.
"외삼촌의 양과 염소떼 중에서 검고 점이나 얼룩백이 있는 것은 모두 가려내어 멀리 보내시고 앞으로 흰 양과 염소 중에서 검고 점이나 얼룩백이 있는 것이 나오면 저를 주십시오."

라반이 보기에 그것은 바보같은 제안이었으므로 즉각 수락하고 양떼 중에서 흰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사흘 길 걸리는 장소로 격리시켰다. 그리고 야곱은 무리요의 그림에 나오는 행동을 개시하였다. 야곱은 경험상 흰 양 중에서도 검거나 얼룩백이 새끼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멘델의 유전법칙(1865)이 나오기 4천년 전에 그 원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은 비록 흰 양이지만 상당수가 열성인자를 갖고 있으므로 세대를 거듭할 수록 검고 얼룩백이의 잡종이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점을 노렸다.
야곱은 14년간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도 아무렇게나 일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항상 연구하고 반성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야곱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 레아와 라헬의 자녀출산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노력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얼룩무늬의 막대기를 물구유 앞에 꽂아 놓았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 라반이 자기의 소유를 다 가로채 간다고 위협을 느끼리 만큼 야곱은 부자가 되어 있었다. ▲

 

* Murillo, Jacob Laying Peeled Rods before the Flocks of Laban c.1665. Meadows Museum, Dallas

휴즈-트리그 센터의 내력

메도우즈 미술관과는 대조적으로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하루 한번 이상 들르는 장소가 있다. 바로 휴즈-트리그 센터(학생회관)이다. 이 건물 1층에 교내 우체국, 전시장, 미니 마켓, 이발소가 있고, 지하층에는 볼룸, 회의실, 식당, 극장, 2층에는 대학신문사와 외국 유학생들의 고정사항을 처리해주는 인터내셔널 오피스가 있다.
기숙사생들은 우편물을 받으려면 반드시 학기 단위로 우체국 사서함을 임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우편물이 와있나 보기 위해서는 휴즈-트리그 센터에 매일 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학생회관 극장에서는 거의 매 주말 영화를 상영한다. 입장료는 대부분 무료이며 새로 개봉된 영화라 해도 학생증만 제시하면 1불만 내고 볼 수 있다. 나도 학생회관에 드나들면서 영화보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태리 '펠리니 영화'와 같은 특별 프로그램인 경우에는 따로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도 한다.

휴즈-트리그 센터는 캠퍼스에서 가장 최근에 준공된 건물에 속한다. 1927년 바로 이 자리에서 만나 평생을 해로한 SMU 동문 '키티' 휴즈와 '찰리' 트리그가 백만불을 기증하여 그들이 처음 만난지 60년후 그들의 이름을 딴 아담하면서도 유용한 학생들의 생활공간이 창조된 것이다. 학생회관 입구에 걸려있는 휴즈, 트리그 부부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가장 돈을 멋있게 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미국에서는 세제상 대를 물리는 재산상속이 어렵거니와 이처럼 뜻있는 기부를 하는 사람이 사회적 존경을 받게 되므로 부자들은 부지불식간에 뜻있는 사업에 거금을 쾌척하게 되는 모양이다.
예술대학 구내에도 1992년에 헌당식을 가진 그리어 가슨 홀이 있다. 영화 '마음의 행로'로 유명한 영국의 배우 그리어 가슨이 SMU에서 공부한 인연을 기려 후배들을 위해 멋있는 연극무대를 제공한 것이다. 이 건물 3층에는 그리어 가슨이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와 당시의 영화기자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SMU는 사립대학으로서 학교재정의 상당부분을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다. 해마다 졸업생 독지가나 유수 기업들로부터 들어오는 기부금액이 2천만불이 넘는다고 한다. 자기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기부금을 내는 게 아니라, 졸업생으로서 모교발전을 위해 돈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니 2세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 학교에 떳떳하게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 사립대학의 경우 이러한 기부금 수입이 없다면 학생들은 등록금을 훨씬 더 많이 내야 하고 기증자의 이름을 딴 캠퍼스 '랜드마크'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

 

