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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레스 왕의 관용과 지혜의 리더십

Onepark 2025. 6. 23. 17:00

G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6월 13일 이스라엘이 이란을 기습 공격해 군 수뇌부와 핵 과학자들을 살해했어요. 두 나라의 전쟁이 한창 가열되던 중 미국은 B-2 전략폭격기를 통원해 이란의 핵 시설에 벙커버스터 폭탄을 투하했고요. 네이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옛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레스 왕이 누구이길래 왜 여기서 나오는거죠?

P : 고레스 왕은 성경식(히브리어) 발음이며 이란에서는 퀴루스 2세(Kurosch-e bozorg, 영어 Cyrus II, 재위 BC550-BC530)로 부르지요. 페르시아의 별칭인 아케메네스 제국을 창건하여 페르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서 작은 나라 메디아의 왕위에 올랐으나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리디아, 신 바빌로니아를 굴복시켰으며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어요.

 

 

G : 성경에서는 그가 어떻게 언급되어 있습니까?

P : 고레스가 태어나기 200년 전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죽음을 예언하셨던 분이니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킨 고레스 왕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어요.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이사야 44:28, 45:1)

 

고레스 왕은 어려서 왕실 목장에서 컸기에 그랬는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스스로 실천한 느낌도 들어요.

그리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제2차로 석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제사장이자 선지자였던 에스라도 다음과 같이 기록했어요.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에스라 1:1)

 

G : 제가 알기로 이사야 선지자는 남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 당하기 훨씬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돌아오리라 예언을 한 분 아닌가요?

P : 맞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놀라운 예언을 했는데 모두 정확히 맞혔습니다. 고레스 왕이 어려서 목동을 했으나 나중에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을 수축하고 성전의 기초를 세우게 한 것 등입니다. 에스라는 느부갓네살 왕이 탈취해 갔던 성전 기물도 모두 돌려주었다고 기록했지요.

 

G : 고레스가 어려서는 목동을 해야 할 정도로 빈천했었나요?

P :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여기에는 놀라운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키루스(Cyrus II)는 기원전 576(또는 590?)년 경에 페르시아 출신의 안산의 왕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공주 만다네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메디아 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어머니 만다네가 왕위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였으나 아스티아게스 왕은 공주가 결혼하기 전 그리고 임신했을 때 꾸었던 예지몽 때문에 몹시 불안해 했다. 만다네가 결혼하기 전엔 공주가 엄청난 양의 오줌을 누어 그의 도시가 잠기고 아시아를 뒤덮는 것이었고, 그 후 키루스를 가졌을 땐 만다네의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나더니 온 아시아를 뒤덮는 것이었다. 아스티아게스가 사제 마고스를 불러 해몽해 보니 만다네가 낳을 외손자가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된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아스티아게스 왕은 재상 하르파고스를 불러 외손자를 죽이라고 지시한다. 이윽고 키루스가 태어나고 하르파고스는 왕의 명령에 따라 자기 집에 몰래 데려왔으나, 혹시 만다네가 왕위에 올라 보복을 하진 않을까 두려워 이 일을 다른 이에게 맡겼다. 왕실 목동 미트라다테스는 키루스를 산속에 버려 죽게 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마침 그의 아내가 사산한 아기를 산속에 버리고 대신 키루스를 아들처럼 키운다.

키루스는 목동의 아들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기품이 있고 늠름했다. 어느날 귀족의 아들이 그와 싸워 얻어맞자 이 말을 들은 아스티아게스 왕은 목동 미트라다테스와  그의 아들 키루스를 불러 직접 심문하였다. 왕 앞에서도 당당한 자세로 말하는 키루스를 보고 의심이 든 왕은 진상을 파악한 후 자기의 외손자 키루스를 어찌할까 마고스 사제를 불러 의논하였다. 마고스는 키루스가 이미 연극 놀이에서 왕을 하였으니 더 이상 외할아버지의 왕위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안심한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를 친부모가 있는 페르시아로 보냈다.

 

* 아케메네스 왕조의 첫번째 수도였던 파사가르드에 있는 고레스 대왕의 묘
* 알렉산더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유적지

 

G : 듣고 보니 오이디푸스 설화와 아주 비슷합니다그려.

P : 야심 많은 키루스는 성년이 되자 민심을 잃은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준비하고 기원전 554년 메디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후 아스티아게스에게 아들을 잃은 하르파고스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549년 메디아에 승리를 거둔 후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개창했어요. 이어서 리디아와 신 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유목민 부족과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부왕의 확장정책을 계승해 이집트를 복속하는 데 성공했지요. 그러나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혼란을 틈타 키루스의 집권 이전에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아르사메스의 손자인 다리우스 1세가 황제로 즉위했지요.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성경에서는 에스더를 왕비로 맞은 아하수에로 왕 r.BC485-465)가 즉위하자마자 그리스와 전쟁을 벌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왕위를 계승한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r.BC464-424)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에게 제2차, 제3차 포로귀환을 허가하였지요.

 

G :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을 때 페르시아 대군의 침공으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가 불 탄 것에 대한 보복으로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전리품을 모두 약탈하고 궁전은 불 태웠다지요. 그런데 30km 떨어진 고레스 왕의 묘를 보러 와서는 경의를 표하고 갔다 합니다. 

P : 네, 저도 현장에 가서 보고 가이드로부터 그러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의 크세노폰 등에 의해 고레스 왕은 이상적인 군주이자 자비로운 대왕으로 그려져 만인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로부터 고난을 받고 양치는 목동에게 길러졌는데 폭군인 외할아버지를 타도하고 대 제국을 건설한 일대기는 전형적인 영웅신화였거든요. 알렉산더 대왕은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제국의 융화를 위해 고레스 왕을 본떠 종교적 관용정책과 포용정책을 표방했으며 피정복민들에게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어요. 크세노폰이 저술한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은 인성 개발과 군대 조직, 통치 방식 등에 관하여 당대는 물론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혔습니다. 마키아벨리는 키루스 왕은 자신의 실력과 덕망으로 군주가 된 사례라고 언급한 바 있어요.

 

* 이란 하마단 공원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치적비

 

G :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인구감소를 걱정하는 처지에 외국인 인구가 2백만명을 넘어섰으니 키루스 대왕의 통치 방식에서 무슨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P : 저 역시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영토 내의 여러 다양한 민족을 존중하고 통합하는 정책을 추진함. 외국인 이민자를 유치할 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적·종교적 관습까지 존중하고 지원하였음

둘째, 국민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가정의 부담을 사회가 함께 짊어지도록 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촉진함

셋째, 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인구 구조변화에 대해서도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정책을 마련함과 동시에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림

넷째, 인구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단순히 경제적 단위로 보지 않고 본질적인 가치와 존엄성을 지닌 개인으로 인식함. 이를 위해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사회 만들기에 노력함

요컨대, 키루스 대왕의 유산은 광대한 제국조차도 인간 복지, 관용, 다양성 존중을 우선시하는 정책에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페르시아 여행기(2016.07) : 페르세폴리스하마단 편 참조