법률소설, 법정영화의 인기

최근 개봉된 영화중에 도서관, 강의실등의 로스쿨 풍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펠리칸 브리프'이다. 원작소설은 백악관이 연루된 법조 부정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워싱턴에서 문제되고 있는 클린턴 대통령 부부의 '화이트워터' 스캔들과 묘한 일치를 보여 화제가 되었었다. 영화는 뉴올리언즈 프렌치 쿼터의 2층 발코니라든가 '마르디 그라스' 사육제 광경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내 눈에 한 가지 이상하게 비친 것은 교수가 질문할 때 학생들이 모두 손을 드는 장면이었다. 대부분 노트 필기하느라 정신이 없고 쥴리아 로버츠 같은 몇몇 학생만 손을 들 터인데……. 뉴올리안즈의 튤레인 로스쿨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루이지애나주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대륙법(시빌 로)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미국의 법률문화가 발달한 것은 법률소설, 법정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90년대 들어 이러한 경향에 불을 지른 것이 죤 그리샴이라는 변호사이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시시피에서 개업을 한 그리샴은 법정에 출입하면서 기막힌 사건을 목격하고 이것을 소설로 꾸며볼 생각을 했다. 틈틈히 원고를 써나가던 중 그의 부인이 너무 재미있다고 출판할 것을 권유하여 여러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열 다섯 군데에서 보기좋게 거절당한 끝에 가까스로 출판은 되었으나 역시 반응이 신통찮았다. 흑백문제를 다룬 그리샴이 가장 아끼는 처녀작 '타임 투 킬'은 그의 두 번째 소설 '더 펌'이 히트를 친 다음에야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리샴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그들이 필요로 하면서도 미워하는 변호사들의 내부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한결같이 FBI를 무능하게 그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소설책을 잡으면 손에서 뗄 수 없는 박진감과 서스펜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법조계를 떠나는 것도 독자들의 공감을 사는 것 같다.
그러므로 미치 변호사가 케이만 섬으로 도피하지 않고 마피아 두목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줄거리를 바꿔놓은 영화(우리 나라에서는 '야망의 함정'으로 개봉)는 원작자의 의도를 왜곡시킨 감이 있다. 더 펌과 펠리칸 브리프의 성공에 힘입어 그리샴은 이제 변호사 일은 그만두고 전업 소설가로 변신하였다. 독자들이 그의 다음 소설 '체임버'를 서점에 예약까지 하고 기다리는 형편이니 이것도 베스트셀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영화음악으로도 히트한 '필라델피아' 역시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지만 미국 변호사의 계층은 천차만별이다. AIDS에 걸린 톰 행크스는 굵직한 고객을 상대하는 '코퍼리트 로여'(기업변호사)이고 그를 변론하는 댄젤 워싱턴은 소소한 사건이나 처리해주는 '스트리트 로여'이다. 스트리트 로여가 주로 취급하는 인신상해(통상 'PI'라고 부른다) 사건은 승소하여야 수임료를 받는 조건이다. 영화 '피어레스'에서는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제프 브리지에게 PI 변호사가 자기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맡겨달라고 따귀를 맞으면서까지 쫓아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필라델피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톰 행크스가 자기를 해고한 로펌으로부터 받는 배상금 4백만불중 적어도 1/3은 댄젤 워싱턴의 몫이 될 것이다.
영화 필라델피아는 다시 한번 AIDS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1994년 4월 둘째주는 AIDS 주간이었다. 캠퍼스 곳곳에 계몽 포스터가 나붙고, 로스쿨에도 '죄책감도, 수치심도, 슬픔도 필요없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사람이니까'라는 철학적(?)인 문구의 사인 보드가 세워졌다. ▲

 

변호사는 쉽지 않은 전문직

변호사가 영화 '필라델피아'의 댄젤 워싱턴처럼 떼돈을 버는 것만은 아니다. 변호사도 일처리가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에 종종 멀프랙티스(업무상 과실) 소송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미국 변호사가 개업을 한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책임보험에 들기 위해 보험료 수표를 끊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보험에 들지 않고는 변호사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1994년 4월초 텍사스 변호사협회에서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변호사 개업에 관한 특강을 실시하였다. 이날 한 강사는 멀프랙티스 소송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객에게 '내게 전부 맡기라'는 식의 장담을 하지 말 것, 광고나 문서로 고객을 유치하면서 한 약속은 모두 지킬 것, 과거 및 현재의 소송의뢰인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는지 잘 살필 것, 고객과의 금전거래나 애정관계를 삼갈 것 등을 예로 들었다. 또 찾아오는 손님의 사건은 신중히 판단하여 수임하라고 충고를 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사건은 모르고 멀프랙티스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변호사는 소송의뢰인들의 각종 마감일자(통지, 답변, 시효등)에 신경을 써야 하므로 칼렌다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일 변호사가 깜빡하여 소송의뢰인이 중요한 권리를 상실하였다면 당장 소송 감이라는 말이었다. 소송의 천국인 미국에서 애증의 대상의 하나가 변호사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 변호사들은 처음부터 혼자 개업하기 보다는 큰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가 경험을 쌓은 후 독립하는 순서를 택하고 있다. 소설 더 펌의 첫머리에 잘 그려져 있는 것처럼 대부분 파트너십(동업조합)이나 주식회사로 조직된 로펌에 취직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파트너 밑의 어소시에이트로 일을 하다가 로펌의 수입증가와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였느냐에 따라 5-10년후 파트너로 승진하게 되는 것이다.
강의시간 중에 어느 교수가 답변을 우물쭈물하는 학생보고 '그래 가지고서야 어떤 고객이 당신에게 돈을 지불하겠느냐'며 힐난하는 것을 보았다. 미국에서는 변호사도 결로 쉽지 않은 직업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미국의 로펌은 자본주를 끌어들여 대형화되는 추세에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수백만불의 소송에 이기기 위하여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변론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로펌의 재력이 튼튼해야 이런 기술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교통사고 등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있어서 비디오 재연, 컴퓨터 애니메이션 등 첨단증거를 제출(이것을 '디지탈 소송'이라 한다)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

 

어느 외국 변호사의 미국 귀화

기독학생회의 3학년 회원인 넬루 프로단의 가족이 2월 하순 미국 시민권을 받는다는 광고가 있었다. 카이젤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가 부인과 함께 루마니아의 인권변호사로 상당한 화제의 인물이었음을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그들 부부는 체아우세스쿠 정권하에서 주로 반체제 인사들의 변론을 도맡았었다는데 한 차례의 구금과 여러 차례의 살해위협 끝에 미국대사관의 도움으로 6년전 댈러스에 정착한 것이었다. 넬루와 그 부인은 텍사스주 법률보조인의 자격을 얻어 법률회사에서 일하는 한편 넬루가 먼저 학업을 마치면 부인이 로스쿨에 입학할 예정이라 했다.

시민권 선서식은 학생회관에서 댈러스 연방지법 판사의 주재로 열렸다. 로스쿨 학생회에서도 후원을 했지만 로저스 학장, 그의 정착을 도왔던 인사 및 학생들이 다수 참석하여 그 가족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그러나 미국 국기를 흔들면서 미국 시민이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외치는 그가 한편으론 측은해 보였다. '그들을 쫓아냈던 공산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그들이 희구했던 자유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단계에 있는데 헌신짝 버리듯 루마니아 국적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법률은 한 나라의 이념과 제도,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법률가가 자기 나라를 떠나면 마치 뿌리 잘린 나무처럼 고사하게 된다. 1917년의 공산혁명후 서구로 피신한 러시아의 법조인들이 운전기사나 청소부밖에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처럼 다른 사회에서는 용도폐기되어야 할 운명인 것이다.
나중에 넬루는 나의 의문점에 대하여 해명하기를 90년 여름 루마니아에 돌아가 자기가 할 일을 알아보았는데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노골적인 생명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그들 부부는 미국에 와서 낳은 막내 아들과 같이 미국 시민권을 얻기로 결심했다는데, 댈러스 지역만 해도 루마니아 사람이 1천 명 이상 사는 등 미국에서도 조국 루마니아를 위해 할 일이 많다고 하였다.
넬루의 경우를 보더라도 '입법자가 세 마디만 고치면 온갖 법률문서가 휴지가 된다'는 말이 시사하듯 한 나라의 실정법을 다루는 법률가는 설 땅이 별로 넓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법과 질서'가 필요하고 이를 유지하는 사명은 법률가에게 맡겨지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국제적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경우 전문가의 법률자문을 받지 않고서는 헛 장사를 할 우려가 있다. 국제화 시대에는 법률가의 활동영역이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

 

학생의 교수 강의 평가

한국의 법과대학과 미국 로스쿨이 다른 점 중의 하나는 미국 교수들의 강의시작과 끝이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고 학기초에 예고한 스케쥴대로 강의를 진행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미국 학교가 이색적인 것은 학생이 교수를 평가하는 제도였다. 강의방법이 좋은지, 강의준비는 충실히 하였는지, 진도가 너무 빠르거나 늦지 않은지, 과제물의 양은 적당한지 매 학기말 학생들이 교수마다 채점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교수는 강의시간에 늦게 들어온다거나 매년 진부한 강의안을 재탕하는 등 학생들의 불만을 사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 결과가 정교수자격(테뉴어) 심사때 반영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여론이 좋지 않으면 그 전에도 학교를 떠나야 한다.
또 로스쿨 학생회에서는 학생들의 여론을 조사하여 잘 가르치는 교수한테 매년 '스마트 티쳐'라는 상을 수여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면서 이해하기 쉽게 잘 가르치는 교수를 추천받아 최다득표자에게 상을 주는 제도였다.

나는 2학기에 걸쳐 아홉 과목중 두 과목 빼놓고는 모두 J.D. 학생들과 함께 들었는데 로스쿨 교수는 다섯 분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댈러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외부강사들이었다. 따라서 SMU 패컬티 중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증권법의 스타인버그 교수, 증거법의 이즈 교수, 에너지법의 로우 교수, 우주법의 토벤펠트 교수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우리에게 국제거래법을 재미있게 가르쳐준 피터 윈십 교수는 하버드 졸업후 평화봉사단 멤버로서 에티오피아에서 법률고문을 맡은 적도 있는, 미국내에 널리 알려진 국제거래법 학자이다. 내가 1994년 봄학기에 계약법을 배운 그레고리 크레스피 교수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에서 근무한 예일 로스쿨 출신의 경제학박사이다. 크레스피의 강의는 진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강의시작 5분전에 교실에 들어와 칠판에 요점을 적어놓고 정확한 스케쥴에 따라 빈틈없이 강의를 진행해 나갔다. 강의시간을 넘기기 일쑤였으므로 다음 시간에 들어올 학생들은 문밖에서 한참씩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너무 상세한 부분까지 언급하는 바람에 미국법 개념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 외국학생들은 그의 과잉친절이 버거울 때가 많았다.
은행법을 담당한 죠셉 노턴 교수는 금융실무에 밝고 저술도 많은 은행법 전문가였다. 그는 한 가지 토픽을 정해 놓고 시간 내내 청산유수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배가 나온 노턴 교수는 강의 중에 콜라 한 병을 마셔가면서 종횡무진으로 법과 판례, 관행을 논하였으므로 그 앞에서는 아무도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그는 런던 대학에서도 은행법을 가르치고 있어 대서양을 길 건너다니듯 하였는데 런던 금융계의 사정에 정통한 것이 그의 또 다른 강점이었다.
교환교수로 온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트라이텔 교수도 화제의 대상이었다. 강의시간을 오전 8시로 정하여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지각, 결석하게 만든 단구의 노교수는 판서가 일체 없고 시종 단조로운 어조로 한 자리에 서서 강의를 하는 게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약법, 특히 무역거래법에 관하여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갖고 있는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강의가 끝나면 캠퍼스를 죠깅하는 트라이텔 교수는 굿 프로페서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굿 티쳐는 아니었던 것 같다. ▲

 

시험과 아우트라인

학기 중반이 되면 교수가 학생들을 은근히 채근하는 게 '아우트라인'이다. 로스쿨 강의가 케이스북 중심이므로 중요한 개념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로 법규와 판례의 요점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 로스쿨에서 케이스 중심으로 공부를 하지만 이를 외우고 시험준비하는 요령은 한국의 법대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출판업자들이 이러한 학생들의 수요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서점에는 과목별로 15불 안팎의 여러 종류 수험준비서가 수북히 쌓여 있다. 어느 것은 카드나 카세트 테이프로 되어 있으며 컴퓨터 디스켓으로 만들어 파는 것도 있다.
부지런한 학생은 수업시간의 강의내용을 토대로 여러 참고서를 종합하여 자기 것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학기초에는 연줄연줄을 통해 이른바 잘 만들어진 상급생의 아우트라인을 입수하기에 혈안이 된다.
아우트라인을 만들면 종합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고 시험 직전 단시간 내에 중요개념을 훑어볼 수 있어서 좋다. 잘 된 아우트라인은 '매직 워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 볼 때에도 이러한 핵심 단어를 빠뜨리면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미국의 주요 법과목을 공부하는 동안 '리즈너블'(합리적), '굿 페이쓰'(선의), '언페어'(불공정한), '언컨셔너블'(비양심적인)이라는 말은 거의 입에 붙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과목별 시험실시방법은 학기초에 공개된다. '오픈 북'이면 아우트라인이나 노트 등 참고자료를 시험장에 갖고 들어갈 수 있고, '클로즈드 북'이면 한국에서처럼 모든 것을 암기해서 써야 된다. 오픈 북 테스트이면 부담이 덜할 것 같지만 시험보는 가운데 참고서를 뒤적거릴 수 없는 노릇이므로 주요 개념은 다 외워 써야 한다는 점에서 결국 클로즈드 북 테스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오픈 북 테스트에서는 골치 아픈 까다로운 문제가 출제될 가능성이 많다.
시험문제는 과목에 따라 주요 개념을 약술하라거나 객관식으로 출제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전형적인 케이스 문제들이다. 변호사의 입장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라거나 쟁점을 논하라는 식이다. 시험시간은 보통 3시간이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LL.M. 학생에게는 1시간을 더 주는데 시험 볼 때마다 고문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밖에 '테이크 홈' 시험이 있다. 교수가 제출시한을 정하여 문제를 내주는데 일정한 분량의 답안을 집이나 도서관에서 작성하여 제출해야 한다. 물론 공동작업은 허용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10-20 페이지 분량의 정식 논문을 써내게 하기도 한다. 답안내용이 시간에 비례하여 좋아지는 게 아니므로 테이크 홈 시험이 반드시 쉬운 것만은 아니다.
로스쿨의 시험성적은 나중에 취업할 때 '톱 텐'(전체 석차 10% 이내)일 것 하는 식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상당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다가 자신이 없으면 시험 전에 자진탈락(이것을 '드랍'이라고 한다)하고 있다. 수업료를 두 번 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쁜 학점을 성적표에 올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

 

LL.M. 졸업앨범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우리 LL.M. 학생들은 기념앨범을 만들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LL.M. 대표를 맡은 오스트리아의 플로리안이 편집책임을 맡고 그후 여러 차례 모여 어떤 체제로 만들 것인지 토의를 거듭하였으나 문제는 돈이었다. 컬러로 제작하면 1인당 50불도 넘게 나온다는 계산이었다. 플로리안이 책임지고 학교측의 후원을 받기로 하고 각자 자신의 신상명세를 소개하는 2 페이지의 원고를 그에게 제출하였다.
나도 언젠가 써놓은 '빈 곳'( Emptiness on SMU Campus)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기고하였다. 댈러스나 SMU 캠퍼스에는 빈 곳이 많다. 재개발후 고층건물이 들어선 도심에 공터가 많은 것도 의외였는데 캠퍼스도 한산할 때가 많다. 구내 교회도 비어 있는 적이 많으며 정작 예배보러 오는 사람보다는 결혼식에 오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몇 주 지나면서 보니 교회 안에서는 수시 또는 정기적으로 예배모임이 열리고 있었고, 캠퍼스 중앙 분수대도 언제쯤이 오가는 학생들로 가장 붐비는지 알게 되었다. 언젠가 채워질 자리는 더 이상 빈 곳이 아니듯이 한산해 보이는 SMU 캠퍼스에도 학생들의 젊음과 낭만이 충만해 있음을 느낀다. 마치 학교옆 제빵공장의 빵굽는 냄새가 캠퍼스 대기 안에 가득 차 있듯이.

마침내 학기말 시험을 며칠 앞두고 앨범이 나왔다. 페이지마다 각자의 개성이 듬뿍 담겨 있었는데 SMU에서의 기쁨과 괴로움, 웃음과 한숨이 깃들어 있었다. 아침 강의를 듣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고통, 예습을 못하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초조함, 수십 페이지의 논문을 기한 내에 작성해야 하는 중압감 등이 여실히 묘사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클래스메이트를 촌평하는 글도 있었는데, 지난 8개월 동안 학생들이 몇 개의 부류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 도서관 면학파는 많은 시간 도서관이나 기숙사에서 J.D. 학생 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로는 한국의 문형근씨와 아르헨티나의 산드라, 대만의 캐씨가 대표적이었다. 둘째, 댈러스 향락파로는 활동범위를 캠퍼스에 국한시키지 않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쇼핑을 즐긴 모나코의 크리스, 터키의 무라트, 베네수엘라의 후안, 오스트리아의 도리트, 대만의 칭칭, 일본의 아베 판사(부인)등이 있었다. 또 인도네시아의 헤리 변호사처럼 댈러스의 더위와 무미건조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빨리 고국에 돌아가기를 원한 향수파 학생도 더러 있었다. 나는 가장 나이많은 조용한 금융 전문가로 비쳐져 있었는데, 내가 언젠가 주말 골프를 제안했던 일본 학생은 나를 단지 골프 동호인으로 써놓고 있었다. 그는 내가 SMU 음악회에 단골로 참석하였음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한국 학생이 3명이나 되었음에도 근사한 '코리안 파티'를 열지 못한 점이었다. 앨범의 화보에 재퍼니즈 파티가 크게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6명의 일본 학생들은 4월초 공동으로 일본 음식과 술을 차려놓고 클래스메이트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주말 파티를 가졌었다. 사실 이곳의 파티는 한국식 잔치가 아니라 스낵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때 몇몇 친구가 '다음은 한국 차례'라고 기대 섞인 부탁을 하였지만 기숙사에 사는 나로서는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다. ▲

 

골프-신앙생활 비교론

미국에서 골프는 대중화된 운동이다. 나는 한 주간 강의가 끝나는 금요일 오후에는 스트레스도 풀 겸 퍼블릭 코스로 나가 운동을 하였다. 그린피가 우리 돈으로 1-2만원 정도밖에 안하였다. 마침 같은 기숙사에는 앞으로 국제통상 전문변호사를 할 계획인 J.D. 3학년 李重宰 변호사와 고생물(공룡화석)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李隆濫씨가 있어 함께 나가는 적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공직자들이 골프를 칠 수 없어 '패트리어티즘이냐 퍼팅이냐' 햄릿 같은 고민을 한다고 미국 잡지에 가십이 실렸는데, 우리로서는 겨울이 없는 댈러스에서 금요일 날씨만 좋으면 필드에 나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좀처럼 스코어가 줄지 않는 게 고민이었다. 1주일 한 번 치는 골프로서는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하루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 부흥회 인도차 오신 목사님으로부터 사석에서 '골프를 치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첫째,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지켜보는 1번 티샷에서는 실수가 많다. 마찬가지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생활은 실수하기 쉽다.
둘째, 골프치는 사람은 페어웨이로 공을 보내고자 노력하지만 슬라이스나 후크가 나 공은 OB로 들어가기 일쑤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음은 원이로되 행동은 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세째, 페어웨이가 넓어 보이지만 티샷할 때의 안전권 발사각도는 불과 몇 도 이내이다. 그만큼 좁은 길이다.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네째, 골프 코스에는 벙커와 연못, 수로와 같은 해저드가 많아 주눅이 들면 십중팔구 실패하기 쉽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귀가 파놓은 함정이 많아 마음의 평정을 잃으면 자칫 함정에 빠지기 쉽다.
다섯째, 골프는 에티켓이 필요하다.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여섯째, 골프의 목적지인 그린 주변에는 으레 벙커가 가로놓여 있다. 천국 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수행하였던 열두 제자중의 한 명도 지옥에 빠지고 말았다.
일곱째, 그린을 앞에 놓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가 제일 위험하다. 마귀도 우리의 믿음이 깊다고 자만하는 순간을 노린다.
여덟째, 두 번에 온 그린 시키고 쓰리 퍼팅을 하는 사람보다 공을 세 번째에 가까스로 그린에 올리더라도 퍼팅이 정확한 사람의 스코어가 좋게 된다. 돌아온 탕자처럼 평소의 신앙생활에 허점이 많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믿음이 굳건해야 한다.
아홉째, 아무리 프로라 해도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초보자만도 못할 수 있지만 다음 홀에서는 회생할 수 있다. 신앙의 연조가 깊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즉시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열째, 골프는 공이 마지막 홀컵에 들어가기 전에는 게임이 끝나지 않는다.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까지는 완전한 평강과 구원을 누릴 수 없다. ▲

 

미국은 장애자의 천국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주인공이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오페라 '앙드레 쉬니어')를 들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톰 행크스는 1994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쉰들러의 리스트'에서 천사같은 역할을 한 라이암 니슨을 물리치고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그런데 '피아노'에서 말 못하는 여인역을 맡은 홀리 헌터가 여우 주연상을 받자 아카데미상은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물론 연기이지만)에게 돌아간다는 말이 나왔다. 지난 몇 년간 남우 주연상은 1993년 '여인의 향기'에서 실명한 예비역 중령역을 맡은 알 파치노, 89년 '나의 왼발'에서 뇌성마비의 시인역을 열연한 다니엘 데이-루이스, 88년 '레인 맨'에서 자폐증 환자로 분한 더스틴 호프만이 각각 수상했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 했다. 그날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주제가를 부른 닐 영 또한 뇌성마비의 두 아들을 둔 인기가수였다.

미국에는 장애자에 대한 편견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건물도 어느 곳이나 휠체어를 탄 장애자가 아무 불편없이 다닐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가 되어 있다. 시험 볼 때에도 미리 신청하면 특수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마침 나와 같은 기숙사에 있는 브래디도 뇌성마비라 발성이 느리고 보행이 불편하지만 정상인과 다름없이 공부하며 차를 몰고 다녔다. 그는 로스쿨 진학을 희망할 정도로 지적 능력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미국에는 장애자를 위한 법률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중증의 장애자도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다. 이 나라에는 소아마비에 걸린 대통령(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박아 동생을 둔 대통령(케네디)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장애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관심도를 떠나 아예 법으로 보장되고 있음을 알았다.

1990년에 제정된 '장애를 가진 미국인 법'(ADA)은 장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의 해방령'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 법은 장애자를 '하나 이상의 생활활동을 현저히 제한하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나 그러한 결함에 관한 기록을 가진 사람, 또는 그러한 결함을 가졌다고 인정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AIDS에 걸렸거나 그렇게 소문이 난 사람을 부당해고할 경우 그 고용주는 장애자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이 법은 현재 25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사업장에 적용되고 있으며, 건물을 신축·개축할 때에도 그 시설이 장애자법에서 정한 기준에 합치되어야 한다.
이처럼 미국 사람들은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사회에서 관심을 갖고 조기치료, 직업훈련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또는 컴퓨터, 기구장치와 같은 보조수단만 있으면 정상인 못지 않게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뇌성마비의 경우도 그렇다. 임신이나 분만 중에 뇌세포에 장애가 발생하여 평생불구가 되는 뇌성마비 환자들은 정신능력에 있어서는 아주 정상이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친부모조차 아이를 내다버리는 사례가 많은 실정이다. 나는 뇌성마비 아동들이 만든 시집 '우리들이 뛰어놀기 적당한 하루'에서 '그리운 아버지'라는 동시를 읽고, '나의 왼발'의 실제 주인공인 아이랜드의 시인·화가 크리스티 브라운과 서울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건강한 만큼 기회있는 대로 소외받은 뇌성마비 아동들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

 

다채로운 댈러스 지역문화

댈러스 하면 맨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한 도시라는 것과 카우보이즈 축구팀일 것이다. 또 TV 영화 '댈러스'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첫 장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우쓰포크 랜치'는 댈러스 북쪽 근교에 있으며, 드라마 속의 유잉 석유회사 빌딩도 실제로는 피나 석유회사의 황금빛 쌍둥이 건물이다.
그러나 댈러스에서 1년간 살다보니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난 30년 동안 다운타운은 상전벽해라 할 정도로 재개발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현대식 빌딩이 들어섰다.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저격한 교과서 창고(총기 보안검사가 철통같은 관광지로 바뀌었다)도 그 사건만 없었으면 진즉 헐렸어야 할 건물이다. 카우보이즈 축구팀도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지만 구단주 제리 존즈와 인기있는 헤드코치 지미 존슨이 갈라섬으로써 금년도 우승은 전혀 낙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보다는 서쪽 교외 알링턴에 새로 아름답게 개장된 '볼팍'에서 레인져스 야구팀이 승률 올리는 것을 기대하는 게 낫겠다는 말도 들린다. 레인져스의 구단주는 부시 전대통령의 차남으로 차기 텍사스 주지사 출마를 공언한 바 있다(조지 부시 2세는 텍사스 주지사를 거쳐 2000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또 다운타운에 있는 '리유니언' 아이스 하키장도 스포츠의 명소로 꼽힌다. 나도 클래스메이트들과 함께 어울려 이들 경기장에 가보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팀의 모자, 자켓을 걸치고 운동장에 나와 소리지르며 응원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았다.

댈러스에는 시민들의 자랑거리인 '모턴 마이어슨 심포니 센터'가 있다. 매우 아름답게 지어진 초현대식 건물로 세계 최고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 심포니 홀은 마치 우주선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1994년 1월 쉬트라우스의 오르간 곡을 그 음량의 최대한으로 들은 것은 경이적인 체험이었다. 30대 초반의 앤드류 리튼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댈러스 심포니는 국내외적으로 연주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미술관은 포트워쓰에 있는 킴벨 미술관이 훨씬 유명하다. 포트워쓰의 사업가 킴벨이 포트워쓰의 문화발전을 위해 건립한 이 미술관은 1994년 봄 '반즈' 콜렉션("세잔느에서 마티스까지")과 같은 기획전이 매우 훌륭하였다.
댈러스는 선벨트 중심도시인 것에 비해서는 재미있는 오락·연예시설이 별로 없다는 게 통념이다. 그러나 포트워쓰까지 시야를 넓혀 보면 재즈 라이브 뮤직으로 유명한 '캐러밴 오브 드림', 컨트리 생음악에 맞춰 춤을 즐길 수 있는 '빌리 밥'을 찾아볼 수 있다. 빌리 밥에서의 기본 복장은 남자나 여자나 청바지에 부츠, 카우보이(카우걸) 모자이므로 한 번 들어갔다가 톡톡히 촌사람(?)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설립 초부터 댈러스 시민들과 깊은 유대를 맺었던 SMU도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펼쳐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다. 아마츄어 학생들이 하는 것이지만 콘서트나 연극이 일반시민들에게 정기적으로 공개되고 있으며, 1993년 9월에는 댈러스 심포니 홀의 것 못지 않은 피스크 오르간이 설치·완공되어 매달 기념연주회를 가졌다.
SMU 맥팔린 강당에서는 '티타스'(댈러스 극예술협회)가 주최하는 공연이 수시로 열리는데 1993년 11월 일본 '산카이 주쿠'의 그로테스크한 무용공연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또 맥팔린 강당에서는 '테이트 렉쳐' 시리즈라 하는 저명인사 초청강연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1993/94년에는 아키오 모리타 소니 회장, 케야르 전 UN 사무총장, 딕 체니 전 국방장관 등이 와서 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였다. ▲

 

토플리스 바와 음란시비

댈러스 시내에서 시선을 가장 많이 끄는 간판은 '폰 샵'과 '토플리스 바'일 것이다. 전자는 서민들이 값나가는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거나 수표를 할인받는 우리 나라의 전당포에 해당하는 것이다. 후자는 가슴을 드러낸 댄서가 무대에서 춤추는 바로 손님들에게 맥주 정도는 제공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알콜 음료를 팔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다) 대로변에 시선을 자극하는 네온사인 광고가 서 있다. 성인잡지를 진열해놓고 팔지 못하게 하는 텍사스에서는 다소 예외적인 풍경이다.
물론 기독교 전통이 강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텍사스에서도 누드 쇼는 음란하고 사회의 도덕관념을 해친다 하여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미국사회 전반에 리버럴한 풍조가 만연되고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교회와 같은 보수단체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누드 쇼 영업을 제한 또는 불허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조례가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누드 댄서가 음란한 춤을 추는 것도 음악에 맞춰 자신의 사상.관념을 표현하는 행위에 속하는가? 이 경우 법관은 개인적인 입장을 떠나 어느 한 지역 주민의 도덕기준을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미 전국의 모든 시민에게 보장되는 기본권(언론의 자유)을 존중할 것인가 균형있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음란의 개념에 관하여는 1973년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밀러' 케이스 이래 '현재의 지역사회 기준'이 첫 번째 기준이 되고 있다. 즉, 문제가 된 작품이 지금의 지역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을 적용했을 때 보통의 사람으로 하여금 외설적인 관심을 자극하는가 하는 것을 따진다. 예컨대 뉴욕 맨하탄의 기준은 미국내에서 가장 진보적일 것이다.
밀러 케이스의 두 번째 기준은 문제가 된 작품이 그 주의 법에서 규정하는 성적인 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세 번째 기준은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또는 과학적인 중요한 가치를 결하고 있는가이다. 이상 세 가지 테스트에 모두 해당되면 그 작품은 음란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하여 연방대법원의 다수 대법관들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 1조의 해석상 몸의 전부 또는 일부를 노출시키고 춤을 추는 것이 어떤 의사표시를 담고 있다면 헌법상 보장되는 표현의 일부로서 용인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1991년 '반즈' 케이스). 물론 표현의 내용에 제한을 가할 수 있는데, 사회적인 가치가 희박하여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질서와 도덕관념에 관한 사회적 이익에 미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너무 외설적인 성인오락용 누드 쇼는 그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 하여 금지될 수 있다.
다만, 지방정부에서 이를 애매한 규정으로써 광범위하게 금지하는 것은 수정헌법 제 14조의 '적법절차'와 관련하여 위헌의 소지가 있다. 예컨대 토플리스 바의 경우 댄서가 누드로 춤추는 것은 허용하되, 외설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유두를 불투명한 덮개로 가리게 한다든가 성기나 음모가 드러나지 않는 차림을 의무화하는 규정은 합헌으로 본다. 또 토플리스 바가 있는 지역은 우범지대화할 우려가 있으므로 영업구역에 제한을 두는 것도 헌법 해석상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음란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과 공연을 보면서 에로티시즘을 느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SMU 무용학과에서는 수시로 무용발표회를 갖는데 1993/94 기간 중에도 무용공연을 하면서 에로틱한 장면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3월 하순에 공연을 가진 '픽 식스' 프로그램중에는 여자 무용수가 남자에게 달려가 뛰어 안기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는 노골적인 성애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밀러 케이스 기준에 의하면 음란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일이겠지만. ▲

 

한국 유학생의 개가

1994년 봄학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 SMU 캠퍼스에서는 조그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음악대학의 오페라 공연에 한국 유학생들이 모두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이다. 다이버시티다 뭐다 해도 전통적으로 유색인종에 대해 보수적인 댈러스와 SMU의 풍토에 비추어 보면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4월말 예술대학 구내 '봅 호프 씨어터'에서 상연된 푸치니작 '쟈니 스키키'와 '수오르 안젤리카'에서 바리톤 염경묵씨가 쟈니 스키키 역을 맡고, 소프라노 하정민씨와 이순화씨가 안젤리카 수녀 역을 교대로 맡아 열연하는 것을 보았다. 이들 한국 성악가들이 텍사스 일원의 콩쿠르를 휩쓸다시피 했기 때문에 실력은 이미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터이지만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드는' 푸치니 오페라에서 다른 미국 학생들을 제치고 주연으로 공연하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SMU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신학대학원 8명, 로스쿨 6명을 비롯하여 25명 정도 된다. 교포 1.5세, 2세를 합치면 50명도 넘을 것이다. 매년 8월말에는 학교부근 공원에서 신입회원을 환영하고 임원을 선출하는 피크닉을 겸한 모임을 갖고 있다. 패컬티에도 정치학과 동원모 교수, 전자공학과 이춘세 교수 등 한국인 교수가 몇 분 된다.
댈러스와 포트워쓰에는 SMU 외에도 유니버시티 텍사스 댈러스 및 알링턴, 텍사스 크리스쳔 유니버시티, 댈러스 신학교 등 많은 학교가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한국 유학생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댈러스, 포트워쓰가 대표적인 선벨트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한국 교포인구도 꾸준히 늘어나 현재 3-4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해리하인즈, 갈랜드등 몇 군데에서는 코리언 상권을 확보하였다. 교포은행도 1개(중앙은행)가 성업중이고 기업인으로서 성공한 교포도 여러 분 된다. 그리고 한인교회도 1백여 개에 달하는데 내가 다닌 댈러스 제일 연합감리교회(목사 김원기)는 설립된 지 20년이 되었다. 한국 선수가 출전하는 월드컵 축구경기가 1994년 6월 댈러스에서 열리고, 대한항공 또는 아시아나 항공이 댈러스/포트워쓰(DFW)에 취항하게 되면 한인 교포들의 지위는 지금보다 훨씬 향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

 

후배한테 주는 충고

해외유학이 자유화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고 있다. 미국 로스쿨의 경우 한국의 법과대학처럼 문호가 좁지 않다. 변호사 시험도 어지간히 공부하면 우리 나라의 사법시험보다는 쉽게 패스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은 변호사 수도 많은 만큼 경쟁도 치열하므로 미국에서 개업을 한다는 것은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상황이 많이 달라지겠지만 상당수의 교포 변호사는 동포들의 소액사건을 수임하는 스트리트 로여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법률시장 개방을 내다보고 서울에서 개업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지만 자신의 '프로페셔널 서비스'가 어느 정도 경쟁력과 상품가치가 있을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법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어느 분야를 전문으로 할 것인지 빨리 정하고 집중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법과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은 학부에서의 전공을 살려 금융, 특허등의 분야에 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배나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울에서부터 관심있는 분야의 정보를 갖고오면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자료수집과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물론 공부를 하는 가운데 관심분야가 바뀔 수 있으므로 '왓 이프?'(만일 ……한다면)이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가며 궤도수정을 해야 한다.
'만일 국제거래 전문변호사가 되려면 무슨 공부부터 해야 할까?' 커리큘럼에서 국제거래법, 회사법, 은행법, 증권법등의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국제거래중에서 어느 분야를 심도있게 공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예컨대, 상품(무역) 거래인지, 서비스 거래인지, 또 불공정거래를 공부한다면 특허권이나 상표권인지 아니면 저작권법인지, 은행.증권거래인 경우 단순한 파이넌싱인지 아니면 기업의 인수·합병인지, 그밖에 프랜차이즈, 기술이전, 국제조세, 국제분쟁해결 등 넓은 세계가 펼쳐지면서 그와 관련된 분야를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국제거래전문 변호사를 할 사람은 한국과 관련이 많은 뉴욕주나 캘리포니아주의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물론, 날로 다양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국제 법률시장에서 외국의 전문변호사들에게 지적인 분석력, 협상력에서 밀리지 않게끔 자신의 전문분야에 확고한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또 실무를 다룰 기회도 많이 가져야 한다. 미국 학생들이 1학년때부터 로펌에 나가서 인턴으로 일을 하고, 여름에는 유럽 등지로 가서 살아있는 공부를 하는 것이 무척 부러워 보였다.
그리고 국제거래 전문변호사가 되려면 영어 외에 최소한 일본어, 기왕이면 스페인어(미국내 스페인어 인구는 20%에 달한다)까지 구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국제적인 센스와 에티켓, 외국 사람과 그 문화를 이해하는 소양은 기본에 속한다. 업무의 생산성, 프리젠테이션 효과의 제고를 위해서는 컴퓨터도 잘 다룰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국제변호사는 국적에 관계없이 고객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해야 하지만 국제거래에서 한국 기업의 입장은 어떻게 될 것인지 큰 안목에서 국가이익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 변호사는 어디가서나 결국 한국관련 딜을 취급하게 되기 때문이다. ▲

 

에필로그

직장에서 연수를 보내준 덕분에 나로서는 유익한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우리 나라 기업들도 '법을 비즈니스에 활용'할 줄 아는 미국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국제거래법, 지적 재산권법 분야의 전문가를 시급히 양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기업들은 대미무역마찰이 심화되자 기업 단위로 해외 로스쿨에 많은 연수생을 파견하여 지금은 상당한 인력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SMU 로스쿨에도 일본의 학생, 회사원들이 1994/95학년도에 무려 30명 이상 지원해와 학교에서도 '저패니즈 클래스'를 따로(?) 만들어야겠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나로서는 국제금융 업무경험이 있기에 비록 10개월간이었지만 강의를 받으면서 실무지식의 '미싱 링크'(빠졌던 연결고리)를 보완할 수 있었던 게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주요 판례나 법조문에 대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주석이 정리되어 있고, 이러한 모든 자료가 도서관에 찾아보기 좋게 또는 데이터베이스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럽고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도서관 자료의 일부 만이라도 국내에 소개할 수 있다면 우리 나라 법률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텐데.'

미국 로스쿨에서의 1년은 가족과 떨어져 있었음에도 살같이 빨리 지나갔다. LL.M. 과정에서 미국법을 제대로 공부하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였다. 安京煥 교수가 소개한 위스턴 오든의 시처럼 '법을 사랑처럼 매달렸지만/사랑처럼 억지로는 못하고/벗어나지도 못했지만' 혼자서 짝사랑만 하다가 작별을 고하는 심정과 같았다.
그러나 법 공부를 하는 한편으론 시간을 최대한으로 할애하여 서울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문화생활을 만끽했다. 나이를 의식할 새 없이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희열을 맛보고 또 나 혼자만의 최고의 고급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아빠 없이 지낸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이러한 기회를 베풀어준 직장에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미국 학생들은 직장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고 졸업후에는 바로 복직을 시켜준다니까 너무나 부러워하였다. 그만큼 그들은 학비 마련과 취업문제로 고민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

 

UCLA 로스쿨 및 미국 사회 견문기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